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 * *
단은 잠깐 멈칫한 것 같았다. 주위가 어두워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그야 돌아가야죠. 호란 나리도 아시잖아요? 제 계약은 시문 나으리 모시고 남운관에 돌아가는 것까진데요.”
“응, 그랬지.”
“왜요, 저 없어질까 봐 걱정되세요? 그러게 지도 읽고 별시계 보는 것 좀 배워두시라니까는.”
단의 너스레에 한오가 웃었다. 호란은 조금 멋쩍어졌다.
호란이 따라 일어서자 두 남자는 한발 먼저 읍성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미 성문 앞에는 크고 작은 짐수레와 먼 채집터까지 갔다 온 채집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자연스레 대로를 걷는 사람들에 섞였다. 하지만 반민 걸음에 맞출 생각을 못 한 한오는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호란은 천천히 걸으면서 단의 등을 보았다.
단이 여행 중간에 떠나버릴까 봐 그런 질문을 한 건 아니었다. 단은 책임감이 강하니까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호란은 그저 단에게 지금은 돌아갈 곳이 있는지, 그게 남운관인지 알고 싶었다.
단이 자신에게는 갈 데도 없고 미래도 없다고 믿어서 양곤호 같은 사람의 상단에 몇 년이나 있었다고 생각하면 호란은 화가 났다. 단은 그러면 안 됐다.
다른 사람도 그런 일을 겪으면 안 됐지만 단은 더 그러면 안 됐다.
호란은 단을 따라가 옆에 찰싹 붙었다.
보폭을 맞추며 어깨에 살짝 머리를 대자 단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내려다보았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왜 또 치대는데?”
“그냥.”
“그냥이 뭐야? 떨어져. 난 괜한 오해 사기 싫어.”
단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제 쪽에서 먼저 거리를 벌렸다.
호란은 단이 벌려둔 거리만큼 떨어진 채 속도를 맞춰 걸었다. 앞쪽에서 천천히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 * *
아침, 단구읍성 치읍감 남씨 소예는 온통 초조해져 있었다.
그는 지금 협약을 맺은 여러 관성에서 자기가 어떤 소리를 듣는지 알고 있었다. 사방의 원성이 다 단구읍성으로 쏠리는 것도, 단구 백성들마저 저를 미워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설마하니 문에게서까지 책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자신을 책하러 그 완씨 시문이 직접 올 줄은.
돌 인간 정벌을 위해 마력석을 내놓으라고 온 것이면 차라리 편할 것이다. 하지만 어제 완씨 시문의 도착에 앞서 청천읍성에서 보내온 전갈을 보면 그럴 가망은 전혀 없었다.
예정된 만남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불안을 못 이기고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소예에게 핀잔이 날아들었다.
“어수선합니다. 좌석에 앉으시지요.”
말한 것은 태청이었다. 그는 탁자 앞에 앉아서 몇 장의 보고서를 읽는 중이었다.
소예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생각하는가. 설마 폐격까지 당하는 일은 없겠지, 그렇지?”
“너무 걱정이 많으시군요. 청천 치읍감 때도 폐격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합니다.”
태청은 소예를 쳐다보지도 않고 보고서를 넘기며 답했다. 존대를 하고 있는 것은 태청이었지만 이 관계에서 누가 우위인지는 명백했다.
어차피 소예는 태청의 태도에 불만을 가질 입장도 아니었다. 그가 기댈 곳은 태청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천 치읍감은 문을 뵌 당일에 파면되었다 하지 않나.”
“그 역시 휘하 관리들에게 탄핵을 당한 것이지 시문께서 직접 파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시면 그건 월권이지요.”
“그러나, 그래도, 문이신데….”
과연 문에게 월권이란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소예는 그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그제야 태청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
“벽명관과 대운관의 협약 또한 문령에 따라 맺어진 것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 물론 알고 있네. 내가 교문께 가능한 최대의 협력을 드린 것은 자네가 제일 잘 알 것이네.”
“그러하시니 지금 이렇게 걱정하실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
소예는 입술을 핥았다. 아무리 불안해도 당신네 문은 가짜 문이고 지금 만날 쪽은 진짜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하늘인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소예에겐 예조차 올리지 않고 태청에게 바싹 붙어 속삭이는 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태청은 이야기의 첫머리를 듣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부하에게 손짓해 말을 멈추게 하고 소예를 보았다.
“이제 나가보셔야지요. 시문을 모시러 가실 시간이 가깝습니다. 관아 바깥에 거처를 드린 것이 책잡힐 수 있으니 예를 다하는 모습을 보이시려면 직접 마중을 가셔야 합니다.”
“자네는….”
“저는 챙길 일이 더 있어서. 때에 맞춰 정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와 격식을 갖추는 일은 윗분께 부탁드리지요.”
“…….”
소예는 터덜터덜 방을 나갔다. 그는 이제 태청이 저를 턱끝으로 부리는 데 익숙해서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소속과 직위에 상관없이 땅인과 하늘인의 신분 차는 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단구읍성에선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위아래의 법도라고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소예에겐 다행스럽게도 태청은 완씨 시문 앞에서는 예의를 제대로 차렸다. 영접례가 끝났는데도 긴장해서 할 말을 못 찾는 소예 대신 안부까지 건넸다.
“간밤은 편안히 쉬셨습니까. 밤사이 부쩍 써늘해졌습니다.”
“덕택에 조용히 보냈다.”
시현이 답하자 그제야 소예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거처가 괜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객사를 내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관아가 어수선하여….”
불필요한 말을 꺼내는 소예를 보고 태청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단구읍성의 관아 객사는 태청과 그 부하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방을 비워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객사 안팎에서 일하는 잡관과 일꾼들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 누가 무엇을 아는지, 뭐라 입을 놀릴지 몰라, 소예는 관아와 떨어진 빈 저택에 시현의 거처를 마련했다.
다만 뒤늦게 생각하면 그것도 잘한 일만은 아니었다.
시현은 정청 안쪽의 내실로 안내되었다. 거처에서 데려온 호위 열 사람은 정청 뜨락에 남겨두고 호란만 곁을 지켰다.
회의실에 준비된 자리는 셋뿐이었다. 소예와 태청을 제외하면 기록관조차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시현은 자리에 앉으며 짐짓 불편한 표정을 보였다.
“논장에 들어오는 사람이 이것뿐인가? 실무관이 필요할 터인데. 내가 어젯밤 말해두었을 것이다. 단구와 타 읍성 간에 맺은 마력석 관련 협약에 대해 물을 것이니 제반 사정을 보고할 준비를 하라고.”
소예가 머뭇머뭇 답했다.
“예, 물론 보고 올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고 있습니다마는…. 시간도 부족하고 잡다한 내용이 많은지라, 일단 문께서 무엇이 궁금하신지 먼저 여쭙고 정리하여 말씀드릴까 하고….”
“말의 뜻을 모르는가? 제반 사정이라 함은 모두 보고하라는 뜻이다.”
“예. 하지만 잡다한 내용이 많아서….”
회의는 방금 열렸으나 소예는 벌써부터 진땀을 내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치읍감 대신 태청이 입을 열었다.
“시문께서 이해해주십시오. 마력석에 관한 일은 대개가 군사 기밀입니다. 읍성 간의 협약 내용도 마찬가지로 기밀입니다. 무작정 자료를 한자리에 모을 수 없고, 일의 일부만을 맡은 실무관들 앞에서 모든 일을 드러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게도 밝힐 수 없다 하는가.”
“그럴 리가요. 치읍감이 모든 일의 책임자이시니 시문께서는 치읍감에게 물음을 내리시면 됩니다. 치읍감이 가능한 한 물음에 답하고, 말씀 듣고 더 세세한 내용이 필요하면 보고를 준비할 것입니다.”
시현은 이 수작을 잘 알았다. 감사가 들어오면 조직의 수장이 방패막이로 나서서 속이 빈 개요를 늘어놓고, 공격이 들어오면 ‘구체적인 것은 실무진의 일이라 제가 잘 모른다’ ‘알기는 아는데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안 난다’ ‘보고를 준비시키겠다’며 시간을 끈다. 그 사이에 실무진은 장부를 꿰어맞추며 진짜 변명을 준비한다.
빤하지만 막기 어려운 수법이었다. 만약 시현이 감사를 하러 온 것이라면 그 역시 다소나마 끌려다녔을지도 모른다.
시현은 가볍게 냉소하고 말했다.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대들은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에 대해 조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현은 조직 건전성을 제고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조직을 부수러 온 것이었다.
“오해라니요. 어찌…. 문께서 돌 인간을 퇴치하고 세상을 밝히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하시는 일은 백성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소예가 또 허둥거리며 하나 마나 한 말을 했다.
“그렇다. 나는 본래 돌 인간의 흔적을 쫓아 북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허나 벽명관을 지나다 보니 단구읍성이 주도한 과도한 징발로 고충을 호소하는 백성이 많았다. 위 된 도리로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어 가던 길을 멈추고 단구를 향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젯밤 요지를 전달하였을 것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허나, 징발이 과도하다는 말씀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적법한 협약 하에….”
소예가 조아렸던 머리를 번쩍 들고 서둘러 말했다. 밤새 걱정했던 내용이 나오자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었다.
청천읍성과의 협약에 대해서라면 시현이 무엇을 말하거나 변명거리가 빼곡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정 안 되면 청천에 약속한 마력석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품이라도 무게만 맞추면 그만이다. 일단 협약 내용이 완수되면 징발한 사람을 돌려보내라 할 명분은 사라질 것이다.
소예의 속셈을 안 것처럼 시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엄하게 말했다.
“변명할 생각부터 하지 말라. 어떤 명분이 있다 한들, 관의 행사로 백성의 고통받았다면 시정할 길을 찾는 것이 위의 도리다.”
“면목 없습니다.”
“마력석을 얻고자 하는 것도 모두 벽명관의 백성을 살게 하고자 함이 아니겠느냐. 이를 이해했다면 내가 묻는 바에 명확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말씀 내리소서.”
소예는 공손히 말하면서 준비한 답변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굴렸다.
그러나 다음에 시현이 입에 올린 질문은 소예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단구읍성은 관할지 광산의 마력석 채굴을 명목으로 청천, 칠무, 서리 등 최소 세 군데 이상의 읍성과 협약을 맺고 그 관할지에서 사람과 식량을 징발했다. 허나 노역자들이 단구의 채굴장에 투입된 것은 잠시뿐, 인력의 팔 할가량이 타처로 이동되었다. 치읍감은 빼돌린 인력을 어디로 보냈는지를 빠짐없이 답하라. 목적지가 한 곳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다.”
“예, 에…?”
“또한 채굴한 마력석의 태반은 가공조차 거치지 않고 타지로 내보냈는데, 이 또한 어디로 향했는지를 정확하게 밝히라.”
“아니, 저….”
“이 모든 행사는 개인의 전횡이라기엔 지나치구나. 누구의 명으로 이리하였으며 네 위의 누가 결정에 관여했는지를 아는 대로 밝히라.”
“…….”
“벽명관 쪽의 인사만 말해도 좋다. 다른 쪽은 짐작하는 바가 있으니.”
말을 다 맺은 시현은 태청에게 시선을 똑바로 보냈다. 소예 역시 중간부터는 땀에 젖은 채 태청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비해 태청은 완전히 태연했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시문께서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단구읍성 관할지의 광산은 이 앞의 한 곳이 아닙니다. 삼서산 안쪽에 채굴지도 있고 가공장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마 거기로 인부를 보낸 것을 들으시고 오해를….”
“단구 채굴장에서 일을 시키며 여러 핑계를 대어 인부들을 원래 제 무리와 갈라놓았으며, 이렇게 갈라낸 인원을 외부로 보낼 때는 인부와 호송하는 병사 모두 길게는 열흘, 최소 닷새분의 식량을 딸려 보냈다 들었다. 하루에 움직이는 거리를 따지면 단구 관할지 밖으로 나가고도 한참 남을 기간이다.”
“하하하.”
태청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 역시 어젯밤 채굴장의 소동 뒤에는 시문께서 계셨군요. 하룻밤 사이에 많이도 파고드셨습니다. 덕택에 가엾은 병사들이 아주 경을 쳤습니다만.”
“내 탓이 아니다. 그대가 내가 관아 사람들과 접하는 걸 꺼려 외곽의 거처를 주지 않았는가.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밖에 수가 없었느니.”
시현이 말하면서 태청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간에 패 숨기기가 의미 없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