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 * *
처소에 발을 들이는 호란과 시현의 마음은 무거웠다. 어제까지 얼굴을 보았던 시종들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경비병도 모두 바뀌었다.
새로 온 시종들이 깊이 절하며 시현을 맞았지만 시현은 도저히 인사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새 시종장의 이름만 듣고 주위를 모두 물렸다.
대청 앞에는 먼저 돌아온 단이 서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은 이미 다 알고 있는지 얼굴이 어두웠다.
“오셨습니까.”
“단. 별일 없이 돌아왔구나. 괜찮으냐?”
시현이 안부를 건네자 단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괜찮지 않을 일은 없지요. 환복과 세신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처소 사정은….”
“들어야 할 것은 들었습니다….”
단이 말을 하다 못 참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빠르게 새하얘졌다.
“단, 혹시 봤어?”
호란이 걱정하는 목소리를 냈다. 접촉을 최소화했다고는 해도 처소 사람들과 얼굴을 가장 많이 맞댄 것은 단이었다.
단은 고개를 젓고 작게 말했다.
“안 봤어. 보고 싶지 않아.”
그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시현이 그의 등을 쓸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고생했다.”
내실로 든 후 시현이 단과 호란에게 말했다.
“너희도 이 며칠 마음 고생이 많았겠지. 짐을 꾸리자. 내일 떠나자꾸나.”
“예? 대운관을 떠나는 겁니까?”
단은 생각도 못 한 것처럼 당황했다.
“그래. 심산에 갈 것이다.”
“심산에 간 대운관 수색대가 무엇을 발견했다고 합니까?”
“그런 보고는 없지만, 장소가 심산인 것은 운모가 확인해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돌 인간과 교문이 결탁하는 것을 막은 것만으로 대운관에 온 목적은 이미 이루었다. 더는 머물 이유가 없구나.”
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떠나는 거 찬성이에요. 교문이 정말로 약속을 지킬지도 잘 모르겠고.”
“약속?”
태화관에서의 일을 모르는 단이 물었다. 시현이 말했다.
“교문이 내게 더 이상 사람들을 희생시켜 가며 수작하는 것을 그만두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야 없겠지요. 대운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데.”
단이 가볍게 냉소했다. 시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교문의 폭거를 막고 싶지만 지금은 어렵구나. 관성 자치권의 문제가 있는 데다, 당장의 적은 돌 인간이니.”
“그렇죠. 나리님의 적은 돌 인간이죠….”
단이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심산에서 돌 인간의 근거지를 찾아 해결한 뒤에도, 다시 대운관에 돌아오지는 않는 거지요?”
“…….”
시현은 미련이 남는 듯 잠시 망설이다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법력이 모이는 장소를 찾아내고, 돌 인간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 뒤에는… 어쩌면 그 뒤에는, 무언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어찌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단이 일어나 방을 나갔다. 시현이 호란에게 말했다.
“갑자기 준비하려니 바빠지겠구나. 네가 들여다보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주거라.”
“저는 시문 님 곁에 있어야죠.”
“호위라면 걱정 말거라. 잘 때가 아니면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다.”
시현은 마력석이 몇 개 든 귀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무 일 없을 것이다’라거나 ‘대운관의 호위가 있지 않으냐’ 같은 말이 아니라서 호란의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현이 마음먹고 주위를 경계하면 하늘인 호위 이십 명보다 더 방위가 단단할 것이다. 호란은 걱정을 덜어내고 방을 나왔다.
처소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경비 상황을 살핀 뒤, 호란은 처소에 딸린 수렛간으로 갔다.
그런데 짐 정리로 한창 부산스러울 줄 알았던 수렛간은 기척 없이 조용했다. 단은 수레의 짐칸을 열어놓은 채 수렛간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단, 뭐 해?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을 일은… 없지.”
단이 조금 멍한 채 대답했다. 호란은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갔다.
“단, 요즘 좀 이상한 거 단도 알지? 왜 그런지 물어봐도 돼?”
“아니, 안 돼.”
가차없는 거절에 호란은 할 말이 사라졌다. 그는 수레 옆에 한동안 멀뚱하게 서 있었다.
조금 후 단이 말했다.
“그동안 줄곧 현실 도피 중이었는데. 이제 와서 후회가 되네.”
“뭐가?”
“그걸 모르겠어. 내가 후회할 게 있나?”
“???”
선문답도 안 되는 맥락 없는 말에 호란은 혼란에 빠졌다.
어쨌든 단이 입을 연 건 수확이었기에 호란은 단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단이 느릿느릿 말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당연하잖아?”
“그렇지.”
“그러면 후회도 생기지 않아야 맞잖아?”
“그렇…지만.”
호란은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흔들고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은 지금 후회스러운 기분이 든다는 거 아니야? 기분이 중요한 거 아니야?”
“그것도 잘 모르겠어….”
단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호란은 단이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것을 생전 처음으로 보았다. 하지만 자세한 사연을 모르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호란은 적어도 마음이라도 전해지길 바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단, 단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사람이잖아. 뭔가 생각나는 일이 있으면 일단 해보면 어때? 내가 도와줄게.”
허공을 헤매던 단의 시선이 호란에게 닿았다.
“일단 해보라고.”
“응. 뭐든지간에!”
“네가 도와준다고?”
“응!”
“…….”
호란은 자기로 안 되면 시문 님도 뭐든 도와줄 거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렛간 문을 닫았다.
“단?”
단은 유등을 켠 다음 수레에 실린 공구함에서 쇠지레를 내렸다. 그가 수레 옆 빈 바닥을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닥에 깔린 큰 판석들 보이지.”
“응.”
“내가 지렛대로 틈을 벌릴 테니까. 하나씩 빼내 줘. 깨지면 안 돼. 다시 끼울 거야.”
“어, 응.”
호란은 왜냐고 묻지 않고 일단 움직였다. 판석 두 개를 치우자 사람 하나가 웅크려 누울 만한 흙바닥이 드러났다.
“여기 바닥, 도구 없이 팔 수 있지? 소리 나지 않게.”
“응.”
호란은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대답했다. 판석 아래 지면은 자갈이 섞이고 딱딱해 보였지만 못 팔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있어 봐.”
단은 수레 짐칸에서 그는 이중으로 봉해 놓은 커다란 마력석 함을 열었다. 마력석 무더기 아래에는 단단하게 천으로 싸인 길다란 사각함이 들어 있었다.
그가 사각함을 꺼내 와서 말했다.
“이걸 판석 아래 묻을 거야. 길죽한 형태로 파 줘. 파낸 흙은 판석 위로 흘리지 말고. 여기 빈 자루에 담아.”
“그 상자는 뭐야…? 아.”
호란은 질문을 하다가 스스로 멈췄다. 단이 입꼬리를 움직였다.
“생각하는 그게 맞아. 완씨 시문의 위세라도 휘감지 않고는 결코 대운관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없는 물건들이지.”
크기와 형태로 보면 상자 안에 든 것은 틀림없는 장총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전부 처분한 줄 알았는데…. 단이 먼저 처분하겠다고 했잖아.”
호란이 작게 소곤거렸다.
단은 벽명관에서 대운관으로 떠나기 전, 갖고 있던 총과 포, 화약류 따위를 전부 소영네 무리를 통해 처분했다.
북방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대운관은 화기와 화약을 엄중하게 금하기 때문에 쓸데없이 경계를 사거나 시빗거리를 줄 수 있다는 거였다.
단이 마찬가지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혹시나 해서 가져왔어. 만에 하나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왜 묻어두는데?”
“두고 가려고.”
“여기다가?”
호란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대운관이 화약과 화기를 그렇게 엄중히 금한다는데, 시현이 떠난 다음 이런 물건이 궁 안 수렛간에서 발견되면 엄청난 사달이 날 수도 있었다.
단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은 떠나지만, 나중에 다시 대운관에 오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때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만약에 우리가 대운관에 다시 온다고 해도, 또 이 처소를 쓰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잖아?”
“최소한 총을 갖고 관성 검문을 통과하고 대운궁에 들어오는 과정은 생략할 수 있잖아.”
“하지만….”
호란은 하고 싶은 말도 많고 걱정도 많았지만 꿀꺽 삼켰다. 뭐든지 생각 나는 일을 하라고, 뭐든지 돕겠다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작업이 끝나고 판석을 도로 덮은 뒤, 단은 흙이 담긴 자루를 마력석 함에 숨겼다. 호란의 손과 옷에 묻은 흙과 모래도 꼼꼼히 닦아주었다.
수렛간은 원래 바깥 흙이 끌려들어오는 장소였기에, 바닥을 한번 쓸고 나자 수상한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른 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움직임에는 평소의 빠릿함이 되돌아와 있었다.
호란은 더 도울 일이 없냐고 물으려다 그냥 수렛간을 빠져나왔다.
사실은 단이 무엇을 예측하고 무엇을 준비하려는 건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도 대답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가능하면 대운관에 다시 돌아올 일도 저 총을 다시 꺼낼 일도 없으면 좋겠다고, 저 총이 영영 저대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호란은 생각했다.
교연은 다음 날 바로 심산으로 떠나겠다는 시현을 붙잡지 않았다. 알겠다는 전갈이 돌아왔을 뿐 예의상의 아쉬워하는 말, 식사 자리나 다회를 하자는 말도 없었다.
누각에서의 담판이 매우 유감스러웠음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통해 심산까지 대운관군이 동행하여 기존의 수색대와 합류할 일정을 상의하게 하는 것을 보면 기껏 만든 협조 체제를 어그러뜨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시현의 입장에선 그것으로 충분했다.
곤란한 일은 다음 날 출발 직전에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교연과 작별을 나누고자 시현이 호란과 함께 태화관을 향하려는데, 시종장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시문이시여, 외람되오나….”
“무엇인가.”
“교문께서는 송별을 위해 태화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시종장이 안절부절 못하며 시현의 뒤에 선 호란에게 눈길을 보냈다.
“더 이상은 태화관에 드실 때 하늘족 호위와 동행하실 수 없사옵니다.”
“무어라 하였느냐.”
시현이 기가 막혀 하자 시종장은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였다.
“용서하소서! 허나… 허나 이것은 대운궁의 오래된 법도입니다. 그간 시문께만 예외를 적용해왔던 것이온데, 하늘족 장수가 도당을 짜 궁을 어지럽힌 일이 있었으므로….”
시종장이 말을 흐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 역시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화가 처형된 당일에도 시현은 호란과 함께 태화관에 드나들었었다. 이것은 교연이 걸어오는 기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시현은 지친 듯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나를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시종장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가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대로 시현이 궁을 나가 버리면 불똥이 누구에게 튈지는 뻔했다.
시현이 미안한 마음으로 돌아서려는데 곁에 서 있던 단이 말했다.
“다녀오시죠.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단, 네가?”
시현은 놀라서 물었다. 평소 단은 시현이 공식석상에 나갈 때면 가능한 동행을 피하려고 들었다.
단이 차분하게 말했다.
“애초에 나리님께서는 교문과 척을 지지 않으려고 대운관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지금 떠나시는 것도 같은 뜻이고요. 둥글게 마무리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