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41
241화
* * *
그는 사람들에게 단 한 가지만 요구했다. 위교연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8년간의 대역죄 선고를 전부 무효로 돌리는 것이었다.
죄를 선고받은 사람 중 살아남은 이가 손꼽을 만큼도 없다 해도 이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중시조 위씨 가문을 숙청한 데에 최대한 많은 명분이 필요했던 대운관 사람들도 기꺼이 찬성했다.
다만 그 실행 방식에 있어서는 시현과 다른 이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선고 폐기의 이유를 적을 때, 처음부터 죄가 없었다는 의미로 무실이라 적을 것인지, 아니면 지은 죄를 용서하고 양인 신분을 복원한다는 의미로 사면복권이라 적을 것인지를 두고 거의 일주일 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리고 시현이 졌다.
땅인들은 물론이고 태청과 하늘인들조차 무실이란 의견에 반대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위와 아래가 나뉘어 있는 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위를 거스르려 한 일이 무실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시현은 최소한 이 일을 누구도 되돌리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한 명씩 전원에게 사면장을 발부하고, 산더미 같은 선고문과 기록물을 모두 가져오게 해 확인하고 죄인의 이름 위에 직접 먹으로 선을 그어 지웠다. 한 장 한 장에 전부 문령으로 사면복권한다 적고 서명과 인장을 남겼다.
밤이 깊어갈 무렵, 5년여 전의 선고문에서 연좌자 권단의 이름을 발견한 시현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는 한동안 문서를 내려다보다가 붓을 고쳐잡았다. 그리고 하던 대로 선을 긋고 글씨를 써 나갔다.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고 너무 보잘것없었다.
* * *
대운관 체류가 길어지는 동안 단은 더 이상 정변이니 태청이니 위씨 집안이니 하는 일에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방에 처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는지 무얼 하는지 몰랐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았다.
시중꾼이 시현의 약을 달이다 태웠을 때 한 번 방에서 뛰쳐나왔을 뿐, 내버려 두면 하루 종일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호란이 매끼 밥상을 들고 들어가서 같이 먹었다. 호란이 이것저것 말을 시켜봐도 항상 건성이었다.
“잠시 놓아두거라. 시간이 필요한 일도 있다.”
호란이 조바심을 냈을 때 시현은 그렇게 말했다. 호란이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놔두면 밥도 제때 안 먹어요. 자기가 늘상 말하던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있다고요.”
“그럴 수도 있지.”
시현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단은 지친 거야. 지칠 만도 하지 않으냐.”
“그건, 그렇지만.”
시문 님이 직접 보질 않으셔서 그래요. 가끔은 그냥 놔두면 큰일 날 거 같은 얼굴이 돼요.
호란은 나오려던 말을 도로 속에 집어넣었다. 시현의 걱정을 늘리고 싶진 않았다.
그날 단과 시현은 명목상 화해한 것이었지만 실태적으로는 아예 벽을 치는 사이가 되었다. 마음의 벽 같은 게 아니라 처소인 별궁의 문과 벽, 각종 구조물을 적극 활용한 물리적인 벽이었다. 다시 말해 서로 얼굴을 안 봤다.
둘은 상대를 찾아가기는커녕 우연히라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둘 다 방에서 안 나오니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가끔씩 호란에게 단이 어떠냐 나리님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상대의 생사 여부엔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딱 그것뿐이었다.
그날 둘이서 붙들고 너무 울어서 얼굴 보기 쪽팔린 건지도 모르겠다고 호란은 생각했다.
호란이 한숨을 쉬었다.
“단은 이대로 방 안에만 있다가 대운관을 떠나려는 걸까요? 옛날 살던 집이나, 알던 사람이나, 찾아보지도 않고요?”
“호란. 그 말은 절대 단에게 해서는 안 된다.”
시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가 이미 알아보았다. 가족뿐 아니라 친척 중에도 연좌되어 죽은 이가 여럿이었다. 부친의 공방에서 일하던 이들도 죽거나 고초를 겪었다. 집도 공방도 모두 헐렸고 세간은 불태워져 남은 것이 없다. 단도 다 짐작할 것이다.”
호란은 속이 에여서 입을 딱 벌렸다. 말이 안 나오는 건 눈물이 날 것 같아서만이 아니었다.
“정말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한참 만에 호란이 말했다. 시현이 침통한 얼굴로 눈을 꽉 감았다.
“이제서 위교연이 죽었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가 천 번을 죽어도, 세상의 땅인이 모조리 죽어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할 것이다.”
“…단은, 대운관에 좋은 추억이 많다고 그랬는데….”
호란은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가장 아픈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호란도 경험해서 알았다. 하지만 이건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사람이 사람에게 도저히 이렇게 할 수는 없었다.
단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더 괴로웠다.
단과 시현이 두문불출하는 동안 호란은 가끔 대운관 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마음 한구석에는 단에게 무언가 위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찾아야 할지는 몰랐다. 하다못해 장거리의 주전부리라도 사다줄까 싶다가도 마지막엔 손이 안 갔다.
뭐가 위로이고 뭐가 상처일지 구분할 능력이 호란에게는 없었다.
위교연의 죽음과 이어진 정변으로 잔뜩 숨을 죽인 거리 분위기는 호란의 마음을 더 황량하게 했다.
그래서 대로 한가운데서 누가 뛰어와 자기를 불렀을 때 호란은 약간 놀랐다.
“나리, 나리.”
숨을 헐떡거리면서 그를 붙잡은 것은 윤한이었다.
마지막 날 호란이 광을 나간 뒤, 단도 호란도 윤한의 집을 다시 찾지 않았다.
단은 정변이 난 이상 우리가 더 접촉하면 한에게 위험만 커진다고 말했다. 한 또한 단과 얽히는 걸 내내 두려워했기에, 호란은 한이 먼저 말을 걸어오리라곤 생각을 못 했다.
“윤한이구나. 저번엔 고마웠어.”
호란이 인사하자 한은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서 호란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 호란은 그를 데리고 인적 없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은 남의 눈이 없는 데 와서도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리, 혹시, 혹시 그날 단이가….”
한은 서두만 꺼내고 말을 흐렸다.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단이 유백을 만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줄을 이어준 사람이었다.
단과 호란이 광을 나가 사라진 바로 그날 밤 위교연이 죽고 남방장군 태청이 태상장군이 되었다. 위씨들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고 단과 단의 가족이 모두 사면되었다. 바보라도 단이 이 일에서 무엇을 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은 무얼 물을 듯 물을 듯하면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을 우물거리다 그는 겨우 이렇게만 물었다.
“단이가, 무사히 한을 풀었습니까?”
호란은 가슴이 아팠다. 교연이 죽고 그 머리가 광장에 매달렸는데도, 그가 새긴 두려움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에 남아있었다.
호란은 한을 배려해서 에두른 표현을 했다.
“응. 단은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했어. 몸도 무사했고.”
“그렇습니까….”
한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호란은 조금 고민한 뒤 한에게 말했다.
“저…. 단이 너를 그렇게 원망하는 건 아닐 거야. 나한테는 네가 은인이라고 말했어.”
“압니다.”
한이 살짝 웃었다.
“단이는 어릴 때부터, 겁 먹으면 괜히 더 세게 나왔어요. 어디서 봤는지 왈짜패 흉내 내면서 사람한테 다가붙고. 영이가 그걸 보고 ‘키 큰 척한다’고 말해서 엄청 웃었었는데, 정말로 저렇게 키가 커져서….”
말하는 사이 한의 눈이 조금 붉어졌다.
“저는 차라리 원망이라도 해주면 고맙겠어요. 저든 누구든, 원망하고 미워해서라도 살아갈 기운이 생기면….”
“괜찮을 거야. 내가 잘 지켜볼게. 나는 단하고 친구니까.”
호란이 말하자 한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지만 연신 호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에 그가 품을 뒤져 천으로 싼 둥근 물건 하나를 호란에게 내밀었다.
“이거, 단이한테 전해 주세요. 혹시 길에서라도 마주칠까 해서 요 며칠 갖고 다녔어요. 단이는 보면 뭔지 알 겁니다.”
호란은 천뭉치를 받아들었다.
안에는 납작하고 딱딱한 것이 들어있었다. 크기에 비해선 무게가 있었다. 천으로 겹겹이 싸고 풀어보지 못하도록 바느질까지 해놓아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호란은 한이 건넨 물건을 소중하게 감싸들고 거처로 돌아갔다.
단은 대운관 사람들이 자신을 탓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 보이게 행동하는 사람도 실제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교연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단을 미워하는 게 아니었다.
호란은 단이 그걸 알길 바랐다. 한이 준 이 물건이 그걸 알려주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리에서 한을 만났다고 하자 단은 싫은 얼굴로 눈가를 찡그렸다.
“아는 척하지 말지. 그쪽은 더 연루되기 싫을 거야. 앞으로 뭐가 잘못돼서 태청이 날려가면 자기도 또 어떻게 얽힐지 모르는데.”
“아냐, 그 사람이 날 먼저 부른걸. 너한테 이거 주랬어.”
단에게 천에 싸인 물건을 건네면서도 호란은 그게 뭘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단은 손에 든 것만으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안 것 같았다.
그가 서둘러서 걸낭에서 가위를 꺼냈다. 실을 자르는 손놀림이 급했다.
천을 풀어헤치자 안에서 나온 것은 작은 별시계였다. 크기는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였고, 생김새도 투박했다. 단이 평소 쓰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별시계에 비해 훨씬 단순한 물건이었다.
단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고도자와 원판을 놀렸다. 오래 안 써선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단이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이거, 누나가 처음으로 설계한 별시계야. 아빠가 직접 황동으로 주물해서 만들어줬었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나중에 너무 못 만들었으니까 녹여버린다는 걸, 한이 형이 귀엽지 않냐면서 뺏어갔었어. 이걸 아직도 갖고 있었구나. 누나 이름도 박혔는데. 그 간담 쪼그만 인간이.”
단은 별시계를 들어 눈앞에 대고 고도자를 더 돌려보더니 혼잣말을 했다.
“분명 엄마 아빠가 다 붙어서 도와줬었는데, 이렇게밖에 못 만들었냐. 자기 입으로 재능 없다 소리 할 만했구나.”
호란은 단의 곁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별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여기 있는 글씨 단 이름 아니야?”
호란이 안쪽 원판을 가리키며 묻자 단이 웃었다.
“오, 이제 읽을 줄 알아?”
“단 이름은 쉽더라고. 디귿까지만 알아봐도 읽을 수 있어서.”
단이 판 한쪽의 작은 글씨들을 짚으며 말했다.
“맞아. 옆에는 성이야. 권. 권단. 그리고 이게 누나 이름이고, 이건 엄마. 이거는 아빠. 원래 제대로 만든 별시계에는 제작자 이름이 들어가. 설계자랑, 조형자랑. 첫 작업물이면 제작자 스승 이름도 들어가고. 내 이름은….”
단이 좀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식구들 이름 다 들어가는데 왜 나만 없냐고 떼써서 억지로 넣었지. 엄마가 그냥 이름 넣어주라고 했다고 누나가 너무 화 나서 사흘 동안 엄마랑 말도 안 했어.”
이런. 엄마가 아무거나 다 동생 줘라 동생 시켜줘라 할 때의 분함과 억울함은 호란이 너무나 잘 알았다.
호란의 표정을 본 단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때 내가 일곱 살인가 그랬어.”
소용없어. 세상에 너만 어렸냐?
어째 단이 대운관에 갖고 있는 좋은 추억은 들어보면 다 지만 좋은 추억이었다.
그래도 좀 더 그렇게 저만 좋은 대로 살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좋은 추억이 그의 밤잠을 깨우는 악몽이 되지 않고, 좋은 추억인 채로 남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왜 네가 울어.”
단이 웃으면서 호란의 머리를 토닥였다. 호란은 훌쩍이며 단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니까 왜 네가 치대냐고. 왜 이 인생에는 치대는 인간들이 떠나지를 않지 진짜.”
단은 고개를 저으면서 걸낭에서 천과 공구를 꺼내들었다.
그는 호란이 기대어 있게 둔 채로, 작은 별시계를 조심스럽게 분해해 손질하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