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06
306화
* * *
“알겠어. 나는 너와 싸우길 원하지 않아. 사람을 해치지 않을게.”
감람은 양손을 들고 몇 발짝 물러나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감람이 태도를 바꾼 것은 시현을 상대로 할 때만이었다. 그가 채원에게 냉랭한 시선을 던지더니 경고했다.
“조심해. 나는 시문과 상호작용하면서 점점 더 인간적이 되고 있어. 그건 더 다양한 감정이 생겨난다는 것이고, 그 감정에 따라 내 원칙이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야.”
“괴물이 어디서…!”
“채인, 그만하라.”
시현이 손을 들어 채원을 제지했다. 그는 누마루의 낮은 난간 바로 앞에 선 채 감람을 내려다보았다.
“심산에서의 일을 보답하겠다는 뜻에 변함이 없는가.”
“물론이야.”
“내가 마음에서 바라고 반드시 하고자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여기 하씨 채인의 말대로 세상에 거석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 돌 인간들이 세상에서 가져간 법력을 찾아내어 세상에 되돌리는 것이다. 그대가 이 두 가지 일에서 무엇 하나라도 나를 도울 수 있는가?”
“둘 다 내 동료들의 뜻에 반하는 일이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네.”
“거석을 만들고 있는 것은 그대 자신이기도 하다.”
“그건 큰 의미가 없어. 갈라졌으면 남남이라고 했잖아. 남이란 건 그 감람 역시 내가 존중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야.”
감람은 조금 전 시현이 했던 것을 흉내 내는 것처럼 턱에 손을 얹고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조금 후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슬슬 네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바라지 않는지는 알겠어. 좋아, 이렇게 하자. 시문 너는 또 하나의 감람이 있는 장소를 알고 싶어 했지?”
“그렇다.”
“나도 지금은 몰라. 하지만 찾을 수 있어. 내가 걜 찾아낸 다음에 거석 만드는 걸 그만두라고 설득을 해볼게.”
“설득이 될 리가 없다.”
“미리 단정하면 안 돼. 그건 대화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냐.”
느닷없이 튀어나온 정론에 시현은 조금 당황했다. 그가 물었다.
“만일 그 대화에 성과가 없다면?”
“그러면 또 다른 내가 있는 장소를 네게 알려줄게. 공정을 기하기 위해 그쪽에게도 네가 방해하러 갈 거라고 알려주고. 다만 이건 최저선이야. 나는 네 입장에서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향에서 노력할 거야. 특히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명 보호의 측면에서.”
시현은 감람과 눈을 마주했다. 감람의 표정은 진지했고 시선은 똑바로 시현을 향하고 있었다.
시현은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알겠다. 제안을 받아들이마.”
“기한은?”
옆에서 채원이 말했다. 아까만큼 흥분해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목소리에 초조가 있었다.
감람이 불쾌한 얼굴을 하자 채원이 다그쳤다.
“언제 돌아올지 정해야 할 것이 아니냐. 조사께서 남기신 일지에 네놈이 약조한 날짜에 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여럿 있었다. 감히 문을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할 셈이냐.”
“좋아.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를 기준 좌표로 두고 해가 열 번 지기 전에 돌아올게.”
“열흘이냐? 길다. 문께서 내내 이 자리에서 네놈을 기다리실 수는 없다.”
“시문은 아무 데로나 이동해도 괜찮아. 내가 찾아갈 수 있으니까.”
감람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손에 찬 패를 조작했다.
시현의 등줄기를 어떤 예감이 스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의 마력석에서 기운을 풀어내려 했다.
하지만 시현은 직전까지 감람을 신뢰할 상대로 여기고 있었다. 마음속에 묻어둔 부채감과 다른 감정도 있었다.
그 감정 때문에 대응이 한발 늦었다.
지축이 미세하게 울렸다. 감람의 발밑에 있었던 붉은 영역이 수 배로 확장되며 시현의 기감을 덮어 눌렀다. 그와 채원이 서 있는 누마루를 포함해 암자와 그 주위가 전부 범위에 들어갔다.
움직인 것은 영역의 반경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감람이 누마루 난간에 사뿐하게 한 발을 딛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뻗어 채원의 양옆에 있는 호위를 툭 밀었다. 별것 아닌 동작이었는데도 호위들은 아무 대응을 못 하고 나가떨어졌다.
여기까지가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감람은 시현의 바로 앞, 호위가 섰던 자리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가 시현을 향해 자연스럽고 친근한 표정으로 웃었다.
“알지? 나는 네게 호의를 갖고 있어. 내가 너와의 싸움을 피하려는 것은 그 이유가 가장 크지 네가 무서워서는 아냐. 매번 네가 날 당연히 이길 것처럼 말하는 게 좀 짜증이 나더라. 조금만 조심해 주면 고맙겠어.”
감람은 시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휙 몸을 날렸다. 누마루를 통과한 감람의 뒷모습이 고개 반대편을 향하는가 싶더니 빛과 같은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붉은 영역도 함께 지워졌다.
“도련님!”
“문이시여! 괜찮으십니까!”
호위들이 당황하고 분한 얼굴로 달려왔다. 감람이 힘 조절을 했는지 둘 다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채원은 긴장이 심했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단정하고 보기 좋은 얼굴이 일그러지고 붉었다.
그가 시현에게 물었다.
“문이시여, 저것을 믿고 일을 부탁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이겠습니까?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게 하는 것이 낫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말한 것은 지킨다.”
시현은 짧게 대답했다. 돌 인간에 대한 채원의 악감정이 생각보다 더 격했다.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시현은 감람을 살려둔 것이 옳았느냐는 질문에 당장 답을 할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스스로의 판단에 아무 확신이 없었다.
시현은 심산에서 감람을 접해 보고 일정한 선 안에서는 믿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감람은 다시 만난 이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스스로 말한 대로 감정이 풍부해졌고 성격이라 할 만한 것도 생겨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다천관에서 만난 감람과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강하고 지는 것을 싫어했다.
성격이야 아무러해도 좋았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인간과 상호작용할수록 인간에 가까워진다면 그 종착지는 하나다. 감람이 자아를 잊었던 사이 사그라졌던 생존 욕구 역시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 감람의 행동이 어떻게 변할지, 모들과 금강 측에 합류하지는 않을지, 시현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 * *
시현이 고갯길을 내려가자 저 멀리서부터 호란이 알아보고 달려 올라왔다.
“시문 니…!”
큰 소리로 그를 부르려던 호란의 목소리가 중간에 졸아들었다. 발걸음도 멈췄다. 시현이 다가가자 호란이 잔뜩 주뼛거리며 물었다.
“저, 아직도 화나셨어요?”
시현은 웃고 말았다. 심란한 마음을 모두 안으로 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무슨 표가 난 모양이었다.
“아니다. 너희 일은 알아서 하라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 쪽에는 별일 없었느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이후로는 더 안 싸웠어요. 진짜로요.”
호란이 손까지 저으면서 열성적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고개 아래에서는 수약재에서 있었던 충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럴 것이 영역을 펼치고 지척까지 다가온 감람을 시현도 채원도 감지하지 못했다. 고개 아래 있었던 사예나 호란이 알 턱이 없었다.
“채인 님은요? 아직도 수약재에 계셔요?”
“그이는 주위를 정리하고 수약재 관리할 이들을 부른 뒤 제 호위들과 고개 반대편 길로 떠날 것이다. 이곳에서의 용무는 모두 마쳤으니 북쪽에 있는 지은학당 연구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위치를 받아왔다.”
“아, 거기까지는 같이 안 가고요?”
호란은 실망한 얼굴을 하더니 소곤거렸다.
“저기, 채인 님이 사예 님이랑 동행하기 싫으셔서 그런 거죠? 저 지금 가서 인사만 드리고 와도 되나요?”
“번다해 보였으니 그만두거라. 어차피 후에 다시 볼 것인데.”
시현은 이유를 얼버무리며 말렸다. 지금 채원은 사예는 물론 다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터였다.
상황이 끝나고 나자 채원은 감정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것을 거북해했다. 그러면서도 기분을 완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사죄를 거듭하며 다음을 기약한 뒤 시현을 배웅했다.
고개 아래 공터에는 빨랫줄이 쳐지고 옷가지가 널린 것이 보였다. 단이 그새 바지런을 못 참고 비 오는 동안 손 못 댄 빨래를 해치운 모양이었다.
길과 사예는 조리대 앞에 있고, 단은 허리에 손을 얹고 둘에게 뭔가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마을이 지척’ ‘춥지도 않느냐’ 같은 말이 들리는 걸 보면 사예가 이 자리에서 본격적인 술판을 벌이려는 걸 단이 저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이 시현 쪽을 가리켰다.
“봐요. 나리님도 오셨잖아요. 일단 가서 거처부터 잡고 뭐를 굽든지 끓이든지 합시다. 예?”
“하지만 마을 가면 채인이랑 같이 묵을 거 아냐. 걔가 무슨 과목으로 극상인지 알아? 술자리 산통 깨는 걸로 극상이야!”
“하씨 채인은 함께 묵지 않을 것이다. 다른 길로 올라가서 북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가까이 간 시현이 말하자 사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거 혹시 나 때문이야? 화난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심하네.”
“꼭 그대 때문은 아니다. 마음 쓰지 말라.”
“어. 안 써.”
호란이 사예에게 물었다.
“두 분이 왜 그렇게 사이 나쁜 거예요?”
“걔가 일방적으로 날 싫어하는 거야. 내가 류해선 자손이라고. 정확히는, 내가 류해선 자손인데도 지가 하는 무슨 사상운동인지 구세운동인지에 동조 안 한다고.”
사예가 귀찮은 얼굴로 말했다. 시현이 물었다.
“하씨 채인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대는 이미 귀수관에 없지 않았는가?”
“겉에서 보는 거랑 달라. 걔들이 드러내서 활동한 건 내가 추방당한 다음이지만 그전에도 물밑에서 꽤 오래 활동했어. 걔가 지은서원에서 촉망받는 범생이 노릇만 하다가 갑자기 지 스승이랑 싸우고 뭐에 홱 돈 게 십 년쯤 됐으니까. 아마 그때부터 내내 했지 싶다.”
“십 년인가.”
시현이 중얼거렸다. 채원이 돌 인간에 사무쳐 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말리던 빨래를 걷으려고 몇 발짝 갔던 단이 시현을 잠깐 쳐다보더니 되돌아왔다.
“왜요. 그 하씨 채인이란 나리와 이야기가 잘 안 풀렸습니까?”
“아니다. 일이 복잡하기는 하나 진전이 있다. 말이 길어질 테니 거처부터 잡은 뒤에 이야기하자꾸나.”
“근데 왜 나리님은 ‘내가 고뇌가 많으나 일단은 의연한 척을 할 테니 알아서 신경 좀 써줬으면’ 하는 표정을 하고 계세요?”
뒤에서 사예와 길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시현은 얼굴을 덮었다.
“그런 적 없다….”
“아 됐고요. 나리님 풀 죽은 거 알아보기 생각보다 쉽거든요. 그래서 뭔데요? 그 채인 나리하고 찢어진 거랑 상관있어요?”
“진짜예요, 시문 님? 저랑 최길이랑 싸운 거 말고 또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호란이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단과 호란의 얼굴을 본 시현은 다시 한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단과 호란이 시현의 가라앉은 기분을 알아보듯이, 시현도 두 사람이 누구에게 마음을 쓸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았다. 처음에는 짜증 내는 줄만 알았던 단의 미간 주름이 무언가에 집중할 때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알았다.
시현은 기뻤다. 이유도 없이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호란과 단에 대한 제 애착과 신뢰가 얼마나 커져 있는지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판단이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시현이 호란과 단을 생각해서 한 모든 일은 그가 추구하는 공의에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시현이 감람을 신뢰하고 싶어 한 것은 호란과 단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다. 위교연과 운모의 손에서 두 사람을 구해낸 것이 감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현이 그것만으로도 감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내심으로는 다른 보상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경계심을 내려놓았다가 감람에게 손도 못 쓰고 허점을 찔렸다. 명백하게 사적인 감정에 의한 오판이었다.
그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최소한, 돌 인간과의 최종 결전을 앞둔 시점에 한 사람뿐인 문이 그래서는 안 되었다.
시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짐짓 웃어 보였다.
“추워지고 있지 않으냐. 장소부터 옮기고 이야기하자. 그때까지 나는 의연한 척을 할 테니 단 네가 신경을 써 주면 되지 않느냐.”
“아 나….”
단이 입을 떡 벌렸다. 길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