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28
328화
* * *
율은 채원이 시현에게만은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단은 이야기를 꼼꼼히 듣고 질문을 몇 개 한 후 믿어봄 직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단은 지은학당 숙영지에 수레를 놔두고 튀기로 결정했다.
“지금 수레 얘기가 왜 나와, 단! 시문 님만 놔두고 간다는 게 무슨 소리야?”
“시문은 수레 지켜야 돼.”
호란의 항의에도 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력석이나 돈은 둘째치고, 물, 식량, 연료, 방풍 방한구. 이거 없이는 절대 황야로 못 나가. 그래서 지은학당 몫꾼들이 우리 수레를 숙영지 가운데 놔두고 우리보다 더 열심히 감시하는 거야.
율이 누나… 아 씨, 속필이 물이랑 외바퀴수레를 따로 준비해줄 거니까 유를 조사단까지 데려가는 건 문제가 없는데, 그렇다고 우리 수레를 버릴 수는 없잖아. 한 사람은 남아야 하고 그러면 시문이 남는 게 제일 안전해.”
잠자리를 정리하며 계획을 듣고 있던 시현이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속필을 그렇게 싫어하더니 언제 또 반나절 사이에 율이 누나가 됐느냐. 정말 땅인이냐 아니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
“아 시간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얘기 오래 못 해. 침구는 내가 정리할 테니까 놔두고 조사단에 보낼 명령서나 써!”
단이 소리를 죽여 다그쳤다.
그는 율과 함께 계획을 완성한 뒤 시현과 호란을 깨우러 온 참이었다. 지금 막사를 감시하고 있는 반하는 방랑족 태생이라도 소리 듣기를 못 한다고 은실이 알려주었지만, 오래 속닥거려서 좋을 것은 없었다.
시현은 단이 가져온 세필로 빠르게 글줄을 써 내려갔다.
가장 먼저 쓴 것은 조사단의 다천관 단장 앞으로 가는 명령서로, 글을 받는 즉시 유를 호위와 함께 다천관으로 돌려보내 방씨 온의의 보호하에 맡길 것을 명하는 내용이었다.
이외에도 하유관 단장, 귀수관 대관성에 전하는 명령서를 한 장씩 쓴 시현은 인장을 찍고 서한을 봉한 뒤 명령패와 함께 단에게 내밀었다.
“조심하거라. 호란에다 은실까지 있으니 걱정은 크지 않다마는.”
“네가 조심해야지.”
단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맘 같아선 나나 호란이 둘 중 하나라도 남고 싶은데, 그게 더 채인을 자극할 거 같아서.”
“그래. 나도 채인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너희가 떠나 있는 쪽이 마음 편할 것이다.”
“최대한 몸 사려. 쓸데없이 정론 늘어놓지 말고, 그 인간 산꼭대기 같으신 자존심 긁지 말고. 특히 우리가 귀수관 관군 끌고 올 거란 오해는 절대 받으면 안 돼.”
“단. 오래 말할 시간이 없다 하지 않았느냐. 의복은 내가 정제할 테니 가보거라.”
“어. 갔다 올게. 아무리 늦어도 사흘 안에는 돌아올 거야.”
단은 막사를 나가면서 근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휴. 혹시 뭐가 잘못돼도 밥을 안 주진 않겠지….”
이제까지 단에게 받아 본 염려의 말 중 가장 진심이 어려 있어서 시현은 마음이 복잡했다. 슬그머니 없던 걱정이 솟구칠 정도였다.
* * *
그렇게 도주가 진행됐다.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가장 놔두고 가면 안 되는 것 1위와 2위가 각각 숙영지 한가운데와 채원의 막사에 있었기에 아무도 일행이 숙영지를 떠나리란 생각을 안 했다.
더구나 율은 숙영지 전체를 관리하고 있었고 은실은 지은학당 몫꾼들의 암묵적 머리 역할이었다. 그 둘이 손발을 맞춰 줬으니 맘만 먹으면 유가 아니라 채원 본인도 빼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채원을 빼돌리는 게 더 쉬웠을 수도 있다. 실행 직전 유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 큰 소리를 안 내게 하는 것, 그리고 유가 도주용의 작은 수레까지 가는 동안 넘어지고 부딪히지 않게 하는 게 가장 난관이었다.
유는 한참을 간 뒤에야 시현이 따라오지 않을 것이고 자기는 곧바로 다천관으로 보내질 거란 걸 알았다. 유가 그야말로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단과 율은 수레 안에서 생고생을 했다.
“시문 나으리 만나야 한단 말이에요! 만나야 되는데!”
결국 호란과 은실이 수레를 세우고 안을 들여다보러 왔다. 유가 뚝뚝 울고 있는 걸 보고 호란은 환멸에 찬 얼굴을 했다.
“단, 또 유를 울렸어? 몇 번째야?”
“제가 나쁜 게 아니라고요….”
“그럼 누가 나쁜데요! 내가 단 씨한테 몇 번을 말했어요? 시문 나으리한테 꼭 할 말 있다고!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도 아니면서 왜 일부러 무시하는데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유 씨가 몰라서 그렇지, 지금 유 씨 목숨이 위험한 상황….”
“니가 내 목숨 걱정해 줄 필요 없다고! 죽어도 내가 죽을 거라고!”
유가 악을 썼다.
“맨날 그래! 맨날 자기 생각만 다 맞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하고!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계속 말을 하면, 조금이라도….”
“나한테 얘기하면 되잖아요. 내가 나리님한테 전해줄게요. 한마디도 안 빼고 그대로 전할 테니까.”
“단 씨가 이해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건 타격이 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단을 놓아두고 호란이 수레 안으로 몸을 집어넣어 유의 손을 잡았다.
“유 이리 나와 봐. 저쪽에 가서 나한테 이야기해. 나는 어려운 얘기는 이해 못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수레채를 안 놓고 있던 은실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기, 채 도련님이 쫓아올지도 모르는데.”
“잠깐은 괜찮을 거야. 그리고….”
호란이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들어봐서, 꼭 유랑 시문 님이랑 직접 이야기해야 하는 문제면 나는 유 데리고 숙영지로 돌아갈게. 은실은 율이랑 같이 이대로 도망가. 유랑 같이 도망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안전할 거야.”
“호란 나리! 그럼 유는….”
“단. 잘못한 사람은 가만히 있어. 이따가 유한테 사과해. 안 받아줄 거 같지만.”
호란은 단호하게 말한 뒤 유를 데리고 산길 밖으로 나갔다.
단은 멍하니 굳어 있느라 율이 불쌍하다는 듯 머리를 슬슬 쓰다듬는데도 뿌리칠 생각을 못 했다.
호란의 손을 잡고 울퉁불퉁한 비탈을 내려가면서 유는 계속 훌쩍거렸다.
“저는 북방 올 때 처음부터 죽을 각오 하고 왔어요. 위험한 거 다 알고 왔다고요. 누가 모를까 봐….”
“단이 그런 걸 이해를 잘 못 해. 단은 자기부터가 각오나 결심 같은 걸 하기 싫어하니까. 음….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건가?”
“네? 각오를 안 하고 어떻게 시문 나으리를 따라다녀요?”
“그치 말도 안 되지. 근데 단은 그러더라고.”
웬만큼 수레에서 떨어졌다 싶어진 호란은 편편한 곳에서 발을 멈추고 유를 바라보았다.
“있지, 단이 저러는 걸 유가 이해해줄 필요는 없는데. 나도 무슨 일이 있어서 알게 된 건데…. 유가 안 죽고 살아 있는 게 단한테는 굉장히 중요해. 유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단은 자기 목숨도 몇 번이든 내어 줄 거야.”
“단 씨는 저 싫어하잖아요. 그냥 짜증만 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꼴 보기 싫어하잖아요. 저 그 눈빛 알아요.”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 단은 유를 정말 많이 걱정해. 자기 행동을 못 돌아볼 정도로.”
“재수 없어…. 맨날 지만 잘났지. 나이도 한참 어린 게.”
유는 작게 중얼거리고 호란의 손을 놓았다.
“저기 호란 나리. 나리들이 다천관 떠나기 전에요, 시문 나으리께서 홍은산 유적이 뭐 하는 용도일지 추측을 해보셨는데, 혹시 호란 나으리도 아세요?”
“잘은 기억 안 나지만 그거 헌의 나으리가 조사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어떻게 됐어, 알아냈어?”
“아니요. 아직 용도를 몰라요…. 홍은산 유적만이 아니라 서평원 유적도요. 세상에 무슨 작용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말하면서 유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호란이 물었다.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놔두면 위험한 거야?”
“유적 자체는 위험하지 않아요. 하지만 시문 나으리가 그때 헌의 나으리한테 그러셨대요. 온 세상의 법력을 다 모아서 북쪽으로 보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세상 곳곳에 그걸 위한 설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어쩌면 그 유적이 변고를 일으킨 걸 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직 모르는 것도 많지만, 유적이 변고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건 확실하게 밝혀졌어요.”
“그럼 왜….”
호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조사가 뜻대로 안 된 건 아쉽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유가 어째서 이렇게 심각한지 알 수 없었다.
유가 말했다.
“호란 나리, 변고가 일어나고서 시간이 엄청 많이 지났어요. 그런데 우리는 돌 인간이 어떻게 세상의 법력을 불러 모으고 있는지 아직도 몰라요. 그놈들한테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뭐가 있겠지. 돌 인간은 굉장히 오래 살았고 아는 것도 엄청 많잖아.”
“근데 만약에 별 대단한 방법이 없다면요? 제가 파악한 기술 수준 안에서 마력회로나 기파를 이용하는 게 다라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안 되죠. 세상 끝에서 끝으로 법력을 끌어당기는 것도, 그 법력을 한곳에 모아두는 것도 완전히 섭리에서 벗어난 일이에요. 그런 일을 하는 데는 엄청나게 많은 법력이 소모돼요. 그 상태로 시간이 계속 흘렀고요. 제가 계산을 해 봤는데… 진짜 여러 번 해 봤는데.”
유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호란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그가 소곤소곤 말했다
“어쩌면 돌 인간들은요, 자기들이 가져간 기운을 이미 다 써버렸을 수도 있어요. 북쪽 끝에 가도 거기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어요.”
“설마!”
호란은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유가 속삭였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서 계산한 거고, 상황이 그 정도는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걱정이 돼서요…. 많이 돼서요.”
“응….”
“이해하시죠? 이런 얘기는 아무한테도 못 해요. 이런 얘기 시문 나으리밖에 감당 못 해요.”
호란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유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어째서 시문 님은 이런 걸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까?
분명한 건 호란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시문 님이 감당을 못 할지도 모르니까. 혹시 하실 수 있더라도 시문 님 혼자서 할 수는 없으니까.
호란은 유의 팔을 쓸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어떡해요? 만약에 돌 인간을 이겼는데도 법력을 되찾을 수 없으면….”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은 똑같아. 우린 북쪽으로 갈 거야.”
호란이 또렷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마. 우리 이미 돌 인간이 기운을 어디로 모으는지 장소 알아냈거든. 나하고 단하고 시문 님하고 거기로 가서, 뭐가 어떻게 돼 있는지 확인하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낼게.”
“최선이요….”
“응. 세상에 마력을 되돌릴 수 있으면 제일 좋지만, 만약에 그게 안 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여러 가지 있을 거야. 돌 인간들이 이 이상 마력 끌어모으는 것도 막을 수 있고.”
“그건 그래요. 제일 중요한 건 법력이 빠져나가는 걸 멈추는 거예요. 특히 남방은 상황이 정말 안 좋아요. 마지막으로 비가 온 게 석 달 전이래요.”
“그 얘기는 시문 님한테 안 할게. 아마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아 맞다. 아 맞다…. 시문 나으리 남방에서 오셨죠. 들으면 속상하실 게 당연한데, 아우 나는 맨날….”
유가 제 얼굴을 감쌌다. 호란도 남방 사람이란 데까지는 생각이 안 미친 모양이었다.
유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역시 제가 다시 시문 나으리 뵈러 가도 도움 되는 거보다 폐 끼치는 게 더 많을 거 같아요. 그럼 호란 나리한테 부탁드릴게요. 얘기 잘 좀 전해주세요.”
“그럴게.”
“제가 나으리 뵙게 되면 드리려고 보고서 진짜 많이 썼거든요. 조사단 본대에 있으니까 가져다가 나으리 드리세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많이 도움 될 거야.”
호란은 유의 손을 잡고 다시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유가 말했다.
“그리고 이 얘기 단 씨한테는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
“왜, 재수 없어서?”
“아뇨. 단 씨 너무 소심해서, 다 글렀으니까 포기하자고 할지도 모르잖아요.”
호란은 웃음을 참느라 디뎠던 돌부리를 허물 뻔했다. 유가 말했다.
“제가 좋은 이야길 전하러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와야 했어요. 상황이 나쁘다면 더 할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 멍청하고 폐만 되지만, 그래도 도울 게 있으면 도와야 한다고요.”
“아아, 같이 감당하러 와준 거구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