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36
336화
* * *
성지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야 모자라겠지요. 어찌 사람이 원천과 싸워 이기겠습니까.”
“원천과 싸운 것이 아니었다. 흘러나온 힘의 일부, 그것도 극소량일 뿐이었는데. 내 인지가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닿았더라면….”
“아….”
성지는 무엇을 깨달은 것처럼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그가 시현의 손을 끌어 저를 보게 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이 며칠 극한 상황에서 부대끼는 사이 그런 구분은 저절로 없어졌다.
성지는 진지한 얼굴로 시현의 눈을 보았다.
“예. 이해하겠습니다.”
“이해한다고….”
“예. 청심원과 안정제를 드리겠습니다. 드시고 주무십시오.”
“그런 쪽의 이해가….”
시현은 뭐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성지의 눈은 따뜻했다. 무이한 극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식 또래 아이를 보는 부모의 얼굴이었다.
“이게 이해한 겁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니까요.”
성지는 시현의 손을 끌며 안치소를 나섰다. 시현은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성지는 시현을 제 막사로 데려가 꼼꼼히 진맥하고 약탕이 끓는 사이 기혈을 가다듬어주었다. 약 먹는 것을 지켜보고 시현을 그의 막사까지 바래다주기까지 했다.
돌아서기 전에 성지가 말했다.
“문이시여. 사람이면 누구나 한계가 있고, 언제나 힘이 모자라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돕고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만약 혼자서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은 굉장히 외롭겠지요.”
시현은 성지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그에게도 언제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누가 손을 내밀고 어려움을 함께해 주는 것이 기뻤다. 지금도 성지의 배려가 마음속을 따뜻이 덥혔다. 서로가 약하고 모자라기에 비로소 나눌 수 있는 온기이고 행복이었다.
하지만 시현이 강했다면,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강했다면 오늘 채원은 그를 도와 함께 싸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을 것이다.
시현은 그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저 혼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되더라도 그쪽이 더 나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랬다.
42. 백색
지은학당 사람들은 다음 날 오전 느지막이 남쪽으로 떠났다. 하지만 단과 호란, 시현 세 사람은 바로 출발하지 않고 숙영지에 계속 머물렀다.
지은학당 사람들이 남겨놓고 간 마력석과 물자를 정리해서 짐도 다시 꾸려야 했고, 시현은 거듭된 사투로, 호란은 시현을 따라잡으려고 죽어라 달린 탓에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다.
덕택에 유가 떠맡긴 보고서인지 해설서인지의 뭉텅이와 씨름하는 건 일차적으로 단의 몫이 되었다.
사람이 줄어 식량이 남아도는데 북방 끝의 끝자락에는 팔 곳도 없고 줄 사람도 없었다. 단은 내일 아침까지 세 끼 식사 준비를 한 번에 해치울 요량으로 말린 야채를 잔뜩 볶고 국물보다 고기 건더기가 많아 보이는 감잣국을 한 솥 가득 끓였다.
점심을 먹던 도중에 시현이 말했다.
“백벽까지 남은 여정은 좀 더 수월하면 좋겠구나. 너희가 없는 사이에 감람이 북방 끝터의 거석이란 거석은 모조리 모아다가 우리를 공격했으니, 이제 남은 것들이 없을 만도 한데.”
“금강과 모들이 남았잖아요. 걔들도 감람이 죽은 걸 알 텐데, 우릴 공격해오지 않을까요?”
호란의 물음에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추측이다만 심산의 감람이나 모새처럼 대지와 강하게 연결된 돌 인간이 아니면 우리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할 거다. 다른 돌 인간에겐 이처럼 집요하게 추적당한 일도 없고, 금강은 우리와 우연히 마주치고 당황한 일이 여러 번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어제 바로 왔다면 모를까, 이제는 길이 엇갈릴까 두려워 본거지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백벽에 도착할 때까지 그곳을 지키고 있겠지.”
“백벽에 도착할 때까지요….”
호란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눈에 보이는 것은 말로 전해 듣던 희고 높은 대산맥이 아니었다.
북방 끝터에는 사람 사는 지역이 극히 적지만, 자원 탐사와 지도 만들기를 위해 돌아다닌 길사들 덕에 지형만큼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특히 백벽은 온갖 전설과 설화에 등장할 만큼 유명했다. 너무 높아서 구름 없는 봄 가뭄 때는 일주일 거리서부터 보인다, 장내산이라는 큰 산을 넘으면 바로 보인다는 얘기를 남방 사람들까지 다 알았다.
당연히 일행도 산을 넘고 바로 백벽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결과적으로 산을 넘는 게 아니라 산을 없애게 됐지만 어쨌든 백벽이 보여야 했다.
하지만 싸움이 모두 끝난 뒤 호란이 무심코 북쪽을 보았을 때 펼쳐진 광경은 생각과 전혀 달랐다.
먼 하늘이 새하얬다.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것은 대지의 벽이 아니라 구름의 벽이었다.
비가 적은 세상이니 구름도 적다. 먹구름이 아니라 흰 구름이 하늘 한쪽을 다 덮은 모습은 호란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호란의 시선이 북쪽에 고정된 것을 보고 시현이 말했다.
“왜 그러느냐? 저 구름은 꺼림칙한 것이 아니다. 물이 저리 모여든 것은 저곳에 엄청난 기운이 모여있다는 증거다. 유가 걱정한 것처럼 돌 인간들이 모은 기운을 전부 써버리지는 않았다는 뜻이지.”
“으아, 진짜 걱정했어요….”
호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호란이 시현에게 유의 염려를 전한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이미 채원의 죽음으로 상심한 시현에게 더 안 좋은 소식을 전하기가 어려워 밤새 애를 태운 뒤였다.
시현이 가볍게 웃었다.
“무얼 그리 걱정했느냐. 만약 기운이 사라졌다면 내가 채인의 주문으로 탐색을 할 때 이미 알았을 것이다. 그때 이미 내 인지를 넘는 거대한 힘의 존재를 느꼈다.”
“흐아. 유는 진짜 똑똑하지만, 이번만은 유가 틀려서 다행이에요. 진짜로.”
“아니야. 유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다. 유의 계산이 맞고, 그런데도 저 곳에 저리 많은 기운이 남아 있다면 세상의 기운을 모두 끌어모아 붙잡는 데 아주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그 방법을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끌려간 기운을 온전히 세상에 되돌릴 수 있을 거다.”
시현은 잠깐 북쪽의 구름 벽에 시선을 주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천천히 말했다.
“그래…. 이제는 돌 인간과의 싸움이 끝난 뒤의 일도 생각해야 해. 금강과 모들과의 싸움도 쉽지 않겠지만, 그럴수록 더 뒤를 생각하고 임해야 한다.”
호란은 딱히 생각나는 뒷일은 없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말이 없는 것은 단뿐이었다. 피곤한 얼굴로 숟가락질만 하고 있는 그에게 시현이 말을 걸었다.
“단, 어떠냐. 내내 바빴던 건 알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난 만큼 생각이 정리되었을 텐데.”
“글쎄….”
단이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눈을 위로 했다.
“유의 보고서를 오는 동안 수레 안에서도 어젯밤에도 내내 봤는데, 일단 도움 될 내용은 많아. 돌 인간이 북쪽 끝에다가 무슨 그지 같은 장치를 만들어놨더라도 대처하는 데 참고가 될 거고. 특히 마력을 특정 위상에 고정하는 거에 대한 얘기가 많아. 그런데 그게 마력을 세상에 되돌리는 데 도움이 될지는 내가 잘 모르겠다.”
“아니, 그것을 물은 게 아니야.”
시현은 수저를 내려놓고 단을 향해 고쳐 앉았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두 감람이 말한 것, 땅인과 반민의 신분 차가 사실은 무의미하다는 것에 대해 네 생각이 어떤지를 묻는 거다.”
“그래, 그거! 내내 정신없어서 얘기 못 했는데, 계속 듣고 싶었어!”
호란도 눈을 크게 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단은 시큰둥했다.
“그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생각이고 뭐고 그냥 묻어야지 뭐가 또 있어. 채인이 유언까지 했다며. 핑계 생겼을 때 그냥 묻기로 결정해. 그게 니들 속에 제일 편해.”
“어, 하지만….”
호란이 말을 더듬었다.
호란은 그동안 단이 채원을 경계해서 속 생각을 숨긴다고 생각했다. 셋만 남은 지금은 솔직한 말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단의 태도는 지은학당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현과 호란의 표정을 보고 단은 미간을 잔뜩 좁혔다.
“아니, 나한테 무슨 말을 기대했어? 설마 동네마다 사람들 모아놓고 진실 발표라도 하자고? 그걸로 뭐, 세상을 바꾸기라도 하려고?”
세상을 바꾼다는 말에 시현은 거의 반사적으로 등을 세웠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당연히 바꾸어야 하지 않겠느냐.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는데.”
“어, 넌 못 해.”
짧은 대답은 지나치게 서슴이 없었다. 잠깐이었지만 시현은 상처받은 얼굴을 드러내고 말았다.
“단, 너무….”
호란은 단을 말리려고 했지만 단은 호란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시현의 눈을 쏘아보듯 마주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가자. 나중에 남운관 돌아가서 딴소리 안 나오게. 넌 그 문제를 세상에 공개하겠다는 거야?”
“사람들도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다.”
“아니… 시작이고 뭐고, 넌 끝까지 하씨 채인을 설득 못 했잖아. 그 인간은 땅인치고는 또라이 소리 들을 정도로 생각 폭이 넓은 사람이었는데도. 근데 다른 땅인들은 설득할 수 있을 거 같아?”
시현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대답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사람들의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도 법을 고치고, 시행령을 선포해서 단계적으로….”
“그러니까 네가 그걸 하게 사람들이 놔두겠냐고. 온 세상 땅인이랑 거기 빌붙은 놈들이 모조리 네 적이 될 텐데, 너랑 같이 싸워줄 아군으로 생각나는 사람 있어? 한 명이라도?”
시현은 그런 사람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가장 먼저 반대할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그래도 내게는 남보다 강력한 힘이 있다. 다소 강압하더라도….”
“좋아. 힘 있지. 그럼 그 힘으로 너한테 반대하는 놈들을 다 죽여버릴 수 있어? 네가?”
시현은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못 했다. 단이 말을 맺었다.
“못 하지? 그러면 네가 먼저 죽어. 그담에 나랑 호란이가 죽는 건 덤조차 안 되고. 그게 끝이야. 넌 못 해.”
이번의 ‘넌 못 해’는 아까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하지만 시현에게는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다.
시현의 가라앉은 표정을 보고 단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야, 이거는 니네가 정말 너무하는 거야. 채인 선에서 적당히 설득당해주면 안 되냐? 내가 앞으로도 계속 사람 취급 못 받고 살아야 되는 이유를 꼭 내 입으로 설명하게 만들어야겠어? 내가 뭘 원하는지는 대체 왜 물어봐? 말한다고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시현도 호란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분위기 그만 칙칙하게 만들고 이 얘기 정말로 여기서 끝내자. 묻어. 묻는데, 채인의 유언 때문에 묻기로 한 걸로 쳐. 내가 이거 묻자고 너네를 설득하는 쪽이 되는 건 좀 비참하잖아. 그리고 밥이나 얼른 마저 먹어라. 상 치운 담에도 나 할 일 많아.”
단은 다시 국을 떴다. 시현도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밥을 먹고 있는 둘을 호란은 한동안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단이 고개를 들었다.
호란이 물었다.
“단, 단은 우리가 노력해서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