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337
337화
* * *
“단은, 우리가 노력해서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단의 대답은 이번에도 무뚝뚝했다.
“어. 전혀 안 하는데.”
“왜?”
“인간들이 안 나아질 테니까. 끼리끼리 편 먹고 남 밟아 뭉개는 건 사람 본성이야.”
“하지만 사람들이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잖아. 좋은 사람도 있잖아.”
“있지. 있는데 내 생각엔 그 좋은 사람들이 쪽수가 좀 부족한 거 같다. 이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까.”
“…….”
호란은 더 할 말을 못 찾고 눈을 떨어뜨렸다.
단은 호란의 풀죽은 모습을 보더니 어째선지 자기가 더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가 다시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아 씨, 그래. 까놓고 말하자. 사실 넌 그런 말 할 자격 있어. 넌 나한테 세상이 더 나아진다고 헛소리 얼마든지 계속해도 돼! 왜냐하면 니가 바로 그 더 나은 사람이니까. 네가 나한테 사람 취급받고 사는 게 뭔지 기억나게 해줬으니까!”
나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단은 꼭 무얼 따지려는 사람 같았다. 그가 앞머리를 쥐어뜯으며 호란에게 하소연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문제 갖고 널 말로 이겨 먹으려니까 내가 완전 개쓰레기 되는 기분이거든? 진짜로 이 얘기 그만하면 안 되냐?”
“그럼 져주면 되잖아….”
“어떻게 져줘, 져주면 다 같이 뒤지게 생겼는데!”
결국 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야, 내가 뒤질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면, 그건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뒤진다는 소리라고! 한번 니네랑 얽힌 이상 난 선택권도 없다고!”
“알아….”
“알긴 뭘 알아, 차라리 모른다고 해!”
단은 틈도 안 두고 이번에는 시현에게 삿대질을 했다.
“너도 그래! 나라고 좋아서 널 갈구는 줄 알아? 니가 내내 나한테 잘한 거 나도 안다고! 나도 너한테 해줄 거 있으면 다 해주고 싶다고! 근데 이거는, 나는…. 아오.”
느닷없이 불똥을 맞은 시현이 눈을 깜박였다. 단은 제 언성이 올라간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마를 싸쥐고 단숨에 말했다.
“야 이 생각도 상상력도 양심도 없는 자식들아, 내가 이제 와서 또 대광장에 효수당할 걱정을 하면서 살아야 돼? 나한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니들한테 인정이 있어?”
호란이 끅 딸꾹질을 했다. 시현도 얼굴이 파래졌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둥지둥 말했다.
“아니야! 난 그냥 생각만, 말만 해본 거야! 그만할게! 더 말 안 할게!”
“그래. 얘기 이미 끝내지 않았느냐! 그렇지, 채인, 채인하고 이야기해서 정한 거다. 난 더는 말 안 하려고 했다!”
단은 의심과 회의가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시현이 지레 움찔하더니 작게 말했다.
“그런데….”
“그으런데?”
“아니다! 또다시 이 화제를 안 꺼내려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밀로 묻을 것이다. 묻을 것이다만 혹시 그….”
시현이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상대를 잘 골라서 딱 한 사람 정도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혼자만 알고 있기는 나도 마음이 무거워서. 절대로 퍼뜨리지는 않겠다.”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단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 속 의심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시현은 면목 없는 기분으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
눈앞의 일을 위해 진실을 덮는 사람들을 줄곧 비난했는데, 자기도 마지막에는 그 사람들과 같은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 씁쓸했다. 동시에 그런 씁쓸함마저 사치처럼 느껴졌다.
침묵 속에 수저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식사가 끝날 무렵 호란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물이 많아지면 좋겠어.”
단이 호란 쪽을 보았다.
“물?”
“거석도 돌 인간도 다 없어지고, 마력도 되돌아오면… 어쩌면 물도 옛날처럼 늘어날지도 모르잖아.”
“그거야 나쁠 거 없지. 벌써부터 기대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 거석이 없어지고 물도 많아지면… 세상이 더 살기 나아지면, 그러면 사람들도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
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반박도 하지 않았다. 용기를 얻었는지 호란이 더 또렷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까지 봤잖아. 남을 괴롭히고 내리깔려고 하는 건, 알고 보면 사실 제일 못나고 겁먹은 사람들이었어. 세상이 살기 좋아지고 덜 위험해지면 겁낼 필요도 없잖아. 그럼 그런 비뚤어진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잘하게 되지 않을까?”
호란은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듯 빨리 덧붙였다.
“나는 그러면 좋겠어. 그래서 더 돌 인간을 물리치고 싶어. 그게 다야.”
단도 시현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 침묵의 색은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시현은 어려운 마음으로 호란의 말을 되새겼다. 그는 이전 시기의 역사를 많이 알고 있었다. 물이 더 많던 때도, 심지어 강이 있던 때마저도 딱히 천국은 아니었다. 거석이 없던 시절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그래도 물이 더 많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시현 또한 오래도록 꿈꿔 온 일이었다.
몇백 년간 세상은 여러 가지가 변했다. 의법술도 다른 법술도 많이 발전했다. 팔관성의 권력자들은 협치와 공존의 이점을 배웠다.
이제 또다시 물이 많은 세상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전보다 무언가 나아질 수도 있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객관적인 판단보다는 바람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 *
일행은 다음 날 외바퀴수레 한 대와 더 가벼워진 행장으로 장내산 터 숙영지를 떠났다. 남는 물자와 금품, 날이 풀려 필요 없어진 방한구 따위는 돌아갈 때 찾아갈 요량으로 적당한 곳에 묻어두었다.
이후로도 거석이 계속 나왔다. 기결은 드러나 있지만 갑병처럼 다리가 여럿 달려 산지를 잘 다니는 놈들이었다.
상대하기 어려운 적은 아니었지만 조금씩은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틀 뒤 일행은 해가 진 후에야 산마루 아래 작은 샘가에 수레를 세웠다.
식사 후, 단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지 유등 아래 지도를 펴 놓고 고민에 빠졌다. 재차 별시계로 위치를 확인하는 단에게 호란이 물었다.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지도가 안 맞아. 낮부터도 안 맞았는데 이젠 아예 지형이 달라.”
“끝터 북쪽으로 갈수록 지도가 정확하지 않을 거라고 단이 그랬잖아? 사람도 별로 안 살고, 장내산 북쪽은 발길도 안 닿는다고.”
“그래도 대지도에 표시된 걸 보면 여기까진 길사들이 한번 눈대중이라도 하고 온 장소라고. 정확하진 않아도 큰 형태는 맞아야 되는데…. 원래 지도대로라면 여기는 이렇게 어중간한 고개가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산이 있어야 돼.”
단은 털썩 앉아 여분의 지도와 수첩에 바뀐 지형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호란이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럼 지진이나 산사태라도 났었나 보지.”
“그것도 정도껏이지, 산이 어떻게 없어질 수…가 있었지. 응.”
단이 시현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시현이 말했다.
“지도가 틀렸는지 지형이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당장 문제는 없지 않으냐. 어디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고, 갈 방향이야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데.”
“길 잡는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거든? 산안장을 찾아야 그나마 가기가 낫지.”
단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산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낮아진 것이라 불평은 짧았다.
그리고 다음 날 동이 트고 고개를 오른 뒤, 단은 어제의 불평이 완전히 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지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북방의 상징 같은 산지가 모조리 간 데가 없었다. 대신 대패로 밀어낸 듯 고르고 편평한 평야가 구름 벽과 맞닿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너른 땅 군데군데에 초록이 깔린 것을 보면 지형이 바뀐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십중팔구 변고와 동시에 일어난 변화였다.
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걸… 이렇게 된 걸 아무도 몰랐다고? 그동안 내내?”
“그럴 수 있다. 오는 길에 거석 무리가 수없이 있지 않았느냐. 변고 와중에 누가 그것들을 뚫고 여기까지 와보았겠느냐.”
“아니 그래도 그렇지…. 심지어….”
단이 드물게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벽까지 없어진 거 같은데.”
“뭐어?”
“구름에 가려진 것이 아니었느냐?”
호란과 시현이 눈을 휘둥그렇게 했다. 단이 망원경을 꺼내 길게 들여다본 후 말했다.
“구름에 가린 거면 산 밑동은 보여야지. 여기까지 왔으면….”
“그래도 아직 하루 이틀 거리는 남았잖아. 더 가면 보이겠지.”
호란은 뜻하지 않게 실망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라 깨닫지 못했는데,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그 백벽을 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시현이 말했다.
“가 보면 확실해지겠지. 하지만 돌 인간이 의미 없이 이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터. 이렇게 대대적으로 지형을 바꾸면서 저 끝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가 문제구나.”
“그리고 저 평원, 눈대중이지만 군데군데 완만하게 경사져 있어. 북쪽으로 갈수록 땅이 꾸준하게 낮아지는 거 같아.”
단이 찜찜한 듯 말했다. 가장 높은 땅이어야 할 곳이 가장 낮은 땅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현이 말했듯 가보는 것밖에 수가 없었다.
하루를 더 가고 이틀째가 되자 더 이상 부정할 여지가 없어졌다.
대산맥이 서 있었어야 할 위치는 단의 말대로 낮은 평원이 되어 있었다. 더는 거석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면에 깔린 흰 암석만이 백벽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는 구름의 성벽이 선 것처럼 보였던 상공도 막상 다다라 보니 구름이 많이 떴을 뿐 평범한 푸른 하늘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을 정말로 놀라게 한 것은 사라진 백벽이 아니었다.
수레를 끌던 호란이 우뚝 멈추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의아해진 시현은 수레 장막을 걷었다가 똑같이 굳어지고 말았다.
“시문 님, 지평선이 파래요…. 새파래요.”
호란이 멍하니 말했다.
단어가 틀렸지만 당연했다. 호란은 평생 단 한 번도 수평선이란 개념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수레 앞에 앉은 단의 손에서 나침반이 굴러떨어졌다. 그가 말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저거 전부 다 물 같은데….”
“설마….”
단과 호란이 얼떨떨한 채 말을 나누는 동안 시현은 계속 말문이 막혀 있었다.
대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절벽이 되어 끊겨 있었다. 그 너머 시야 닿는 곳 전부가 모조리 물이었다. 하늘빛을 반사한 수면이 진한 남색을 띠었다.
호란은 다시 수레채를 잡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절벽 가에 도착하자 단과 시현이 서둘러 수레를 내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물이었다. 절벽 아래서부터 끝없이 깊고 끝없이 넓은 물이 남은 세상 전부를 채우고 있었다.
“세상의 물이… 여기 다 있었구나. 온 세상의 물이….”
시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절벽 끝 아슬아슬한 데까지 나아갔는데도 호란은 붙잡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호란이 물었다.
“강인가? 이게 강이에요, 시문 님?”
“아니다. 내가 책이나 그림으로 본 강은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강이라 하면 대체로 강둑에서 반대편 땅이 보이는 것으로…. 이건….”
시현은 여전히 실감이 안 나는지 말을 더듬었다.
“이건 마치 환상서에 나오는 바다 같구나.”
“바다가 뭐예요?”
“환상서에 실린 상상의 공간이다. 용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하늘에 사는 신선이라든지…. 옛사람들이 상상한 여러 가지 전설을 기록한 책이 있다. 그 책에서는 대지보다도 넓고 산맥보다 깊은 물이 끝없이 펼쳐진 곳을 바다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상상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
“아니야.”
시현의 대답과 겹쳐져 들려온 목소리는 일행이 잘 아는 상대의 것이었다.
“재미없는 얘기 하나 들려줄까. 바다는 상상이 아니야. 정말로 있어. 최소한 예전에는 있었지. 지금도 어떤 형태로는 있다고 할 수 있고.”
일행은 뒤를 돌았다. 약간 떨어진 장소에 금강이 서 있었다. 몸에 걸친 흑색의 긴 옷에는 금색과 아청색으로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어떻게 소리 없이 나타났는지, 뒤에는 한 쌍의 견고한 대장석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 참고로 용은 진짜 없어. 그건 상상의 존재가 맞아.”
금강이 제 옷을 흘끗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