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5
005화
* * *
“그래서, 네놈이 이 자를 안단 말이냐?”
“알고 말굽쇼. 호란 님은 먼외측 이군 십칠 열 끝발이십니다. 직은 삼직이시고요.”
단이라 불린 기술자는 호란도 모르는 호란의 직과 소속을 술술 읊었다.
어째선지 추선은 놀란 얼굴을 했다.
“왼대열이라면서, 이군이라고? 게다가 삼직? 이런 꼬맹이가?”
“그러니까 대단하시지요! 나이는 어리지만 엄청난 몫꾼이십니다! 어제 싸움에서 거석을 몇 놈이나 해치우셨답니다. 글쎄, 먼외측 아웅 대장님이 보자마자 마음에 두셔서 직접 대열에 거두신걸요!”
추선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아웅이?”
“아, 응! 맞아! 아웅 대장이 날 성에 들여줬어!”
호란은 급히 말했다. 아무리 당황했다지만 왜 아웅 이름을 댈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이 덧붙였다.
“패 뒷면을 보십시오. 직이 적혀 있을 겁니다. 제가 직접 새겨드렸습니다.”
호란은 얼른 패를 뒤집어서 내밀었다. 단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호란 님, 그쪽은 앞면입니다요.”
군중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단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직 어리신 데다 도시에 막 오셔서 그렇습니다. 신용장 쓰는 법을 모르셔서 인감 장부에는 나중에 올리기로 하셨습니다만, 신용에는 한 끝도 흠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추선은 끝까지 트집을 잡으려 들었다.
“내가 네놈 말을 믿으란 말이냐? 네놈이 방랑족하고 입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어떻게 알아?”
“패가 있지 않습니까요.”
“네놈이 새긴 패지. 네놈은 신분패를 위조해서 팔아먹고도 남을 놈 아니냐!”
단이 실실 웃으며 굽실거렸다.
“어르신, 이놈도 목숨은 아깝습니다요. 그런 짓을 했으면 지금쯤 짐 싸서 도망을 갔지, 감히 어르신 앞에 이렇게 나섰겠습니까?”
“으음….”
추선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단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선을 구슬렸다.
“시문 나으리 말씀도 있으셨는데 너그럽게 조처해 주시지요. 그 높으신 나으리님께서 특별히 마음을 쓰셨는데, 결국 쫓겨나서야 큰나으리 면이 안 서지 않겠습니까?”
시문 이야기가 나오자 추선이 험하게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지라 대꾸할 말이 없는 듯했다.
추선이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이자가 낼 벌금에 네놈이 지불 보증을 서겠느냐?”
“아이코, 무서운 말씀을.”
단은 곤란한 듯이 스스로의 머리를 콩 때렸다.
“제가 저 혼자서도 빚더미에 앉은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 덕에 쉬는 날도 없이 일하고 있지요! 민적관에 야장소, 이 공방 저 공방 돌아다니면서….”
단이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추선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호란을 노려보았다.
“먼외측 십칠 열, 호란이라고 했지.”
“응!”
호란은 단이 말한 소속과 직이 맞는지도 모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추선이 냉랭하게 선언했다.
“추방을 면한 대신 시민세를 다시 내라. 하늘인이니 삼십 금이다. 당장 낼 수 있겠느냐?”
호란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추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돈이 없으면 월봉을 나눠서 차압할 것이다. 내일 네 대열 머리에게 추징관이 갈 것이니 미리 고해두어라.”
말을 마친 추선은 더는 호란을 보기도 싫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몰려선 구경꾼들에게 꺼지라고 고함치는 것은 덤이었다.
사람들은 제가끔 수군거리며 꾸물꾸물 흩어졌다.
시문을 칭찬하는 소리와 추선을 욕하는 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호란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빚이 생긴 것은 큰일이지만 쫓겨나는 걸 면한 것만도 다행이다.
호란의 생각엔 돈 따위야 몫을 하면 어떻게 될 일이었다.
단이 호란을 향해 싱긋 웃었다.
“욕 보셨습니다요. 괜찮으십니까?”
“어, 그, 괜찮아! 고마워.”
“오늘 나리께서 이놈의 신세를 지셨으니, 나중에 여차하면 제 사정을 한번 봐주셔야 합니다요.”
“물론이지! 단이라 했지? 내가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을게!”
호란은 인사를 하고서야 단을 찬찬히 보았다.
단은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반민 남자였다.
추선 앞에선 내내 굽신대는 자세였지만 허리를 펴니 키가 상당히 컸다.
색 옅은 백금발이 짧게 잘려 흐트러져 있고, 금속 테 안경 아래 눈동자는 붉은 기가 도는 호박색이었다.
색이 희고 선 곧은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긴 두루마기를 풀어헤쳐 걸치고 멜주머니를 두 개나 가졌다. 겉옷 안에 찬 띠에도 줄을 걸어 무슨 도구와 열쇠 따위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어딜 봐도 기술로 먹고사는 사람이란 모양새였다.
단이 물었다.
“나리는 어디 가시던 길이셨습니까?”
“아…. 군영! 소군영에 가야 하는데. 라왕이 안내해준다고 했었는데.”
다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라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단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라왕 어른도 깜짝 놀라셨겠지요. 땅님, 그것도 경인 나으리 행차를 막아서는 분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요. 저도 눈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큰일인 줄 몰랐어….”
“아웅 대장님 계신 곳은 소군영 외별청입니다. 제가 안내해드립지요.”
“고마워.”
단이 선선히 안내역을 자청하고 나섰다. 앞길을 걸으며 단이 말했다.
“그나저나 나리도 힘드시겠습니다. 큰 빚이 생기신 데다 추선 나리한테 단단히 밉보이기까지 하셨으니….”
추선 이야기가 나오자 호란이 억울해 하며 소리쳤다.
“그 추선이란 사람, 너무해! 기껏 시문 님이 맘 써주셨는데, 자기가 왜 그렇게 트집을 잡고 못되게 굴어?”
“아이고 나리, 어째선지 정말 모르십니까?”
단이 웃음을 참는 듯 묘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을러대시는데도 끝까지 존대도 안 하고 고개도 안 숙이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추선 어른 복장 터지는 걸 보나 했습니다.”
“응? 존대를 왜 해? 나도 몫꾼인데?”
호란이 당황하자 단이 슬슬 웃었다.
“추선 어르신은 높으신 나리님을 모시는 분 아닙니까요. 윗사람 대접을 받고 싶으셨겠지요.”
“으응?”
호란은 영문을 몰라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이 설명을 덧붙였다.
“추선 어른처럼 하늘인이 땅님을 곁에서 모시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요. 더구나 완씨 집안을 모시잖습니까.
남운관에서 완씨 집안은 왕가나 마찬가지니 추선 어른 위세도 대단하지요. 관은 물론 군에까지 입김이 닿는답니다. 땅님들까지도 추선 어른은 쉬이 보지 못하시니까요.”
“그렇구나.”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해가 다 간 것은 아니었다.
“근데 왜 내가 존대를 해야 해?”
단은 입을 닫고 잠시 호란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호란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하늘인 무리가 평등한 곳은 아니다.
힘과 몫의 크기에 따라 무리에서 대접이 완전히 달라진다.
몫이 적은 사람의 말은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하란이처럼 제 몫을 못 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몫이 더 큰 사람이라 해서 누구의 윗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디 몫꾼이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과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몫꾼이 윗사람으로 여기고 존대하는 사람은 세 부류뿐이다.
무리의 큰머리, 자기 몫을 다 하고 물러난 노인, 무리를 위해 싸우다 몸을 다치고 물러난 장애인이다.
그 외에는 부모에게도 존대하지 않는다.
더구나 하늘인은 투사다. 위아래를 일일이 가늠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매일 서로 싸우고 다치느라 성한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단이 소리 내어 웃었던 것은 일순에 불과했다.
그는 황급히 표정을 가지런히 하며 설명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리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고요. 여기 남운관시하고 나리 사시던 약바위골이 좀 다른가 보네요. 예서는 대체로 지위 높은 분들은 존대를 받으시거든요.”
호란은 머리를 긁었다.
“으…. 그럼 그 추선이란 사람은 내가 반말해서 기분이 상했다는 거야?”
“그렇습죠. 처음에 나리가 평대하셨을 때 추선 나리 얼굴 굳는 거 못 보셨어요? 사람들 웃는 거는요?”
듣고 보니 그랬다. 호란은 중얼거렸다.
“왜 그러는지 몰랐지….”
“넘어간 일이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윗분 기분을 좀 챙겨 드리는 게 좋아요. 또 압니까, 벌금 같은 거를 좀 선처해 주실지.”
“으응.”
단이 위로했지만 호란은 자꾸 풀이 죽는 마음을 어쩌기 어려웠다.
그는 그냥 단이 이끄는 대로 터덜터덜 걸음만 옮겼다.
남운관에 오고부터는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3. 5일 전
남운관의 완씨 집안은 시문이란 절세의 천재가 나타나기 전부터도 이름 높은 마법술 명문이었다.
가문의 시조는 아직 왕과 공후가 있던 시절 대장군 벼슬을 한 사람이었고, 대대로 격 높은 법술사를 수없이 배출하며 남운관을 수호해왔다.
남방이 유전과 소금 광산으로 번성하던 시절에는 중부는 물론 머나먼 북방까지 완씨가문의 부와 위세가 울려 퍼질 정도였다.
하지만 거석이 늘어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돌산이 많아 거석의 습격이 숱한 남방은 가장 먼저 쇠락하기 시작했다.
지역 간에 오가기도 어려워졌다.
상인은 물론 돈 있는 명문가까지 식솔을 거느리고 남방을 떴다.
중부의 명문가, 함씨 집안의 함경재가 남운관의 완선보와 혼인하여 남방에 온 것은 이와 같은 때였다.
함씨 집안은 중부에서도 제일 번성한 온강 윤지관의 세도가였다.
더구나 경재는 막 의과로 인 격에 달해 곳곳에서 관직이며 혼약을 제안받고 있었다.
도무지 파탄지경의 남방에 인생을 던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말하기를 그해 남운관 급제자 대표로 온강을 찾은 열일곱 살 선보를 보고 동갑내기 경재가 한눈에 반했노라 한다.
경재가 선보의 자질을 알아보아 혼인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때만 해도 선보는 예 격에 불과했으니 여러모로 급이 맞지 않는 혼사였다.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야 모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연애가 있었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온강에서 가능한 호사를 다 누리던 경재가 척박한 남운관에서의 삶을 내심 어찌 받아들였는지 바깥사람들은 모른다.
어쨌든 그는 전쟁터에서 숱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며 경인의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그사이 선보가 무려 무 격에 달하고, 후에는 남운관의 내치와 군무 전체를 총괄하는 총치총령에 올랐다.
더하여 혼인 십 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들은 백 년에 한 번도 나기 어렵다는 문 격에 이르렀다.
남운관의 모든 권세와 명예가 이 집안에 몰린 형국이니 결국 함경재 인이 이 결혼을 손해로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물녘, 총치총령 완선보 무는 완씨 저택 주대청에서 차를 들고 있었다.
며칠째 총령부 관사에 머물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안부가 오가고 난 뒤 선보는 반려와 아들로부터 전날 행차 중에 있었던 일을 들었다.
처음 그는 이것이 소소한 사담 거리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
“예, 아버지. 좋은 병사를 잃는 것이 아까워 그리하였습니다.”
“잘했다. 너는 모두의 위 되는 이니 사람 귀한 줄 알아야지.”
선보는 흐뭇하게 답하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대청의 큰 탁자 맞은편에 앉은 아들은 눈빛이 또렷하고 자세가 가지런했다.
문이니 천재니 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들이었다.
이미 더없는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견식 쌓기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고, 어린 나이에도 생각하는 바가 사방에 두루 미친다.
무엇보다 마음이 곧고 바르다.
아들이 이대로만 자라준다면 자신이 어깨에서 총치의 자리를 내려놓는 날이 생각보다 가까울 것 같았다.
미래로 후여후여 날아가려던 선보의 상상은 경재의 냉랭한 목소리에 툭 끊어졌다.
“선보, 그렇게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오. 시이가 저렇게 하늘족이나 반민의 벌을 감해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잖소.
범부가 인정 많은 것은 좋은 일이겠으나, 시이가 그저 대갓집 아이요? 남운관 전체가 기둥으로 떠받드는 문이오! 그러한 몸으로 매번 아랫것들을 싸고도니 위아래 법도가 어찌 바로 서겠소.”
어머니의 질타에 시현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