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88
088화
* * *
호란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가슴 한가운데에 돌 조각이 걸린 것 같았다.
시현이 호란의 곁에 다가와서 섰다. 그가 조용하게 말했다.
“암장과 석영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나다. 호란은 날 도왔을 뿐이다.”
“그러면 네가 시문이군….”
금강이 시현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
시현이 답했다.
금강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며 부상 입은 가슴을 눌렀다. 그가 허탈한 듯 말했다.
“그러니까, 너라면 이 정도 마법에 광산을 끌고 다닐 필요는 없다는 거군? 만약을 대비해서 여력을 남길 만큼 여유도 있고.”
녹렴이 말없이 공중에 손을 저었다.
곳곳에서 그가 세웠던 거석이 허물어져 내려앉기 시작했다.
“물러갈 셈인가?”
시현이 물었다.
“글쎄. 우선은 약속을 지키는 거야. 어쨌든 너희가 금강을 죽이지 않았으니까.”
녹렴이 시현과 호란, 그리고 떨어진 곳에 있는 단과 길을 한 번씩 보았다.
“계속 싸울지 말지는 너희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지.”
“그대에게 전의가 없다면 이쪽도 물러서겠다. 이 자리에선 가능한 만큼 사람들을 구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대의 신의에 사의를 표한다.”
시현이 대답했다. 녹렴이 말했다.
“사의 따윈 됐어. 이번에는 너희도 약속을 지켰으니까. 인간이 약속을 지키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지만, 내가 고마워할 필요는 없겠지?”
“별로, 필요 없어.”
단이 길을 부축해 다가오며 말했다.
“나야말로, 힘 있는 놈이 일 끝난 뒤에도 약속을 지키는 걸 좀처럼 못 봐서 감탄하고 있는 중이지만. 저 나으리가 뭐라 했든 난 딱히 고맙진 않아.”
녹렴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하지만 그 눈은 웃지 않았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시현의 뒤에 선 거석 하나를 가리키며 단에게 물었다.
“얘 하나만 남겨도 돼? 우리 쪽 바보를 데려가야 하는데 내가 짊어지고 가기는 싫거든.”
“좋아.”
단은 저한테 질문이 온 것에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곧 대답했다.
녹렴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마워.”
거석이 천천히 움직여 다가왔다.
거석이 몸을 굽혀 팔을 내리자 녹렴은 금강을 부축해 그 위에 올라가게 하고 저도 옆에 올라섰다.
녹렴이 거석의 기결 끝에 손을 대며 말했다.
“큰 걸음으로 가자.”
거석의 기결이 번쩍이며 빛을 밝혔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시현이 뒤로 물러섰다.
거석이 쑥쑥 몸체를 키우기 시작했다.
거석은 주위의 돌이나 흙을 모으지 않고도 혼자서 끝도 없이 커졌다.
기결이 태양빛처럼 타오르며 기세를 퍼뜨렸다.
무른 지반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며 내려앉았다.
거의 장군석이라 할 만큼 커진 거석의 팔 위에서 녹렴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높지 않지만 선명한 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로 나도 여러모로 생각하게 된 것이 많아…. 너희와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울 순 없겠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시현이 물었다. 녹렴이 눈을 가늘게 했다.
“이렇게 하자. 우린 금강이 회복하는 대로 하유관을 칠 거야. 이번에는 틀림없이,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모두 죽일 생각이지.”
시현이 굳었다.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녹렴이 덧붙였다.
“하지만 너희들이 우릴 만나러 하유관에 온다면, 공격 개시를 기다려주겠어. 제안할 게 있어. 오늘로부터 삼 주까지는 기다리지.”
그리고 장군석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번 지축이 울릴 때마다 거대한 몸체가 부쩍부쩍 멀어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길이 중얼거렸다.
“어… 그… 이대로 붙었으면 다 뒤질 뻔한 거 맞지?”
호란이 차마 대답은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시현은 새파란 얼굴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고뇌 어린 목소리를 냈다.
“하유관이라고….”
“근데요.”
단이 말했다.
“지금 상황이 정말 개판에 복잡하고, 다들 생각할 게 많은 건 알지만요.”
그가 절실하게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서, 류사예는 진짜 어디로 간 걸까요?”
* * *
사예는 다울마을에서 발견되었다.
몰려든 피난민과 부상자들로 난리통이 된 마을에, 유일한 객주의 제일 큰 방을 차지하고 민폐를 끼치는 집단이 있었다.
숙취에 쩔어 반 시체가 된 하늘인 여섯 명, 그리고 중천에 일어나 해장으로 또 술을 찾고 있는 사예였다.
현의 부모에게 아이의 무사를 알릴 겸, 인근 주민들에게 거인교 근거지의 부상자와 사망자 수습을 부탁할 겸 마을을 찾았다가 사예를 본 일행은 다들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못 열었다.
사예는 객주 쪽마루에 턱 걸터앉아 마을에 남은 마지막 탁주 한 동이를 없애는 중이었다.
길이 휘청이며 달려가 사예의 무릎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예 님!”
“길아!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 누가 이랬어!”
상처투성이에 몸도 잘 못 가누는 길을 보고 사예가 정색을 했다.
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다.
“무사하실 줄 알았어요. 저는 진짜, 사예 님 무사하실 줄 알았어….”
“어유, 뭘 울기까지 하고 그래, 고작 하룻밤 떨어진 걸. 애기냐?”
사예는 한 손의 탁주 바가지는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길의 머리칼을 마구 휘저어 쓰다듬었다.
긴장이 풀린 길은 비틀대며 쪽마루에 걸터앉더니 축 처졌다.
사예가 눈을 부릅뜨고 단을 보았다.
“얘 어쩌다가 이 꼴이 된 거야?”
“……사예 님이야말로 어쩌다가….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단이 팔을 늘어뜨린 채 기운 없이 물었다.
사실 단도 당장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일행 모두 어제부터 한순간도 눈을 못 붙이고 가지가지로 굴렀다.
하지만 이대로 뻗으면 단은 자던 중에 복장이 터져서 죽고 말 것이다.
“그게, 쟤들이.”
사예가 바가지를 입가로 가져가며 방 쪽을 가리켰다.
반쯤 열린 문으로 방안에 널브러진 하늘인 무리가 들여다보였다. 누구인지가 끙끙 죽는 소리를 냈다.
“거인교는 교리로 음주를 금한다는 거야. 그리고 젊은 애 하나는 살면서 술을 한 모금도 안 먹어봤다지 않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길래, 교단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 같이 한잔하기로 얘기가 돼서.”
“아뇨…. 제가 묻고 싶은 건… 어쩌다가 납치범들과 다 같이 한잔하는 사이가 되신 건데요….”
기력을 그러모은 단의 질문에 사예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어쩌다가 그랬더라? 매운 육포 어느 지방 꺼가 제일 맛있나 얘기하다 그랬나? 에이, 그게 뭐 중요해. 원래 내가 술친구를 안 가리잖니.”
사예가 하하 웃었다.
단도 하하 웃었다.
괜히 물어봤다. 눈 뜬 채로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뒤에서 호란이 진심으로 탄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는 사람하고 친해지는 데는 먹을 거 얘기가 제일이라더니 진짜였구나….”
“호란 호위님. 진짜로 이게 화제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호란에게 핀잔을 준 단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으로 사예에게 물었다.
“마력석 있으셨잖아요. 그건 안 쓰셨어요?”
사예가 눈을 반짝였다.
“아주 유용하게 썼지! 패물이잖아! 그걸로 술값 했거든!”
“…….”
단은 어째선지 목이 메었다.
시현이 격려하듯이 단의 등을 두드렸다.
“객주에 이야기해서 다시 사들이자꾸나. 네 말대로 돈을 넉넉하게 가져오길 잘했다.”
단은 사예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허탈하다 못해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러 온 거죠, 우리…. 우리 없었어도 이 사람이 술판 벌린 사이에 돌 인간들이 교단 다 때려 부숴서, 이 사람은 아무 일 없이 털레털레 돌아왔겠네….”
시현이 위로했다.
“대신에 많은 사람을 구하지 않았느냐. 놔두었으면 그들이 교단을 친 기세로 인근 마을까지 쳤을지도 모르고.”
“설령 그랬더라도 이 사람만은 괜찮았을 거 같아요….”
얼굴을 감싸는 단에게 사람 하나가 절뚝이며 다가왔다.
그가 작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와주신 덕분에 살았으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몇 번을 말씀드려도….”
그는 일행이 예배 중에 구해낸 청년이었다.
피 묻은 옷을 갈아입히고 상처를 치료해놓고 보니 처음 인상보다 더 앳되어 보였다.
단이 물었다.
“갈 데는 있어요?”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했다.
“제가 있던 상단 사람들은 놈들이 습격했을 때 다 죽고 흩어졌어요. 제 주인인 상단주님도 죽고요.”
“출신지는 어딘데요.”
청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우물쭈물 말했다.
“화래읍성 위쪽에 작은 마을인데…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원래, 부모님 빚 대신에 노비로 팔렸던 거라서. 아직 일도 하나도 못 배웠는데….”
단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사예를 향했다.
“사예 님. 길이가 갈비뼈가 나간 거 같아요. 바로는 못 움직일 겁니다. 사예 님은 여기서 길이 조리시키시면서 다친 사람들 좀 돌봐주세요. 보화상단에는 제가 말해드릴 테니까.”
사예가 빈 탁주 바가지를 내려놓았다. 처져 있던 길도 고개를 들었다.
사예가 물었다.
“너는?”
“저야 보화상단 떠나버리기 전에 당장 움직여야죠. 그리고요.”
단은 뒤에 멀거니 서 있던 청년을 부축해서 사예 앞으로 데려왔다.
“나중에 서쪽 광산촌 가실 때 이 사람 좀 데려가 주십쇼. 잘 좀 부탁합니다. 저 대신이라고 생각하시고.”
“너, 너 대신이라니….”
길이 당황하며 말했다.
청년은 우물쭈물 감사의 말을 하면서 양쪽의 눈치만 봤다.
사예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 결국은 북쪽으로 갈 거구나.”
단이 쓴웃음을 지었다.
“북쪽은 고사하고. 돌 인간 놈들이 협박하는 바람에 도로 하유관으로 내려가게 생겼습니다. 그 시문 나으리도 자기 길을 뜻대로 못 잡는 판국에, 저 따위가 앞길을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그 다음에는?”
사예가 다시 물었다.
단이 대답하지 않자 길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단은 얼른 말렸다.
“있어, 있어. 사예 님한테 다친 데부터 봐달라고 해. 나 일 좀 챙기고 다시 올게.”
곧 수레를 끌어야 할 호란을 쉬게 놔두고, 단과 시현은 객주 주인을 찾아 마력석을 되사러 갔다.
당연히 주인은 가치 가늠이 어려운 패물보다 돈을 더 좋아했다.
시현은 남는 돈과 곡식 따위를 다울마을 큰머리에게 건네고 부근의 무사한 읍성에 지원을 청하는 공문을 써준 다음, 인근 마을과 힘을 모아 거인교의 부상자들을 수습해줄 것을 부탁했다.
홍지마을로 떠날 준비를 마친 후, 시현은 여비 조의 금폐 얼마와 함께 되산 마력석 둘을 도로 사예에게 건넸다.
사예는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는 넙죽 받았다.
단이 애끓는 얼굴을 했다.
“방금 돈이랑 마력석을 술독에 던져 넣으신 거예요. 제가 웬만하면 나으리께서 길가에 금을 뿌리시든 곡식을 뿌리시든 상관을 안 하는데….”
“이번에도 상관하지 말거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시현이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단은 시현이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안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가 포기를 못 하고 말했다.
“하다못해 마력석 팔아서 술 먹지 말라 소리라도 한마디 해주시면 안 됩니까? 잘 하시는 잔소리 같은 거 있잖아요. 민생이 어려운데 귀한 식량으로 술 빚어 마시지 말라거나 땅인의 위 된 도리나….”
시현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단을 보았다.
“위 된 도리를 말하라 하였느냐? 류사예에게?”
젠장. 머리 똑바로 잘 돌아가고 있잖아.
단은 속으로 낭패했다.
왜 얘까지 류사예를 맘에 들어 하는 걸까?
세상은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했다.
“먼저 수레에 가 있으마. 친구와 인사하고 오너라.”
시현이 말하고 객주 사립을 나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