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99
099화
* * *
창문 앞에서 부채를 펼치는 형태로 바람의 벽이 뻗었다.
바위처럼 뭉친 공기 덩어리에 후려쳐진 적들이 수 장씩 날아가 건물 아래로 떨어졌다.
단은 서둘러 창으로 몸을 빼냈다.
호란도 시현을 창틀 위로 넘겨주고 저도 뛰어넘어 지붕 위에 섰다.
소란을 들었는지 물려 두었던 호위들이 처소 안으로 거칠게 쳐들어왔다.
모두 칼을 뽑아들고 살기를 뿜고 있었다.
호란이 창 쪽을 향해 서며 소리쳤다.
“놈들은 제가 막을게요! 지붕을 타고 옆으로….”
그때 시현이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거리를 둔 3층 전각을 향하고 있었다.
“산멸하라!”
건너편 전각에서 집채만 한 불덩이가 세 사람을 향해 날아온 것과, 시현이 소리치며 마력석을 들어 올린 것은 동시였다.
다가오던 불덩이가 지워낸 것처럼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남은 열기만 피부에 끼쳐왔다.
호란은 더 이상 무슨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창문으로 나오려던 가짜 호위를 힘껏 걷어찬 다음, 단을 한쪽에 떠메고 시현의 허리를 감아들었다.
그는 곧바로 지붕 위를 달려 다른 전각 위로 몸을 날렸다.
“와, 잠깐만! 그렇게 아무데로나….”
“호란아, 호란아!”
단과 시현이 소리쳐 불렀지만 호란은 멈추지 않았다.
사방에서 살기가 느껴지고, 어둠을 뚫고 화살이 날아왔다.
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방향이 이쪽저쪽이라 다 잡아낼 수 없었다.
장소를 벗어나는 게 최선이었다.
총치부 여기저기서 불이 밝혀지고 몫꾼들이 달려 나왔지만 호란에겐 모두 다 적으로 보였다.
호란은 전각 두 개 위를 쏜살같이 달려 불빛 없는 쪽을 향했다.
2층 전각 위에서 힘껏 도움닫기해서 뛰어내리며 총치부 담을 함께 넘었다.
다행히 착지한 장소에는 파수병이 없었다.
호란은 그대로 근처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조건 총치부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계속 달렸다.
“호란아, 그만, 그만! 이제 괜찮다!”
시현이 두 번을 더 불렀을 때에야 호란은 발을 멈추고 두 사람을 내려놓았다.
일행은 담이 높고 기와집이 많은 거리에 와 있었다. 밤이 깊어 주위엔 인적이 없었다.
뛴 건 호란인데 시현이 비틀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자갈길에서도 절대 멀미한 적이 없고, 호란이 치풍산 산길에서 속도를 못 줄여 수레를 뒤집을 뻔했어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던 시현이 이번만은 질린 얼굴이었다.
원래도 몸이 안 좋았던 단은 땅을 짚은 채 아예 일어서지도 못했다.
시현이 호란에게 물었다.
“좀 진정했느냐.”
“전 침착해요.”
“…….”
시현은 반론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호란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방금은 위험했다. 피해야 했다.
그리고 도망칠 때야말로 모든 걸 제쳐놓고 혼신과 사력을 다해야 할 때였다.
앞과 뒤를 살피고 뭘 따져가며 도망가도 되는 상황 같으면 처음부터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호란은 단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고 짐을 넘겨받았다.
단은 현깃증이 나는지 벽을 짚고 겨우 섰다.
그가 호란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다짜고짜 뛰쳐나오면 어떻게 해! 총치부는 한번 나오면 숨어 들어갈 수도 없는데….”
“아니다. 화살이 계속 날아온 데다가 법술 쓰려는 자들이 다른 전각에 더 있었다. 이쪽의 마력석이 모자라니 일단 거리를 두고 피한 것은 잘한 것이다.”
시현은 호란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얼굴빛이 황망했다.
그가 말했다.
“저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 생각을 못 하였다. 이만큼 일을 벌리면 안 들키기가 어려울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 일행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자 호란의 뱃속에서 화가 욱 치받았다.
호란이 양 주먹을 쥐며 말했다.
“우리 도망쳐요 시문 님. 이런 동네 따위 내버려 두고 가요!”
“호란아. 지금 그 말은 네가 화가 나서 하는 말이다. 나중에 네 본심을 찾으면 후회할 테니 거기까지만 하거라.”
시현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평소 같으면 빠져나갈 궁리를 할 단도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튈 수가 있어야 튀지. 관성이 통째로 포위된 건 둘째치고, 돈도 짐도 수레도 다 총치부에 있는데. 몸만 갖고 나가 봐야 말라 죽기밖에 더 하냐….”
그때 시현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며 단과 호란을 담벼락 쪽으로 밀었다.
셋은 담에 붙어 숨을 죽였다.
신경을 곤두세우자 호란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인 여럿의 살기 어린 기세가 몇 골목 건너에서 가까이 다가왔다가 지나쳐 멀어져갔다.
놈들이 불을 밝혀 들진 않았다. 하지만 달이 있어서 어둠에 몸을 숨기기는 어려웠다.
기색이 완전히 사라지자 시현이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저들이 우릴 찾고 있구나. 어디로든 움직여야겠다.”
단이 시현에게 물었다.
“마력석 몇 개 남으셨습니까.”
“넷이다.”
단은 이마를 짚었다. 방도가 잘 안 떠오르는 듯했다.
안색까지 창백해서 호란은 무척 걱정이 되었다.
시현이 말했다.
“금탑으로 가자. 그쪽은 사방이 밝고 경비하는 자가 많으니 적들이 감히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단과 호란은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았다.
하유관 어디에서나 보이는 금빛 찬란한 탑루가 밤중에도 사방에서 불빛을 받고 있었다.
금탑은 하유관 동문과 총치부 사이에 있는 높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탑이 건축된 것은 31년 전 조휘영 무가 총치에 오를 때였다.
날씨와 천문을 관측하고 그 기록을 적치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이 본 목적이라 믿지 않았다.
높이는 성곽의 주각루를 건너다볼 정도로 높았고, 탑신 전체에 땅에서 솟는 물줄기의 모습을 아름답게 양각했다. 최상부는 온통 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휘영이 하유관에 가져온 부를 통째로 쌓아올린 것처럼 보였다.
밤에도 낮에도 경비가 삼엄했고 해 지기 전부터 주위에 불을 밝혔다.
30년간 하유관 전체를 내려다보아온 금탑은 총치 조씨 휘무의 권위 그 자체였다.
단이 물었다.
“거기 지키는 사람들이 나리님 편일지 아닐지 어떻게 알고요?”
“금탑의 파수는 하유관의 정예이고 총치의 직속이다. 믿을 수 있다.”
단이 찡그렸다. 그 표정은 조금 웃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유관의 정예라는 게 어떻게 믿을 이유가 되는지 저는 잘….
나리님. 지금 이 상황에 와서도 하유관 사람들을 믿으세요? 나리님을 적대하는 건 소수의 이상한 사람들이고, 다수의 정상인들은 안 그럴 거란 생각이라도 하시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두려운 것 뿐이야….”
“아니기는요. 하유관 와서 내내 헛도신 이유를 이제 좀 알겠네.”
단이 혀를 차고서 말했다.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 두려워하는 게 문제 아닙니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겁 먹고 보신밖에 모르게 된 사람들이에요.
총치부 정예고 총령부 정예고 전 아무도 못 믿습니다. 금탑은 안 됩니다.”
시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가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단을 바라보았다.
“단. 아무도 믿기 어려운 때라도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 아무도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금탑으로 가자.”
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래도 그는 손을 들어 방향을 알려주려 했다.
“큰길로 가지 말고 작은 골목으로 돌지요. 저쪽으로….”
말을 하다 말고 단은 눈을 감았다.
그가 반 발짝 뒷걸음질쳐 뒷머리를 담벼락에 기댔다.
시현과 호란이 양쪽에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머리 아파?”
호란이 물었다. 단은 눈을 감고 미간을 좁힌 채 있을 뿐 한참 대답을 못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까운 데 인기척이 나타났다.
담벼락 저쪽 골목에서 낮은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호란은 소리 없이 담벼락을 기어올라가 건너편을 넘겨다보았다.
흐린 달빛 아래, 너울 두른 전모를 쓰고 검고 긴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걷는 모습이 약간 눈에 익었다.
너울 아래까지 늘어뜨려진 긴 머리채가 얼핏 보였다.
호란은 바로 뛰쳐나가 그를 붙잡았다.
“열아! 열이지?”
팔을 붙잡힌 상대는 흠칫했다.
늘어진 너울을 사이에 두고 호란과 하열의 눈이 마주쳤다.
호란을 알아본 열이 눈을 크게 떴다.
“호란 님?”
열은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호란이 작은 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도와줘, 열아!”
“예?”
“시문 님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어. 총치부에 있을 수가 없어. 어디 숨을 데 없을까?”
열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그의 시선이 호란이 뛰쳐나온 담벼락을 향했다.
열이 소곤대는 소리로 물었다.
“위께서… 여기 계십니까?”
“응. 지금 갈 데가 없어….”
반대편 큰길 쪽에서 다시 사람 소리가 났다.
하늘인들이 사방을 뛰어다니며 찾고 있으니 오래잖아 들킬 것이었다.
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가 빠르게 말했다.
“일단 오십시오. 제 집이 가깝습니다.”
열은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되밟았다. 호란은 돌아가서 단을 부축해왔다.
세 사람은 말없이 열의 뒤를 따랐다.
열은 빠른 걸음으로 골목 두 개를 돌았다.
집집이 다 어두운데 딱 하나 마당에 등불이 밝게 밝혀진 집이 있었다.
열이 대문을 밀자 잠기지 않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높은 담벼락 안쪽, 유등 불빛 아래 꽤 널찍한 뜨락과 깔끔한 기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넓은 마당 가운데에 대청이 넓은 여러 간짜리 주채가 자리했다.
뒤켠에는 부엌이 딸린 작은 안채가 섰다.
열은 주채의 큰 방 한 간을 열어주고 불을 밝혔다.
세 사람이 방에 들어가자 열은 밖에서 문을 닫아주고 대청을 내려갔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겨우 긴장을 푼 호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그래도 일단은 한숨 돌렸네요. 열이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하지만 두 사람은 호란만큼 안심한 얼굴이 아니었다.
단이 인상을 찌푸리고 시현에게 말했다.
“저자는 하유관 총치부의 염탐꾼입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호란은 놀라서 목소리를 높일 뻔했다.
“열이는 그냥 악공이야!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인 게 무슨 상관이야, 관기 하는 일이 빤하지….”
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열이 물주전자와 잔을 올린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호란은 당혹해서 더듬거렸다.
“열아, 들었어? 단 말은, 그게….”
쟁반을 내려놓은 열이 방문을 닫았다.
그가 서슴없이 말했다.
“저는 첩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호란 님이 먼저 도움을 구하셨지, 제가 명을 받아 위를 유인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뜻으로 피하게 해드린 것을 의심부터 하시면 저도 마음이 상합니다.”
열의 고백에 눈에 휘둥그레해진 것은 호란뿐이었다.
단도 시현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시현이 무감한 어조로 물었다.
“내 일을 보고할 것이냐?”
열은 얕게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일이면 바로 보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숨이 오고갈지 모를 일에는 저 같은 것도 고민을 합니다.
더구나 얼핏 뵙기로도, 문께서는 아래의 사정을 살피시는 다정한 분이시지요. 호란 님도 저를 잘 대해주셨고요.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열아….”
호란이 울상을 했다. 애걸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옆에 선 단의 표정이 너무 냉정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