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107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1)
“노예야~”
“예……. 마님.”
“오늘 밥은 왜인지 더 맛있는 것 같구나~”
식탁에 앉아있는 백도가 낄낄대며 젓가락 끝을 앙 깨물었다.
날 놀려 먹는 게 인생 최고의 업적인지. 고취된 그녀의 얼굴은 마치 세상 모든 복숭아가 딱복으로 변한다면 이런 표정을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밝았다.
‘빌어먹을.’
나는 백도를 바라보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슬퍼하는 제자 놈 생각은 안 하고. 제 욕심만 부릴 줄 알다니.
내 사정을 알고 있어서 뭐라 못하는 지금 이 상황이 더 서글펐다.
백도는 젓가락을 뻗어 부침개 하나를 집어 입에 쏙 집어넣었다.
“으음~”
튀어나오는 비음. 날 약올리는 그 콧소리가 괜히 더 신경 쓰였다.
부대찌개에 계란말이, 김치부침개부터 전복 장조림까지.
백도는 자신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며 내게 이죽댔다. 저 음식 중에는 내 손을 거쳐 가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데 이 부침개는 조금 김치가? 설익은 것 같기도 하구나?”
“그거 마님이 지리산에서 가져온 김치입니다.”
“어허. 알아서 눈치껏 골랐어야지!”
어허는 개뿔, 속이 불타서 화딱지가 뜯어지기 직전이다.
나는 혼자 속으로 분을 삭였다.
왜 내가 이런 기구한 처지가 됐느냐.
내가 지금 이렇게 무릎을 꿇은 채, 드라마에 나올 법한 돌쇠가 된 이유는 일전에 백도와 나눈 내기 때문이었다.
-내기나 한 번 할까요? 제가 1등 찍는지 못 찍는지로.
-괜한 내기를 했다가 추태를 보이는 게 아직도 눈에 훤한데…… 내가 이 내기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느냐?
얼마 전에 나누었던 습관적인 내기.
빡대가리라고 생각했던 백도는 쓸데없이 이런 데서 아인슈타인 뺨치는 기억력을 발휘했고.
결국 나는 정확한 기간 고지 없이 이 못된 여자의 노예가 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마님. 이 같잖은 소꿉놀이는 언제 끝납니까?”
“오늘 하루로 끝낼 생각이다.”
“오… 그럽니까?”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지. 넌 3일간 노예다.”
애미.
조금이라도 내 수고를 이해해줄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그래 내기는 내기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시큰둥하게 서 있으니 백도는 식사를 하다 말고 그런 나를 흘겨 보았다.
그러다 젓가락을 내려두고 나직히 말했다.
“소화가 안되는군. 애초에 말이다. 네가 병신이지 않느냐.”
“예?”
“오히려 내가 불리한 내기였다. 그걸 알면서도 받아들였고 허세도 부리지 않았느냐? 그런데 발렸…큭큭, 아 미안. 발린 건 너다. 네가 선택한 패배다. 악으로 깡으로 받아들이도록.”
오늘 따라 단어 선택을 열 받는 것으로다가 쏙쏙 골라 뱉는다.
일단은 맞는 말이긴 했다.
반박 못해 더 화가 나는 거기도 했고.
“아무튼 어서 술을 대령하도록. 한 잔 마시고 자고픈 기분이구나.”
이제 내 승패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주제를 돌린 백도.
그녀는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박수를 두어번 쳤다.
-짝, 짝.
몸에 드러나는 선이 우아해서 제법 멋들어지게 보인다.
‘에휴 그래… 뭐 어쩌냐. 장단 맞춰 줘야지.’
“……술 뭐요. 참나무로요?”
“나무톡톡으로 가져와라.”
나는 냉동고에서 15분간 넣어둔 캔 맥주를 꺼내 백도에게 가져갔다.
알코올이 요만치도 들어있지 않은, 술 좀 마신 사람이라면 술 취급도 안 한다는 그것.
백도는 흡족하게 캔을 받아들여 캔 뚜껑을 따려했다.
그러다, 아차.
뚜껑에 향하는 손을 멈춘 백도가 캔 입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일인가 하고 보고 있으니 그녀가 다시 캔을 넘겨왔다.
“따 줘라.”
“귀족은 캔도 못 따 마십니까?”
“내 아리따운 손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아리따운 손은 개뿔… 물 대신 피 묻히게 생겼구만.”
내 빈정거림에 백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리 와봐라.”
가까이 다가서자.
백도는 도발하듯 까딱이던 손을 주먹으로 쥐더니 그대로 내 명치에 내리꽂았다.
“억!”
눈물이 찔끔 나고 눈앞이 핑 돌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자, 턱을 괸 백도가 실실 웃으며 내 어깨를 향해 제 발을 뻗었다.
새하얀 맨발이 꾹꾹 어깨 끝을 눌러왔다.
“밥 먹는데 왜 그러느냐 대체.”
“……때리진 맙시다. 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아픈 건 네 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아니지 않느냐. 어차피 한동안 MT니 뭐니 해서 훈련도 쉴 거고. 여하튼 처신 잘해라.”
손가락으로 꾹꾹 내 볼을 찌르며 백도가 킬킬댔다.
이 인간이 정말.
참고 참던 실이 뚝 끊겼다.
고개를 돌려 손가락을 왁 깨물었다.
“익, 지금 뭐하느냐!”
퍽! 백도의 손바닥이 내 볼을 치고 밀어붙인다.
질세라 양손으로 백도의 팔을 결박하고 그대로 넘어뜨리니 입고 있던 셔츠 자락이 올라가 배를 훤히 들어냈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을 거.
정말 있는 힘껏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백도의 왼손이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이거 놔라.”
“먼저 놓으십쇼!”
“이이익. 3초, 3초 안에 놓지 않으면 네 사지를 분질러 버리겠다!”
-와당탕!
의자가 밀려 넘어지고. 식탁에선 젓가락이 떨어져 내 뒷머리를 때렸다.
그대로 몇 분을 아옹다옹 싸우니, 나는 침이 잘못 넘어가 콜록대며 나가떨어졌고. 백도는 이빨 자국이 난 검지 손가락을 옷에 문지르며 발로 내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콜록, 콜록.”
“이게 뭐냐 대체! 내기에 진 건 너잖느냐.”
“그러니 좀 적당히 하셔야지 뭡니까 이게.”
나는 백도의 팔목을 잡고 그 손을 백도의 눈에 가져다 대었다.
끊어진 머리 몇 가닥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으면 이 꼴이 나는가.
하며 백도를 보니, 백도는 뭔가 기분이 상한 듯 험악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기에 진 건 너면서.”
말투까지 바뀌었다. 너무 싫은 티를 냈나.
뾰루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백도의 기분을 대변했다. 참 알기 쉬운 모습이다.
“알았어요. 뭐하면 되는데요.”
“…….”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녹차맛으로.”
뒤늦게 달래기 시작하니,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를 들은 백도의 귀가 움찔거렸다.
“…됐고 술이나 따르거라.”
“넹.”
“아이스크림은 내일 사주고.”
가까스로 되찾은 평화.
원래는 의자에 앉는 것도 금지였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냉장고에서 소주 두 병과 맥주 한 병을 꺼내왔다.
“이거 마실 거예요?”
“네건 마시기 싫다.”
“그러시던지.”
-쪼르르르. 탁.
기울인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근데 왜 너까지 술을 마시느냐?”
“오늘 좀 술이 땡기는 날이라서요.”
“노예가 그러기 있느냐?”
“원래 노예가 더 술 잘 마십니다. 직장인들이 그렇죠.”
“무슨 소리인지 당최 이해를 못하겠구나.”
나는 백도의 잔에 나무톡톡을 꽉 채워주었다.
백도는 자신의 잔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삐죽 내밀고 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꿀꺽, 꿀꺽.
목의 살결이 몇 번 일렁이다 입술이 떨어진다.
“푸흐, 노예는 아직 안 끝났다.”
“그러십쇼.”
“손이나 한 번 주물러 보거라.”
백도가 손을 내밀어왔다.
이번에도 거부하면 좋지 않은 결말로 이어질 것 같다.
나는 손을 잡아 마사지를 시작했다.
손가락 지문을 타고 느껴지는 새하얀 피부의 결. 솜털이 스치며 풍겨오는 독특한 향.
차갑고 말랑한 것이 황도보다는 조금 딱딱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손이 힘을 주면 돌덩이마냥 단단해진다는 게 사실인지.
꾹꾹 누르다 보니, 어느 한 곳에 눈길이 갔다.
곱다랗다고 생각한 손의 날 쪽에 기다란 흉터가 이어져 있었다.
황도나 천도에게선 볼 수 없었던 흉터다.
‘이러니까 과민반응하지.’
아까 정통으로 얻어맞은 배가 바늘로 찌른 것처럼 지끈거린다.
“이건 왜 생긴거에요?”
“노예가 말이 너무 많다.”
“알려줍쇼 마님.”
백도가 눈썹을 기울였다.
“별 거 아니다. 어릴 적에 훈련하다 생긴 거지.”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스승님들 이야기는 많이 못 들었네요.”
“네가 알 필요가 없으니까.”
“정말 말 안해주게요? 그래도 제잔데?”
백도는 입을 꾹 다물고 연신 술을 들이켰다.
“나중에 천도에게나 묻거라.”
“에이 김새게.”
꾸욱. 꾹.
이야기가 끝난 직후.
나는 마사지를 계속했다.
술잔을 쥐고 있던 백도는 술이 오른 건지, 마사지를 받으면서 다른 한 손은 복숭아처럼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부채질했다.
“그만해라. 시원하지도 않다. 괜히 시켰어.”
백도가 손을 뺐다. 약간의 땀이 솟아 있었다.
다른 손에 쥐고 있는 잔을 보니 술이 텅 비어있었다.
“그거 마시고 취했습니까?”
“누가 취했느냐? 너는 항상 그게 문제다. 뭐만하면 욕하고, 또 욕하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취하지 않았다. 취할 리가 없지.”
취한사람 특징, 취하지 않았다고 여러번 말한다.
말이 많은 걸 보니 취한 게 맞는 것 같은데.
“근데 서로 욕하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너랑 나랑은 확실히 안 맞는 것 같다.”
동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보기만 하면 괴롭히고 싶구나. 네 불행이 내 행복이다.”
“저도 그렇지만 참 성격 더럽네요.”
“니가 할 말은 아니다. 빌어먹을 삼등제자.”
또 호칭이 내려갔다.
백도는 가끔 마음에 안들 때 예전에 부르던 호칭으로 돌아가는 버릇이 있다.
“삼등제자랑 결혼할 여자는 분명 고통받겠지.”
“아닌데요? 제가 얼마나 제 여자한테 잘해주는데. 백도님이 보셨나.”
“삼등제자는 전형적인 바람둥이 상이다.”
나는 술 한 잔을 홀짝이고 바로 반문했다.
“바람 안 피웁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라. 원래 바람둥이들이 항상 하는 말이 그거다.”
“바람둥이라도 만나 본 적은 있으시나.”
백도는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쓴숨을 뱉었다.
왜인지 그것은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의 한숨 같았다.
“천도가 자고 있어서 말하는 거다만. 그 교사놈이랑 해 먹는 마당에 황도랑도 접하지 않았느냐.”
이세영과 황도.
모를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자매끼리 서로 성생활을 알면서도 말 안 하는 그런 느낌이었던가.
……이거 한 방 먹었다.
백도가 잔을 톡톡 두드려왔다.
“맥주.”
바로 맥주를 들어 잔을 꽉 채워주니 백도는 그것을 들이키 시작했다.
-꿀꺽, 꿀꺽.
“크…. 모를거라고 생각했냐? 너는 보면 다 안다.”
그리고는 자기 혼자 주저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들어 보니, 의식 중에 황도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아니, 황도야. 그렇게 티를 팍팍내면 모를래야 모를 수 없다. 남자를 아예 모르는 천도면 모를까.”
백도는 어딘가 지친듯한 어투로 턱을 괴고, 날 보며 눈으로 욕하고 있었다.
대화를 끝낸 백도가 싱긋 웃었다. 승자의 미소였다.
“더 할 말은 있나?”
“아직 사귀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는 없네요.”
“큭큭 미친놈…. 그게 더 문제다.”
요즘은 황도와도 딱히 관계랄 것이 없었다.
물론 시험이 끝나서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신세긴 하지만.
음란마귀 달고 여자 셋이랑 살면서 유혹에 견딘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어쩌다 그렇게 됐느냐?”
“글쎄요. 잘 때 덮쳐졌죠.”
“뭐? 또 말을 지어내는군. 황도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애초에 너한테 그만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을 전달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진짜에요.”
“하 웃기군. 밤일도 시원찮을 녀석이 자신감만 높구나.”
“네?”
여기서 그 얘기가 나온다니.
일상생활에서 다른 건 다 건드려도 남자에게는 절대 건들어선 안 될 것이 단 두 가지 있다.
그건 바로 성기술과 게임 실력.
당장 목욕탕이나 화장실에 가서도 서로 슬쩍 비교해보는 것이 남자의 속내인 것이다.
“3초는 가느냐?”
그래서 백도가 언제나의 말투로 이죽거릴 때. 나는 방어심리로서라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험도 없는 사람이 말하니 참 자신감 넘치십니다.”
“여자는 경험 없으면 가치가 높아진다.”
“그것도 언제 까지나 어릴 때 이야기죠. 서른 되고서 그리 말할 수 있을지 두고 봅시다.”
“…….”
술김에 은근히 높아진 목소리.
“그… 알기는 합니까? 평균 관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하! 한 번에 두 시간은 거뜬해야 남자지.”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요. 두 시간이면 그쪽 못 버틸 걸요?”
백도의 눈이 겨울철 한파처럼 싸늘해졌다.
“웃기는 소리. 내가 누군 줄 알고. 천지를 가를 수 있는 여자가 나다.”
“경험해 봤는데. 남녀관계랑 전투 능력은 별 상관 없더라고요.”
“나는 아니다.”
“아니 맞다니깐.”
오가는 목소리에 힘이 담긴다.
“아니다. 유치하게 그러지 마라.”
장군.
“유치한 건 누군데.”
멍군.
“버티지도 못할 것이.”
“해보실래요?”
“뭣.”
양수겸장.
“해, 해보던지!”
역장, 아니 이걸 받는다고?
상기된 말들이 오가다가, 비로소 끝이 나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식탁에는 식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상태.
백도의 얼굴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우리는 서로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여기서 ‘그만둡시다.‘라고 말한다면 상대는 ’쫄았나 봐? 그래 그만두자‘로 응수할 것이 뻔했기에.
그것은 아집이었지만, 나나 백도나 그 특유의 고집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군상이었다.
하여 지금 이곳에 후퇴란 없었다.
“포기하려면 지금 말하거라.”
대화로 열을 받아서 그런지 술기운이 조금 돈다.
“포기는 무슨.”
백도는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핀 팬츠, 검은 티의 흉부에 크게 튀어나온 가슴이 한차례 출렁였다.
그녀의 얼굴은 애써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