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2
쾌락 없는 책임
“우리 엄마 책임져.”
나는 좆됐음을 직감했다.
“책임져!”
지금 내 앞에서 빼액빼액 소리를 질러 대는 어린이 때문은 아니다.
‘말이 안 나와.’
문을 열었을 때부터 내 전신을 덮쳐온 괴감(怪感).
억지로 침을 삼키려 해도 목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 내장에서 끌어 나온 감각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안에서 들끓었다.
식은땀이 흘러 턱에 맺혀 떨어진다.
“알았지?”
싱긋 미소 짓는 아이가 괴이했다.
거대한 심연이 나를 들여다보는 감각. 무력한 공포.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흘렀다.
[ 세계수 ]문득 그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가, 아침 이슬처럼 녹아 사라졌다.
-툭.
-투둑, 툭.
계속해서 땀방울이 떨어진다. 일방적인 꼬마의 시선이 갑작스레 낯이 익어 보였다.
“쯧, 그러게 왜 하필 우리 엄마를 건드려서.”
경멸하듯 뇌까리는 아이의 냉랭한 얼굴에는 이전의 앳된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이해 불가한 상황에 현기증이 났다.
저 꼬마의 모친을 건드린 것은 내가 아니다. 애초에 방구석 폐인인 내가 누굴 건든단 말인가.
그냥 어디에나 있을법한 대학생. 그게 나였다.
‘건든 거라곤…… 저번 새벽-‘
-씰룩.
내 생각을 읽은 건지, 꼬마가 웃었다.
‘아.’
상황을 이해하자 깊은 수마가 나를 덮쳤다.
★★★★
정신이 들었을 떄는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또 다른 세계로 끌려오고 말았다.
이런 걸 기연이라 하던가? 어이없다.
나는 멍하니 매트리스에 누운 채 시간을 죽이다, 애써 무시하던 눈앞의 홀로그램 창을 바라봤다.
[ 유저 이시헌님. 첫번째 남편 후보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까부터 온 정신을 헤집어 놓은 이질적인 지식.
어처구니 없이 많은 정보가 뇌수를 끓게 했다.
내가 이세계에 왔다는 것.
그 처지를 깨닫고 부정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아서, 한참이나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주입 당한 지식이 이세계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임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
탄식이 흘렀다.
“시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대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방금 깨달은 내 처지를 설명하는 것은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세계수 따먹고 이세계 왔다.
★★★★
이 세계는 여러 그루의 세계수로 이루어진다.
공허한 세계에서 뻗어나온 세계수는 자신의 뿌리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보듬으며, 아이들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어머니의 시선으로 피조물들을 지켜본다.
내가 속한 세계는 [ RH2-지구 ]. 세계수가 없는 장소이자, 이색적인 발달을 거듭한 진취적인 세계.
중요한 건 이러한 세계에 흥미를 느낀 한 어린 세계수가 지구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걔를 내가 따먹었고.’
그 세계수의 딸이 내게 책임을 물은 결과, 듣도 보도 못한 이세계로 끌려왔다.
‘어이가 없네. 내가 무슨 세계수를 따먹어?’
내가 한 건 뒷산에 있던 작은 나무에 피스톤질을 좀 한 것이 다였다. 그냥 두부딸이었다. 한낱 못난 놈의 추한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세계수면 세계수다워야지 그렇게 작은 나무가 세계수일지 누가 알았겠어? 미친놈들.
하지만 아무리 욕을 해도 석연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침대에 걸터 앉아 한숨을 뻑뻑 쉬었다. 과거에 저질렀던 일에 대한 쓸데없는 후회가 몰려왔다.
“공부해서 겨우 과탑 찍어 놨더니 나무한테 시집을 가고 앉았네.”
【 ‘순결의 세계수’가 부끄러워합니다. 】
“좀 닥쳐봐. 예민하니까.”
【 ‘순결의 세계수’가 시무룩해합니다. 】
눈앞에 드러나는 반 투명한 홀로그램은 온라인 게임의 채팅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시각각 갱신 되고 있었다.
물론 그 창에 올라오는 대사라곤 관심도 없는 세계수의 아양이나 감정뿐.
저 순결의 세계수란 놈은 이세계에 온 날을 기점으로 자꾸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내 아내 될 나무인 것 같은데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다.
“원래 살던 지구로는 못 돌아가나?”
답변을 바라고 중얼거려봤지만 기대하던 세계수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불가능하다는 거겠지. 정수리를 긁어 대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N-1 지구는 또 뭔데. 평행 세계도 유분수지.’
이곳은 [ N-1 지구 ], 세계수들이 뿌리를 핀 세계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왜 살고 자빠졌는지는 모른다. 지식이 주입 당했을 뿐이다.
내 몸의 모든 부위가 세계수를 혐오한다. 개같은 년.
-삐비빅.
귓가에 들려온 경쾌한 알림에 홀로그램 창을 확인했다.
【 유저-이시헌, 당신은 세계수의 남편 후보로서, 그에 걸맞은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
“싫어.”
【 안내문은 이번 한 번뿐이며 당신은 퀘스트를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
어림도 없나. 쭉 읽어 내렸다.
【 메인 퀘스트 불이행의 대가는 당신의 ‘완전한 소멸’이며, 당신은 세계수의 지아비로서 마땅한 자세와 책임감을 지녀야 합니다. 당신의 유저 시스템은 이를 도울 것입니다. 】
완전한 소멸. 즉 죽음이다.
한 마디로 이 새끼들은 날 더러 최고의 남편감이 되지 않으면 뒤진다는 어마 무시한 협박을 내걸고 있었다.
“허, 허허허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온다.
살면서 이만한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디링!
[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 MainQuest 1. 떡잎부터 다른 】
▶ 당신은 이 세계에 표류한 이방인입니다. 세계수의 남편감? 자격은 있으나 여전히 당신은 하찮습니다. 가치를 증빙해보십시오.
▶ 당신에게 할당된 과제의 수는 [ 1 ]입니다.
-엘 아카데미에 합격한다.
[ 퀘스트 보상 ]-세계수의 사랑 x 1
[ 퀘스트 실패시 ]□□□□□□
-사망합니다.
남은 기한 : 120일 24시 59분 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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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남편감이야. 그리고 실패하면 뒤진다고?”
까라면 까. 나를 보는 세계수가 그리 말하는 듯했다.
“에라이 시발”
휘몰아친 감정을 욕 한번으로 훌훌 털어냈다.
이전까지 행복했던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 뒤지기 싫으면 이 세계에 강제로 적응 해야 했다.
나는 방에 구비된 컴퓨터로 이 세상을 조사했다.
‘헌터와 영웅, 던전과 빌런,’
알아본 결과 이 세계는 내가 알던 현대 판타지와 흡사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나무인 목인이 살아간다는 것을 제외하면 원래 살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충 이해했다. 다 아는 설정이고, 실존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세상이다.
마법과 검이 공존하는 판타지!
그러나 딱히 흥분감이 일지는 않았다.
전라남도 강진에 계신 어머니를 걸고 이딴 세계에 떨어지는 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 캐릭터를 작성하십시오. ]이윽고 뜬 홀로그램 창을 응시하던 나는 체념이 담긴 숨을 내뱉었다.
‘부정해서 뭐하냐. 이미 세상에 떨어진 것을. 또 모르지, 말 잘 들으면 원래 세계로 보내줄지도.’
이런 마음을 먹게 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내 생사여탈권을 저 망나니 세계수년이 쥐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 두 번째 이유는…
【 이시헌님의 정보창을 생성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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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시헌 (세계수의 남편 후보)
【 나이/신장/체중 】
24 ⇒ 20세 / 174cm / 65kg
【 능력치 】
-근력 5
-내구 5
-민첩 5
-체력 5
-마력 5
-매력 5
-지능 5
-잠재력 5
-행운 5
※ 매력, 지능, 잠재 능력, 행운은 선천적인 능력치로, 추가 능력치로 증강할 수 없습니다.
□고유 특성(0)
□보유 스킬(0)
□기질(0)
-남은 포인트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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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 내 전문영역이었으니까.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게임 경험 덕에 이런 시스템에는 해박했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가장 우선해야 할 능력치를 조작했다.
-잠재력 10.00 (최대)
-남은 포인트 27
잠재력, 지능 같은 선천적 능력치 5는 제법 뛰어난 축에 속한다.
7에 다다른 선천적 능력치는 흔히들 천재라 불리며.
9에 다다른 선천적 능력치는 시대를 풍미하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역이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 모르지만, 팔자가 피려면 잠재력은 필수야.’
잠재력은 사람이 성장하며 점파 감소하고 고유 특성과 스킬로 꽃을 피운다.
포인트를 절반 이상 소모했지만, 잠재력은 안고 가야만 하는 당첨된 복권임이 틀림없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복잡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왕귀를 못 참는 게이머의 감.’
나는 모든 포인트를 성장 가능성에 맞춰 만들 예정이었다.
그것이 손해 보지 않는 장사였고, 세계수가 나를 지켜보는 이 세계를 살아가려면 지혜로워야 했다.
[ 고유 특성 선택란 ]-검신(EX) 500p.
-마나 지배자(EX) 500p.
.
.
.
고유 특성란에는 남는 포인트로 고를 수 없는 특성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없는 포인트는 직접 구하면 되는 법.
방금 봤던 능력치에는 숫자 양옆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근력 4.00
-남은 포인트 29
근력을 줄이니 예상대로 보유 포인트가 올랐따.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근력 1.00(최소)
-내구 1.00(최소)
-민첩 1.00(최소)
-체력 1.00(최소)
-마력 0.00(최소)
-남은 포인트 256
후천적 능력치는 노력으로 늘릴 수 있는 반면에 고유 특성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대다수였다.
선택과 집중.
모든 걸 가지고 갈 수는 없으니 포텐셜에 집중해야 했다.
나는 매력 능력치에 손을 뻗었다.
-매력 4.00
【 ‘순결의 세계수’가 깜짝 놀랍니다. 】
“음?”
-달칵.
-매력 3.00
【 ‘순결의 세계수’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습니다. 】
【 강제력이 발동됩니다! 】
-매력 3.00 ⇒ 5.00
“응 싫어.”
-매력 1.00(최소)
-남은 포인트 : 561
【 ‘순결의 세계수’가 울먹입니다. 】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닌 능력이다. 꼬우면 남편감 포기하라지.
특히 외모 같은 선천성 포인트는 포기하는 가치도 높았다. 나는 행운에 포인트를 몰아넣었다.
-행운 10.00(최대)
‘운은 필수다.’
마음 같아선 지능도 확 줄여버리고 싶지만, 백치가 되는 게 무서워 그만두기로 했다.
남은 것은 특성과 기질.
포인트를 벌기 위해 나는 디버프로 작용하는 이런저런 기질들을 추가했다.
-기질 :: 추악한 외모[F] +100p
-기질 :: 음란마귀[F] +50p
-기질 :: 분조장[F] +50p
-기질 :: 고도비만[F] +100p
【 ‘순결의 세계수’가 펑펑 웁니다. 】
“뭐, 왜, 뭐.”
【 ‘순결의 세계수’가 당신에게 간곡히 청합니다. 】
울어도 어쩔 수 없어.
봐둔 기질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 페널티들을 안고 가야만 했거든.
-기질 :: 대기만성(EX)
▶ [남다른 성장력] : 잠재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현재 잠재력 : 10 ⇒ 20)
▶ [만개하리라] :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냅니다. 잠재력에 비례합니다.
▶ [포기란 없다] : 정신력이 상당히 증가합니다.
※ 이 능력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모은 포인트를 전부 소모해서 만들어낸 귀하디 귀한 능력.
[ 확정하시겠습니까? Y/N ]Y를 누르자마자 온몸이 무거워졌다.
시야를 아래로 내리니, 푸짐한 살집이 내 배에 내려앉아 있었다. 보자마자 앞으로의 고생 길이 훤히 보이는 듯 했다.
그래도 기질은 개인 여하의 노력에 따라 삭제가 가능하다.
살만 뺀다면 고도 비만쯤은 단숨에 떨쳐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기질도 최악에 비하면 비교적 극복하기 쉬운 것들이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아니라, 하이 리스크 하이퍼 리턴.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아카데미 입학 신청까지는 앞으로 100일.
그떄까지 능력치를 최대한 올려야 했다.
나는 두 손으로 내 뺨을 두어번 쳤다.
상황은 절망적인데 왜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 ‘순결의 세계수’가 오열합니다. 】
나를 엿맥인 세계수가, 목 매어 울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