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210
같은 시각, 같은 때를 기다리며 (2)
“저번에 말씀하신 것, 가져왔습니다.”
코르너스 가문, 가주의 집무실.
성지호는 품에 있는 파일을 쥐고 서류 처리를 하는 산혁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이번에 조사한 내용은 이시헌에 관한 것.
지난 중간고사의 대결에서 이시헌이 정시우와 호각을 이뤘던 탓에 산혁원은 그에게 관심을 가졌었다.
재능있는 자의 씨앗은 어떤 용도로든 도움이 된다.
목인의 품종개량.
산수유의 대에서 실험이 실패하면 그녀와 다른 재능있는 자의 씨앗을 섞어 새로운 실험체를 만든다.
성지호는 산수유의 비서실장으로, 나름 높은 지위에 있었기에 어느 정도 그들의 뒷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코르너스 가문의 실험이 성공하기 직전이다.’
영원불멸한 목인을 만든다.
세계수도 다다르지 못하는 그 영역은 코르너스 가문의 비원. 산수유나무의 꽃말.
그리고 이번 대의 희생자는 당연히 산수유다.
최근 훈련이나 식사 시간에도 산수유는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계속해서 그 완성이라는 단계를 거쳐 가고 있는 거겠지.
“이제 필요 없다. 파기하도록.”
산혁원의 입이 열리자 지호는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알겠습니다.”
정시우. 이시헌.
행여나 산수유가 망가졌을 때를 대비하여 골라둔 종자들일 뿐이다.
재능있는 사람들 중에서 굳이 인간을 고른 이유는 코르너스 가문의 핏줄이 다른 목인과 합쳐지면 안 되니까.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 풀린 이상 이제 필요는 없었다.
성지호는 가슴팍의 파일을 옆구리쪽으로 끼웠다.
“성지호.”
“예.”
“너는 지금… 이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산혁원의 날카로운 눈이 갑작스럽게 그를 향해왔다.
“아닙니다.”
“날 원망하나?”
“아닙니다.”
“산수유가 망가지니, 복수라도 생각하는 거겠지.”
산혁원의 최측근 중 하나인 성지호는 표정 관리를 했다.
“수천 년을 넘게 지속된 가문의 비원이 결실을 맺는 거다.”
“알고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할 게 아니야. 이 실험의 성공을 위해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 알고 있나? 과거부터 수십만이 넘는 가문원이 이 비원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건 삼대가 멸할지라도 당연히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이 가문은….’
하나같이 광기에 빠져 있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지닌 미치광이 과학자들이 신념을 가지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에게마저도 불합리한 잣대를 내미는 남자.
그리고 그런 처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산수유.
산수유가 망가진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천재의 부류였다.
어릴 적부터 모든 교양과 지식을 탐독하고, 코르너스 가문의 검술에도 뛰어난 재능을 선보였다.
-성지호.
-네 아가씨.
-…이분들 근로 시간을 단축시키는 게 어떨까요?
-네? 무슨 이유이신지.
사업에도 현안을 가졌고.
무엇보다 자신의 사람들을 거두는 상냥함이 빛을 바랬다.
-자기 일에 애정을 가져야 하니까요. 자신의 사람을 만드는 것도 중요해요. 그리고 저도… 그 모범이 되지 않으면.
-근로 시간이랑 그게 무슨 상관인지?
-아이참. 제가 돌아봤을 때 많이 피곤해 보이니까 그렇죠.
성지호도 산수유의 인간적인 면모에 반해 그녀의 비서직이 된 것이었다.
산수유의 호위는 모두 그랬다.
그 역시 그의 부모가 진 막대한 빚과 병원비를 산수유에게 빚졌으니까.
-제 방은 제가 치우도록 할게요. 괜한 인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죠.
무슨 초등학생이 이런 말을 해.
하지만 산수유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 그대로 컸다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큰 자리에 올라 역사의 위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걸 지켜보고 싶었던 마음도 없지는 않았는데.
“아직도 모른다는 얼굴이군.”
“……아닙니다.”
“가봐라.”
산혁원은 알고 있다.
다른 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인물만큼 쓰기 편한 사람은 없었다.
“예.”
성지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거대한 저택의 복도.
창가에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미호 게이 왔냐.”
어려보이는 몸체. 저럼에도 서른 살.
피나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 시대를 풍미하는 검사.
참피.
몇 번 들어도 존나 어처구니없는 이름이다.
“미호가 아니라 지호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유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산수유와 연락이 닿았던 사람.
산수유의 패션 스승이자, 나름대로 산수유를 귀여워하는 인물이다.
말로만 들어서 얼굴은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꼬마애같은 몸이 나이와는 전혀 안맞긴 하지만.
“오늘도입니다.”
“…어휴 이 씹새끼들 그냥 확 뒤엎어버릴까? 야, 성지호. 네가 꿀릴 게 뭐가 있어서 그래?”
“그러지 마십쇼.”
확 뒤엎는다.
무리는 아니지만 산수유에게는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성지호는 정장의 넥타이를 어루만지며 복도를 걸었다.
그 뒤를 참피가 졸졸졸 따라왔다.
“쫄보새끼. 수유가 불쌍하다.”
“저기요 참피님. 저 이제 만날 사람이 있는데… 가시면 안됩니까?”
“산수유 보기 전까진 못 가 인마. 누구 만나러 가는데?”
이시헌.
적어도 그가 아는 사람들중에선, 참피랑 비슷하게 산수유를 제대로 보고 있고 이용하려 하지 않는 사람.
지금 코르너스 가문은 비상이나 다름없다.
“야.”
참피가 짧은 다리로 그의 옆까지 따라잡으며 물었다.
“……슬슬 일 터진다.”
“알아요.”
영원불멸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 플라워에게 접근했다.
목인과 신을 향한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지금까지는 코르너스 가문 힘이 굉장히 세서 괜찮았어. 걔들이랑 싸워서 세계수도 이득이 없었거든. 플라워라도 움직이면 그땐 진짜 목인 사회의 끝이니까.”
“…네.”
“근데 코르너스 가문은 조금씩 선을 넘고 있잖아?”
언제 언론에 일이 터져 세계수가 낙인을 찍을지 모르는 일이다.
세계수가 한 가문을 악인이라 규정하면, 헌터 협회를 포함한 모든 공적인 기관들이 그 가문의 철폐를 위해 군을 움직인다.
“코르너스 가문이 몰살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실험체 장본인인 산수유가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압니다.”
“…일 터지면 백퍼센트 죽는다. 가만히 있을 셈이야?”
참피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성지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아가씨를 도와주려는 겁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참피.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당연하게 말했다.
“애가 착해. 얼마 안 만났는데, 죽어버리면 좀 마음 아프지 않냐. 원래 내좆대로 사는 인생인데 뭐.”
S급 헌터가 그리 말해주니 든든하긴 하다.
“근데 뭐 설마 내가 목숨까지 걸고 이러겠냐. 손절치기 전에 말하러 온 거야. 우리 갤러리 관리하는 사람은 지켜야지.”
“……제발 그런 일은 시키지 마십쇼.”
“지가 좋아서 한다는데 뭔들.”
참피는 산수유 이야기가 나오니 신이 나선 이것저것을 떠들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나름 일을 잘해서 평판이 좋다던가.
애초에 코르너스 가문의 산수유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그를 욕할 깜냥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검술갤 파딱 여신. 산수유.”
“……미치겠네요.”
그래도 좋은 취급을 받는다는 점만큼은 듣기 좋았다.
지호의 개인 집무실까지 따라 들어온 참피는 할 이야기가 동이 났는지, 입맛을 다시다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누구 만나러 가는데?”
“…산수유 친구요.”
“오~”
용건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지만.
참피는 아무런 생각없이 툭 내뱉었다.
“그럼 같이 가지 뭐.”
“…….”
이렇게 말을 해온 이상 막을 도리는 없었다.
똥고집중에서도 왕고집인 참피니까.
“……엄한 말만 안하겠다면요.”
“아무말 안할 게.”
* * * * * * *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나는 미래에서 오지도 않았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세상은, 나를 두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주식은 때때로 변동하고 있고.
어디에서는 나무끼리 영역 다툼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던전이 나타났다는 말이 들린다.
그러나 확실한 건 곧 어떠한 변동이 온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준비한다는 것.
세계의 강자와 맞닥뜨릴 확률이 높고, 지금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아무리 태생이 특이하든 일개 생도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이후론 처음인가요?”
산수유의 비서, 이름은 산수유가 워낙 틀리게 말해서인지 잘 기억이 안난다.
성지호라고 했었나?
“…네 안녕하세요. 그쪽 분은?”
나는 반가운 척 미소를 지으며 은근슬쩍 성지호의 옆자리 여자를 바라봤다.
땅딸보가 앉아 있었다.
“응 나 참피. 반가워, 산수유 친구라며?”
참피.
참피…?
골때리는 이름을 이미 이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산수유 스승님?”
“오 새끼 알고 있었네? 이거 먹어라. 말 편하게 한다?”
참피는 반가워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쓱 던졌다.
원형의 푸른 구슬.
받아서 확인하니 제법 비싼 물품이었다.
▶피나무의 마력 영약(C)
[분류 : 소비]-유서 깊은 피나무에서 제작된 마력 영약 구 슬. 마력을 희소하게 올려줍니다.
마력은 다다익선이다.
나는 영약을 홀랑 입 안에 집어넣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시원하게 막말하세요. 욕 박아도 되고.”
“크크크, 지호보다 백배 낫네.”
초면에 밑도 끝도 없이 굴어서 인상이 미묘했는데.
이런 걸 주고 반말하겠다면야 환영이지.
‘산수유에게 무슨 그딴 검술을 가르치나 했는데.’
참피나무.
이렇게 가만 그녀의 속을 바라보니 상상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마력이 가늠이 가질 않는다. 스스로의 실력을 감출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S급 헌터.
나랑 비슷할까.
무슨 이런 괴물을 데리고 오는 건가, 나랑 붙어보자는 것도 아니고.
참피는 킥킥 웃으며 탁자에 턱을 괴었다.
“강제로 따라오신 분이니 무시하시면 됩니다.”
이어지는 성지호의 말.
“엉엉 편하게 얘기 혀.”
참피가 화답한다.
나는 속으로 어이없음을 느끼면서도 피식 웃었다.
밑도 끝도 없는 막장은 썩 나쁘지 않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죠?”
내 물음에 성지호의 얼굴이 즉시 쓰게 굳었다.
“이전 이야기는 전에 했으니, 본론부터 들어가자면…….”
“산수유랑 떨어지라는 거죠? 저번에 말했던 대로.”
성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너스 가문에 무슨 속사정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산수유가 무감정하다는 것에 이유가 있는 줄은 알고 있지만 그걸 알 정도로 사이가 깊지는 않았으니까.
굳이 내가 남들 가정사에 잘 안 끼어드는 성격이기도 했고.
“어려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성지호의 눈에 나와 산수유는 그저 4개월간 지속된 친구 사이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대학교에서 친구 사이였을 뿐인 것이다.
그것도 인간과 귀족의 신분 차이.
보통이었다면 납득하고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밍숭맹숭한 친구 관계였다면.
“산수유랑 제가 보통 사이는 아니라서.”
“……예?”
내 말에 성지호의 눈이 찌푸려진다.
나는 다급하게 말을 정정했다.
“그런 의미는 아니고. 산수유에게 도움받은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돕고 싶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목숨을 빚진 셈이기도 하니까.
친구 퀘스트를 처음 받았을 때 친구 되자며 다가온 산수유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뒤이은 말에 얼굴이 좀 풀린 성지호.
그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시헌씨가 무언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가문에 관한 일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좀 문제가 심각합니다.”
성지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시헌씨를 부른 건, 단적으로 말해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함입니다.”
“전후사정을 모르면 납득하기 어려워요.”
“……그게.”
극비. 그러니까 절대 외부에는 흘려선 안되는 이야기인지 성지호는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함이다.
내가 노려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 없다. 항상 노려지는 몸인데 뭘 이제와서.
내 말에 옆에 앉아있던 참피가 킥킥 웃었다.
“맞말이네.”
잘한다. 참피.
“말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참피님. 엄한 이야기는 안 하신다고 말하셨을 텐데요.”
참피는 그런 남자의 말에 더 약이 오른 듯 무언가를 터뜨릴랑 말랑 얄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지호를 건드리는 것보단 이 사람을 건드리는 게 더 속사정을 알기 쉽지 않을까.
내가 그녀를 찔러보기도 전에 참피는 알아서 사이다를 터뜨려주었다.
“왜 말 못해?. 얼마 안가서 코르너스 가문 싹 망하고, 관련인들 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아니 하. 약속을 어기시면….”
“괜찮아. 네가 답답해서 그래.”
얼굴을 찡그린 성지호를 두고 참피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노련한 고수의 눈이었다.
“이 정도 힘을 숨긴 놈치고… 입 가벼운 놈은 없거든.”
“예?”
참피의 말에 의문을 표한 성지호.
이번에는 내쪽에서 어이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의 제자라더니…… 괴물은 괴물이네. 지호 게이. 너 얘한테 도움 좀 받아도 되겠다.”
그는 성지호뿐만이 아니라, 내 비밀까지 터뜨리고야 말았다.
“……무슨 소립니까?”
성지호의 당황한 눈이 일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