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214
잔을 기울일 때 (2)
“이게 무슨 꼴이냐.”
저택의 문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았다.
각종 술식으로 짜인 거대한 외벽.
마력을 퍼뜨려 주변 기척을 확인해본다.
‘이야.’
보자마자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티펙트의 흔적이 빨간 점으로 보인다면. 저택을 중심으로 온통 빨간색 투성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고도의 술식으로 짜여져 있는 일류의 마법들.
거기에 고용된 헌터들이 계속해서 주위를 경비하고 있었다.
‘몰래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수백의 마법사가 머리를 맞대어 만든 저 경비 시스템을 뚫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들어가서 산수유 친구인데, 얼굴만 보면 안 되냐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저택의 외벽을 따라 빙빙 돌면서 그 빈틈을 확인해 보았다.
‘마력 간섭도 불가능하게 막아놔서 좌표를 외워도 공간 마법은 못 써.’
찬찬히 벽을 살피며 걷는다.
혹시 걸리면 문제가 될까. 얼굴에 가면도 뒤집어썼다.
그러기를 한참.
벽의 한 구석에 희미한 균열이 발견되었다.
‘구멍?’
휑하니 뚫린 동그라미.
-스스슥.
손으로 문지르자 벽이 바사삭 무너져 내렸다.
손을 떼자 스멀스멀 복구되는 벽.
이 부분의 벽만 마법 처리가 허술하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동그라미를 따라 벽을 무너뜨렸다.
-후두둑!
마치 과자를 때려 부수듯, 벽은 모래처럼 부수어졌고 곧 그곳에는 제법 큼지막한 구멍 하나가 드러났다.
15살의 어린 아이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균열.
조금만 손을 보면 성인의 몸에도 맞을 것 같다.
‘참피.’
그 사람이 들어가면 딱 알맞은 구멍일 것 같은데.
정말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성지호가 참피는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장소에서 등장한다고 했다.
저택에 숨어들 수단 하나는 확보해두었을 것이다.
나는 손에 마력을 둘러, 살살 구멍을 넓혀갔다.
한 번 빈틈이 보인 술식이라 구멍을 넓히는 과정만큼은 어렵지 않았다.
뚫린 구멍 밖에서 그 안을 바라본다.
저택의 뒤편. 인적이 없는 장소.
구멍을 통해 저택을 침입하니 척 보기에도 침입로가 보이는 듯했다.
‘산수유의 방은.’
3층 우측 끝방.
내가 애 술맥이려고 목숨까지 걸고 이렇게 해야 하나.
최대한 기척을 억누른 채 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똑똑똑.
창문에 노크를 세 번.
창틈에 손가락을 끼워놓고 근력만으로 버틴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가면을 벗어 품 안에 넣었다.
밤하늘에 뜬 보름달. 적당히 흩어진 구름.
고급진 저택을 털러 온 도둑처럼 나는 벽에 달라붙어 최대한 주변을 경계했다.
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면서 샛노란 그녀의 머리카락이 창문 바깥으로 휘날린다.
반투명한 실크 잠옷 차림의 산수유가 창문과 가슴에 각각 손을 얹고,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밝은 새벽.
“아.”
산수유의 투명한 눈망울이 달빛에 감싸여 한 번 반짝인다.
병약한 피부는 건강을 잃어 이전보다 희게 변해 있었다.
“시언-”
산수유의 입을 틀어막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우선 창문을 닫는다.
“밖에 누구 있어?”
조용히 속삭이자 고개를 가로젓는 산수유.
문밖에 호위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 정도로 과보호는 아닌 모양인가.
산수유의 입을 막은 손이 촉촉하다. 손을 떼자 산수유가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자세를 고치고 산수유를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혹시 몰라 사온 술과 안주들을 침대 밑에 내려두고, 우선 안색이 나빠 보이는 산수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마가 차디찼다.
“무슨 이런 상태에서 술을 마시려고 해.”
다그치자 쿨쩍, 코를 먹는 산수유.
나른한 듯 반 눈을 뜨고 멀뚱멀뚱 나를 보고 있다.
아파도 아무말 못한다는 게 마음이 좋지 않다.
애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래도 지금 상태에서 술을 마시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콜록. 왔어?”
“그거 물을 때냐 지금. 많이 아파?”
산수유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둘러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이 없어 보였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가슴.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흐르는 땀이 잠옷을 적셔 살 군데군데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속옷조차 입지 않아 드러나는 부위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곳에 눈이 가지는 않았다.
“눈 감아봐.”
“응.”
손에 치유의 권능을 발동시키며 산수유에게 말했다.
그녀는 내 말에 대꾸없이 눈을 감았다. 그대로 손을 이마에 가져다대었다.
-웅웅!
손바닥을 통해서 권능이 빠져나간다.
-쑤우욱!
‘어?’
그것도 급속도로.
두 손으로 잡고 영혼을 쫙쫙 끌어당기는 기분.
눈 깜짝할 새에 녹색의 권능이 산수유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원에서 수십번씩 내 몸을 고쳐가면서 성장한 권능인데도 불구하고. 다르게 말하면 산수유의 신체 상태가 그만큼 엉망이라는 소리였다.
-번쩍.
눈을 감고 있는 산수유의 눈이 번뜩 뜨인다.
“?”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몸 부위부위를 만져본다.
얼굴에는 옅게나마 혈색이 돌고 있었다.
“시언. 뭐 한 거야?”
반면 내 몸은 누가 착정이라도 한 것마냥 축 쳐져 있었다.
‘권능을 갑자기 소모해버리면 이런 부작용이 있구나.’
“안, 아파… 안아파.”
그래도 놀라워하는 산수유의 모습을 보니 또 기분은 좋았다.
“괜찮냐?”
산수유는 자신의 두 볼에 손바닥을 딱 붙이고 피카츄마냥 눈을 깜빡였다.
“시원이가 했어?”
“그래. 나 힘들다.”
“…대단해.”
대단하겠지.
그정도 권능이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단다.
그 권능을 받아갔음에도 불구, 아직까지 몸 상태가 엉망인 산수유가 이상한 거지.
나는 산수유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오른쪽 눈을 살짝 찡그린 산수유는 내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이마는 여전히 차가웠다.
“오늘은 이만 자자. 술 마시기엔 좀 그렇다.”
나는 땀에 절은 이불을 두드렸다.
손이 이불에 닿을 때마다, 향긋한 꽃향기가 자욱히 풍겨졌다.
그러나 산수유는 그런 향기보다도 다른 향기를 먼저 캐치했는지.
몸이 다 낫지 않았음에도 귀신같이 눈을 번뜩였다.
“떡볶이 냄새.”
“야…. 나중에.”
“술 마실래.”
“마셔도 괜찮은 거 맞아?”
안 그래도 실험이….
그 말을 하려던 나는 도중에 입을 닫고 쓴 숨을 내쉬었다.
산수유는 어느새 비닐봉지를 부스럭대며 술병과 떡볶이를 꺼내고 있었다.
떡볶이를 쥔 그 모습이 마치 저녁에 치킨을 사온 아버지를 반기는 아이 같았다.
“그래도 안 돼.”
내가 산수유의 손에서 떡볶이를 빼앗자, 단숨에 산수유의 얼굴에 들뜸이 사라졌다.
풀이 죽은 얼굴이 귀여웠다.
이마에서 손을 내려 볼을 쭉 잡아당기자 찹쌀떡처럼 늘어나는 볼따구.
-탁.
“또 볼 만졌어….”
내 손을 때린 산수유가 늘어난 볼을 만지작거렸다.
퉁명스런 얼굴이다.
“크흐흐. 술 마실 때는 다 끝나고 마시자.”
“다 끝나고? 뭐가?”
“글세. 뭘까.”
비닐봉투를 챙긴 나는 그 안에서 떡볶이만 따로 빼놓고, 술은 도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그대로 침대에 앉아있는 산수유를 내버려두고 창가에 올라탔다.
“아프면 바로 메시지 보내고. 그리고 수유야, 무슨 일 있으면 있다고 말해.”
“무슨 일?”
“어……. 기다려 봐. 음. 조금이라도 이상하고 거슬리는 일 있으면 나한테 상담해.”
“굳이?”
“굳이.”
일이 생기면 성지호가 미리 연락을 해줄테지만, 그 전에 산수유에게 먼저 연락을 받는 편이 빨랐다.
“알았어?”
“…알았어.”
잔을 기울일 때.
머지않아 왔으면 좋겠다.
그냥 마시고 싶다고 애를 술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약품 실험이 본격적으로 들어간 지금은 술이 또 무슨 효과를 불러올지 몰랐다.
“시언이 이상해.”
그래도 애 성격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긍정적인 부분이다.
나는 창가 밑으로 몸을 내던지기 전, 수유에게 말했다.
“그럼 내일 보자.”
산수유는 눈을 깜빡이다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 * * * * * * * *
“아가씨.”
성지호가 고개를 숙여 어린 산수유의 귀에 속삭인다.
“아가씨?”
-번뜩!
두 번 부르면 번뜩 뜨이는 눈.
아이같은 얼굴에도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비볐다.
“…비서님 오셨어요?”
입 밖으로 밝은 감정이 스며든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천사같은 흰 잠옷. 아기자기한 손발.
“슬슬 일어나셔야합니다.”
“오늘… 이상하게 늦잠을 잤네요. 금방 준비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산수유는 성지호가 방을 나간 때에 맞춰, 씻은 다음 입기 힘든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고. 거울에 대고 목에 손을 얹고 발성 연습을 했다.
“아아. 아! 아~ 큼큼. 됐다.”
어린 아이용 검을 허리에 차고 목을 한 번 푼뒤. 문을 열었다.
“식사하러 가시죠.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성지호가 그녀의 등 뒤에 따라붙고.
산수유는 고풍스런 걸음걸이로 한 발자국씩, 식당을 향해 걸어나갔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았다.
걸음에 맞춰 살랑이는 황금색의 머리카락.
두 발자국마다 세워진 화분과 항아리에는, 그녀의 이름을 상징하듯 샛노란 조화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를 지나치는 모두가 산수유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기풍. 인산인해에도 뚜렷한 존재감.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황금의 빛.
-또각, 또각.
걸음 한 번 한 번에.
방 안의 진동이 침묵 속에 크게 울려 퍼진다.
어깨를 활짝 펴고 식당 앞에 서자, 비서가 그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끼이이익.
“안녕하세요 아버지.”
“그래.”
산혁원은 굳은 얼굴로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품을 떠난지 오래였다.
산수유는 다른 사촌 가족들의 옆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그런 그녀의 앞에 있는 음식은.
“……?”
새빨간 국물에 절여진 흰색 덩어리의 무언가.
사각 어묵이 잔뜩 들어가 있고 치즈가 그 위에 화룡점정을 찍은 그 음식.
산수유의 눈이 껌뻑였다.
-쏘옥.
포크를 찍어 떡을 입 안에 집어 넣자 몸이 반응한다.
-쫄깃.
멈출 수 없는 맛이다.
-쏘옥, 쏘옥.
맵쫀맛.
-쫄깃쫄깃.
현실에는 있지도 않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아가씨.”
당황한 듯한 성지호가 산수유에게 말을 했다.
들리지 않는 말이다. 산수유는 말없이 떡볶이에만 집중했다.
떡볶이. 떡볶이…. 내 삶의 풍요. 아찔한 매콤함이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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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번뜩.
눈을 뜬 산수유가 멍하니 눈을 꿈뻑였다.
“…떡볶이.”
“예? 떡볶이요?”
산수유는 얼굴에 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얼굴이 부어서, 이전보다 훨씬 말랑말랑해진 볼을 어루만졌다.
이게 무슨 꿈이었지.
오래 전의 일을 잠시 떠올린 것 같기도 한데.
떡볶이에 모든 게 묻혀버리고 말았다.
“…미호?”
“지호입니다.”
“시호.”
“지호라구요.”
코끝을 아릿하게 스치는 떡볶이 향기.
산수유는 고개를 돌려 그 향을 쫒았다.
협탁 위에 빈 떡볶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아가씨 제가 야식은 하지 마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뜩이나 몸도 안 좋으신데.”
졸린 눈으로 어제 일을 되새기자, 산수유의 머릿속에 이시헌의 얼굴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몸이 이전보다 가벼웠다.
전에는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는데.
성지호는 아리송하게 산수유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아무튼 준비하시죠.”
“……응?”
숲지기 선발전.
“이제 가셔야합니다.”
오늘이 당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