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576
소메이요시노 (14)
동굴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사람은 요시노의 성을 버린 사쿠의 언니, 하쿠였다.
“…언니?”
놀람 반. 불안 반의 눈초리로 하쿠를 흘긴다.
하쿠는 손에 쥔 두루마리를 던져서 되받으며 온갖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양옆에는 플라워의 정예한 수하가 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내 동생 왔어?”
다정한 하쿠의 태도.
“왜…. 언니가 여기에 있어요? 대체….”
기겁한 사쿠가 말을 절었다.
짙게 착색된 그녀의 다색 동공이 흔들린다.
“피….”
사쿠의 동공에 비친 것은, 정령술사의 흰소복 위에 까무잡잡하게 드러난 진득한 혈흔.
하쿠의 옷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가족의 피가 묻어 있었다.
-두근.
황당함도 잠시, 사쿠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해나갔다.
아찔한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자, 참지 못하고 바깥의 일을 물을 때까지 뜨거운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쳤다.
“언니…. 부모님은요.”
“응?”
“아,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떻게 했어요?”
“에이, 사쿠. 3년 만에 만났는데, 굳이 그런 인간들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어?”
곁의 두 남자가 무기를 꺼내 흉흉한 투기를 피운다. 사쿠는 이를 악 물었다. 어느 쪽이든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알짜배기 강자.
그보다 압권인 것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종류였다.
플라워의 마력.
그 특유의 진득하고 역겨운 마력 냄새가 사쿠의 비강을 자극하자, 그녀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대답해! 어떻게 여기 왔는지!!”
분개한 사쿠의 몸에서 토끼 정령이 튕겨져나간다. 몸을 뒤덮은 토끼의 털이 가라앉았다.
깨진 평정심. 이윽고 이어진 하쿠의 대답에 사쿠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죽였어. 전부.”
가족을 죽였다.
-파앗!
사쿠의 분홍색 마력이 온 주변을 감싼다.
그녀의 치골에서 꼬리 하나가 살랑거리며 튀어나왔다.
【 정령화 】
요시노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비전.
사쿠의 머리가 산발처럼 흩날리며, 정령과 맞닿은 그녀의 마력이 보다 색다른 형질로 뒤바뀌었다.
요력. 더 밝고 연분홍색을 띤 기운이 폭주한다.
정령에게 가장 친숙한 형태이자, 어떤 형질보다도 부드럽고, 빈틈을 노리기 쉬운 힘.
쩍- 갈라진 손톱을 들이밀며 사쿠가 전진했다.
-번쩍!
노란색 휘광으로 단단히 빛나는 손톱이 순식간에 하쿠의 목을 향해 내밀어졌다.
목덜미를 찢으려는 간계한 여우의 몸동작.
하쿠의 오른편에 서 있던 용병이 사쿠의 움직임을 따라 검을 휘두르자, 그녀의 몸이 그의 검격에 튕겨 나갔다.
-꽈앙!
공격을 받은 사쿠가 뒤로 물러서 사족 보행의 자세를 취했다.
용병이 그녀를 보며 피식댔다.
“별거 아닌데요?”
“방심하지 마, 좆같아도 내 동생이야. 뒤지기 싫으면 절대 빈틈을 내주지 마.”
“예, 알겠습니다.”
숲지기 선발전에서도 끝내 결판을 내지 못했다.
하쿠는 사쿠를 바라보며 두루마리를 품에 넣었다.
소메이 요시노. 두루마리의 정체를 확인한 사쿠가 하쿠를 향해 더욱 거칠게 부르짖었다.
“왜, 왜…. 왜 그랬어!!”
하쿠는 여동생의 절규에 차가운 비소를 짓더니, 품에서 깨진 여우 가면을 꺼내 이마에 얹었다.
“다 이 가문이 자초한 일이야. 넌 모르겠지. 넌 항상 머리가 꽃밭이라 문제거든.”
“…언니.”
사쿠의 몸에 뒤덮인 마력이 폭주하듯 양발에 얽혔다. 마력의 색은 엷은 벚꽃.
이를 가만 지켜보던 하쿠가 입을 열었다.
“예쁜 색이네. 사쿠. 항상 부러웠어.”
연분홍 형질의 마력은 ‘인연’과 ‘관계’에 대한 열망으로 발현된다.
그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혹은 누군가에 대한 병적인 욕망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혹자는 말한다. 분홍색 마력을 다루는 이들의 성격은 두 부류. 정신병자거나 지나치게 순수하다.
사쿠는 후자, 하쿠의 경우는 그 전자였다.
온갖 인연에 배신당해, 되려 그 관계를 증오해버리기까지 한 여성.
상처받았기에 더욱 인연을 열망하고, 이를 연료로 자신의 신체를 불타오르게끔 한다.
-화르륵.
하쿠의 몸에서 사쿠와 비슷한 수준의 마력이 퍼져나왔다.
“요시노 가문의 비전. 이 두루마리를 찾고 사용하려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 빌어먹을 영감 새끼. 이딴 곳에 힘이 있긴 무슨 힘이 있다고.”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돌아가면 플라워한테 엉덩이를 흔들어야 되니까.”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건데… 왜. 왜!! 왜!!”
“큭큭.”
웃은 하쿠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잔뜩 약이 오른 표정으로, 살벌하게 뇌까리길.
“내가 이 꼴이 될 때까지, 헤벌레 웃기만한 새끼가.”
하쿠는 소복을 올려 팔을 드러냈다.
팔에 걸려 있던 희미한 마법을 처리하니, 그녀의 몸에 찍혀 있던 처참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몇 번이고 새겨졌다 사라진 노예 각인들. 세계수가 일부 목인을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힘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네 잘못은 없어. 사쿠. 근데, 씨발 아무리 생각해도 배알이 꼴리더라고. 네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눈을 볼 때 마다. 밤낮에 비위가 상해셔 미쳐버릴 것 같았어.”
“……무슨.”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
아랫배를 드러내자 보이는 많은 폭력의 자흔.
“너보다 잠재력이 낮다는 이유로, 너네 아버지한테 속아서 팔려갔지. 공양이니 뭐니…. 빠져나오지 못했으면 난 지금까지 노리개로 살다가 뒤졌겠지.”
점차 목소리가 커져가는 하쿠, 분통이 터진 듯 눈이 충혈되고 입에 침이 튀었다.
“왜 나만 씨발, 어? 왜 나냐고. 까짓 애새끼들 좆질 몇 번 하면 태어나는데, 왜 난데?”
사쿠의 기세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거짓말. 거짓-”
이 꼴을 보고도 거짓말이라고.
-그러니까 네 머리는 꽃밭이라니까.
이전에 한 하쿠의 말이 부정하는 사쿠를 관통했다.
“정말이라면, 왜 말을 하지 않았어요. 대화로….”
“대화로 됐으면. 전쟁은 왜 나고 사람은 왜 죽을까 아가야?”
“……그렇다고 가족을.”
“너한테나 가족이었지.”
하쿠의 품에서 암기가 번쩍거렸다.
손을 벌벌 떠는 사쿠는 아직도 분노와 후회에 찌든 표정이었고, 하쿠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거세게 찼다.
“이미 늦었어.”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하쿠는 사쿠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하쿠의 검이 사쿠를 노린다. 사쿠는 멈칫한 고개를 들어올렸다.
사쿠의 눈에는 여전히 독기가 흐르고 있었다.
“허.”
기가 찬 하쿠가 헛웃음을 내뱉는다. 사쿠는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하쿠가 해온 일들이 모두 포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숲지기 선발전을 망가트리고 많은 사망자를 내세웠고.
이제는 국가의 존립을 위한 의식에도 침입했다.
‘정말.’
입이 몇 개라도 부족하지 않지만.
하쿠의 말대로 돌이킬 수 없었다.
서로를 의식해 돌아본다. 사쿠는 아래에서, 하쿠는 위에서.
이미 멀리 돌아온 두 사람의 행동은 동시에 일어났다.
-파바밧!
사쿠의 손톱과 하쿠의 암기가 서로의 목을 노렸다.
*****
정령화의 테스트를 얼추 마친 순간.
-쿵!
꽤 먼 곳으로부터 기척이 느껴진다.
가장 먼저 느껴진 마력의 주인은 사쿠, 다른 한 명은 잘 모르겠다. 군데군데 다른 사람들의 마력도 섞여 있는 것 같았고.
기척을 느끼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으니, 땀을 닦던 베니스가 내 뺨을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야? 왜 멍때리고 있어?”
“아니…. 누가 싸우고 있길래.”
마물이 아닐까 싶었지만, 내가 느낀 건 이 근방의 마물이 구사할 수 없는 종류의 힘이었다.
“아마도 여기 들어온 침입자와 사쿠가 맞부딪힌 게 아닐까 해.”
“사쿠…? 아아. 좋은 아이지.”
“알아?”
베니스는 씁쓸하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마을에 자주 왔어. 님프와 함께 놀면서 커갔지. 그걸 몇 년이나 봤는지 몰라.”
“기억하나봐?”
“이름은 얼추…. 몇십 년만에 보는 특이한 아이였거든.”
베니스는 그리 말하며 자신이 보았던 사쿠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을에 가끔 일어나던 요시노 가문의 약탈 행위.
님프들의 각종 재화를 취하거나, ‘밖’에서 가치 있는 물건들을 모두 빼앗아갔다고.
약탈이 있던 날에, 님프 마을에는 언제나 곡소리가 떠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으아아아앙! 다 빼앗겼스미다앙….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재현되는 님프의 울음소리.
본질은 그것보다 더 참혹했겠지만, 님프의 성격이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연상이 되었다.
“사쿠는 마을에 도움을 주었어. 어린 마음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때부터 어렴풋이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짐작한 모양이야.”
“사쿠가 약탈을 멈추게 했다?”
“뭔가를 했는지 몰라도, 그 여자가 나이를 좀 먹은 뒤엔 약탈이 덜했지. 그래도 아예 없애지 못한 걸 보니, 가문원들이 몰래몰래 한 모양이야.”
“그런가.”
던전 약탈에 사쿠가 가담했다는 내 예전 생각이 부정되었다.
‘굳이 그런 짓을?’
안 그래도 허덕이는 경제판에 약탈 행위를 멈출 필요가 있었을까.
내 방식대로였다면 절대 그만두는 일은 없었으리라.
“…오호? 피해자가 떡하니 앞에 서 있는데 잘도 그런 생각을?”
내 생각을 읽은 베니스가 징그럽게 웃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럼 너였으면 어떻게 했을 건데?”
“좀 그렇지만, 뭐. 나도 그렇게 했겠지. 근데 그 아이는 질서가 확고한 선함을 가지고 있어.”
“본 게 꽤 많나 보네.”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야.”
“그래서. 그 애가 잘못될 수도 있는데 무슨 생각 안 들어?”
나는 격전이 일어나는 곳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베니스에게 물었다.
나보다 먼저 이 던전에 들어와 특이한 성정을 보여주었던 사쿠.
하지만 내가 아는 베니스라면….
“관심 없어.”
그래. 내가 예상했던대로의 답변이다.
정말 사쿠가 죽든 몹쓸 짓을 당하든 상관 없다는 어투였다.
“기억하는 이유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고…. 내 친구는 너뿐이니까.”
“그래?”
“아 그런데…. 이러면 말이 좀 달라지네.”
갑자기 말을 바꾸더니, 이마를 긁으며 깊게 고민한 베니스.
베니스는 나를 흘기더니 풋 웃음을 터뜨리며 혼자만 킥킥댔다.
“왜 그래.”
“너, 암컷을 범하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했잖나.”
그렇지.
“그럼 여기서 범할 수 있는 암컷 하나가 줄어버리는 건 좀 아깝지 않나?”
놀라운 발언.
사쿠가 위험하다는 말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신다.
나는 베니스의 말을 듣자마자 어이가 없어 그녀를 돌아보았고, 베니스는 여전히 킥킥대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내 허리를 찔러댔다.
“왜? 어차피 할 거잖아?”
팔꿈치로 톡톡.
내 속을 빤히 읽는다는 게, 좋은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묘하다.
“그리고…. 힘도 한 번 시험해볼 때가 됐지.”
베니스는 내게 가슴을 밀착한 후, 정령화의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못미더운 얼굴로 베니스를 받아들이기 위해 몸의 마력을 정돈했다.
최대한 그녀에게 자극이 가지 않게, 나와 베니스의 마력의 파동을 맞춘다는 느낌으로.
“이거. 해.”
베니스는 내게 주먹을 불쑥 내밀어 친구의 증표를 요구했다.
나는 가볍게 주먹을 뻗어 거기에 맞댔다.
정령화에 필요한 유대, 그 트리거로 사용할만한 동작 중 하나.
인간과 정령의 신체가 연결됨과 동시에, 베니스의 신체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우우우웅!
정령의 기감이 더해져 오감이 확 퍼져나간다.
온 세상을 눈에 담아, 마력을 조금의 손실도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된 완벽한 형태의 정령화.
하지만 약간은 불안한 형태인지라 집중이 필요하지만, 엘레오노르와 루시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 마기를 더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아직 정돈되지 않아 사용할 수는 없어도, 조금만 더 다루면 익숙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