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ncy Exit to Freedom RAW novel - Chapter 3
2]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기 너머로 거실 끝 쪽에 위치한 침실에서 거친 욕설이 새어나왔다. 침실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커다란 침대는 검은색 시트로 뒤덮여 있었고 살짝 열려있는 창문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흔들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한줄기 빛 외에 거의 모든 빛을 차단한 어두운 침대위에는 구리 빛 건장한 몸의 사내가 누워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칼 아래로 남자다운 목과 단단한 어깨에 각종 운동과 훈련으로 단련된 근육질 팔이 굵은 굴곡을 이루고 있었다. 짙은 갈색 등 근육을 따라 군살 없이 매끈한 허리는 겨우 엉덩이만 가리고 있는 검은색 시트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지혁은 거실 탁자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욕설을 내뱉었다. 지난밤 팀원들과 마신 술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커다란 침대에 엎드려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전화벨 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비상사태나 군의 호출이라면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울려대는 저 전화는 분명 사적인 전화가 분명했다.
지혁은 무거운 머리를 슬쩍 들어 올려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07시 52분……..
빌어먹을. 아직 새벽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원들과 거의 새벽녘까지 술을 마신 지혁에게는 오전 8시는 아직 새벽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끊어지는 전화벨 소리에 지혁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신음과 함께 미소를 떠올렸다.
흠………..
그리고는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릉. 따르릉.
지혁은 이를 갈며 거친 동작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만약 시간을 다투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최소한 3,4일은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지혁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아직도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전화기가 있는 탁자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전화기를 잡고 귀에 가져다대는 찰나 탁자의 모서리에 정강이를 세게 부딪친 지혁은 저도 모르게 험한 욕설을 내뱉었다.
“윽……….빌어먹을………………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상대방이 날카로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포기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전화를 받은 것에 놀란 것이리라.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지혁 소령님 되시나요?]
지혁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최근에는 만나는 여자도 없었다. 가장 최근에 만났던 여자와 헤어진 것이 6개월 전이었다. 어젯밤 팀원들과의 술자리에 여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네. 제가 정지혁 소령입니다.”
지혁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끈질기게 전화를 하던 여자가 막상 자신이 전화를 받자 머뭇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전화를 잘못 걸었거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젯밤 술집에서 만났던 여자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빨리 이 빌어먹을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일찍 전화를 했나보군요. 전 유정현이라고 합니다.]여자가 자신을 이름을 밝히고 말이 없었다. 이름만 밝히면 지혁이 알기라도 하는 듯이…….하지만 지혁은 유정현이라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분명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젠장. 정말 어젯밤 술자리에 여자가 있었던가?……….기억에 있든 없는 지금은 그 어떤 여자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요?”
지혁은 다시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아……..제 이름을 듣지 못했나요?]그녀가 다소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후………이거 봐요. 용건만 빨리 말해요!”
드디어 지혁의 짜증이 폭발했다. 빨리 이놈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침대로 기어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유철웅 준장님이 제 아버지세요.]!!……
이런 젠장. 이제야 생각이 났다. 휴가를 가기 전 부대에서 준장이 그를 불러 자신의 딸과 만나보라고 했던 일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때 분명 딸의 이름이 정현이라고 했었다.
끙. 이 여자는 꼭 이런 아침에 전화를 해야 한단 말인가……..그것도 술에서 깨지도 못해 괴로운 상태에………타이밍도 기가 막힌 여자였다.
정현은 약속 장소와 시간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뒤에서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었다.
“나온다고 하더냐?”
“네.”
“옷이며 제대로 입고 나가. 그 놈 마음에 꼭 들게 꾸미고 나가란 말이다.”
그리고는 아주 마음에 안든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하나로 묶어 올린 머리를 쳐다보았다.
“머리 꼴이 그게 뭐냐? 네 나이 또래 처녀들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네 눈엔 보이지도 않느냐?…..쯧쯧. 여보!”
그리고는 대뜸 어머니를 불렀다.
“네.”
어머니가 급히 주방에서 뛰쳐나오자 아버지의 명령이 이어졌다.
“저 아이 미장원에 데려가서 제대로 꾸며서 내보내. 옷도 새로 사 입히고. 만약 일을 제대로 못해내면 둘 다 가만 안 둘 줄 알아!”
벌떡 일어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현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명령은 이 집안에선 곧 법이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현의 팔을 잡고 주방으로 데려갔다.
“이 일을 어쩌니? 안 그래도 정후 일이 들통날까봐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인데 이 일을 어쩌면 좋으니?”
“차라리 잘 됐어요. 3개월 후면 정후가 제대하고 미국으로 갈 거예요. 정후가 미국으로 무사히 들어갈 때까지 아버지 관심을 제게 집중시키면 돼요.”
어머니가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정현에게 속삭였다.
“정후가 제대하는 걸 알면 네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만 해도 무섭구나.”
“모르게 해야죠. 아시잖아요. 정후는 군대 체질이 아니에요. 그 애더러 평생 군에서 생활하라면………”
정현은 이를 악물었다. 3살 아래 동생인 정후는 약한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강한 아들을 바라는 아버지의 눈 밖에 났고 항상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들어 자란 아이였다. 그런 정후에게 직업군인의 길을 가라는 것은 그 아이에겐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차라리 정현 자신이 군인이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가 군인이 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다. 길은 하나뿐이었다. 정후가 바라는 대로 미국으로 유학을 감으로써 아버지를 피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려면 우선 지금 현재 군 복무를 하고 있는 정후가 제대하는 3개월 후까지 아버지가 모르게 해야 했다.
정지혁 소령……..그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그 소령에게 집착하고 있었고 자신과 그 소령을 맺어주기 위해 모든 신경이 거기에 가있었다. 우선 그 소령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결혼을 추진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정후가 제대를 하고 미국으로 떠나면 된다. 그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우선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정후를 빼내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정현은 미장원 안에 있는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의 등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머리는 적당한 웨이브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평소에 하지 않던 연한 화장으로 눈은 더욱 커보였다. 오똑 솟은 콧날과 약간 큰 듯싶은 입술은 탐스러워보였다.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대조적으로 약간 붉은 듯한 입술은 그녀의 정숙한 이미지답지 않게 유일하게 섹시한 부분이었다.
오전에 백화점에서 사 입은 하얀색 소매 없는 원피스는 그녀의 몸과 어우러져 부드러운 굴곡을 만들고 있었다. 약간 깊은 듯 느껴지는 네크라인으로 그녀의 긴 목이 드러나 보였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치마 단은 그녀의 날씬한 허벅지 라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머. 정말 근사해요. 이렇게 꾸며 놓으니 정말 예쁘네요.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다니세요.”
미장원의 미용사가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으며 정현을 아름답다하고 있었다. 정현은 살짝 미소를 띠우고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미장원을 나섰다.
이제 8월의 막바지인데도 여전히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정현은 약속 장소로 가기위해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정현은 아담한 커피숍을 들어서며 재빨리 내부를 훑어보았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커피숍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두 테이블 정도를 빼고는 거의 비어있었고 군인 복장을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휴가라고 했으니 군복을 입고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시한번 실내를 훑어보는 정현에게 종업원이 다가왔다.
“누구 찾으십니까?”
“네. 아니……..아직 안 오신 것 같아요. 조용한 자리 있나요?”
“네. 이쪽으로 오시죠.”
정현이 안내되어 간 곳은 정원이 보이는 창가의 조용한 자리였다.
“손님 한 분이 더 오실 거예요. 차는 그때 시킬게요.”
“네.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떠나자 정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 한곳에 마련된 작은 분수가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잘 할 수 있을까………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연애라고는 해본 적도 없었고 혹시 남자를 만나는 장면이 아버지에게 들킬까 두려워 대학 시절 그 흔한 미팅 한 번도 해보지 못했었다. 그런 것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남자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특히 군인이라면 치가 떨렸다.
정현은 정후를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군대를 갈 나이가 되어 영장을 받았을 때도 과연 동생이 군 생활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잘 이겨 내주었고 이제는 제대 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아버지만 아니라면……아버지는 아들인 정후가 군인의 길을 가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정후에게 군대에 남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만약 정후가 조만간 제대를 할 것이고 제대 후 바로 미국으로 갈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정현도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가족조차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가족은 자신의 탐욕스러운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소품 정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계획이 있었다. 정후를 무사히 미국에 있는 외삼촌댁으로 보내고 나면 정현도 이 나라를 떠날 것이다.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었다. 그동안 작은 회사에 근무하며 꾸준히 모은 돈도 어느 정도 모였고 아시아 쪽으로 가면 물가가 그리 비싸지 않을 테니 한동안 여행하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행복은 누리고 싶었다. 단지……..어머니가 걸릴 뿐이었다. 어머니는 도무지 아버지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현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아직 아버지를 떠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큰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신이 떠나면 아버지가 무슨 끔찍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두려움. 혹 그 불똥이 자식들에 미칠까 하는 두려움. 결국 이 나라에선 아버지의 손길을 완전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정현도 두려웠다. 그녀가 떠나려 작정했더라면 벌써 떠났을 것이다. 이 한국 땅에서 아버지를 피할 수 없다면 외국으로라도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남아있었던 것은 동생 정후 때문이었다. 정후를 먼저 보내기 전에는 자신도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겁 많은 어머니도……….
정현은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커피숍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 5분정도 남아있었다. 아마도 정확한 시간에 저 문을 열고 들어서리라……….군인들은 모두 똑같으니까……..그놈의 시간 엄수……..
그로부터 정확히 5분후인 오후 2시 정각에 커피숍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정현은 입구를 들어서는 그를 보았다.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군인이었다. 정현은 알 수 있었다. 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정현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디서든지 군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동안 정현은 그를 관찰했다. 우선. 키가 컸다. 짧은 머리칼과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생각보다 잘 생긴 얼굴이었다. 아니 아주 잘 생긴 얼굴이었다. 적당히 몸에 붙는 반팔 티셔츠 아래로 넓은 어깨와 단단해 보이는 팔 근육이 보였고 아마도 짐작컨대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일 것이다. 해군 UDT/SEAL 대원은 군살이 붙을 시간이 없었다. 엄청나게 혹독한 훈련으로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영화 속에 나오는 람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인간 병기라고도 불리는 저 군인들은 인간이 얼마나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낼 수 있는지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다.
남자 종업원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곁에 다가선 종업원이 왠지 주눅 들어 보이자 정현은 살짝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정현은 순간 뒷머리가 쭈뼛 서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현은 그때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를 이용하는 그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음을………저 남자의 눈빛은 상대의 깊은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는 예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정현은 자신이 그의 눈빛 아래 발가벗겨져 머릿속까지 훤히 내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정확한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유정현씨 되십니까?”
“…………..네.”
“정 지혁입니다.”
그가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만히 물고만 있었다.
“괜찮아요. 피우세요.”
그녀의 말에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 굵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말을 깨달은 듯 물고 있던 담배를 다시 담배 갑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니. 실내에선 피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다가온 종업원에게 차가운 커피를 주문했다.
“전 따뜻한 커피로 주세요.”
그리고 두 사람 앞에 커피가 놓일 때까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드디어 종업원이 커피를 내려놓고 멀어지자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정현은 그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계획은 실패였다. 그를 유혹해 자신에게 빠져들게 하고 아버지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던 그녀의 계획이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는 내가 원해서 나온 자리가 아닙니다. 차만 마시고 일어나는 걸로 합시다.”
예상했던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정현은 앞이 캄캄해졌다. 당장 이 사람과 헤어진 후 자신에게 쏟아질 아버지의 비난이 두려웠다. 자신만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어머니도 괴롭힘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정현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붙잡을 수 있는 방법도 몰랐다. 처음으로 남자를 전혀 모르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지혁은 맞은편의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몹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듯 보였다.
이 자리에 의미를 두기라도 했단 말인가……….?
정현은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을 훑어보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선 물러서야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했다. 첫눈에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자신의 자만심이 우스울 뿐이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네? 아니. 아니에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어요.”
“……..그럼 일어나죠.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전 좀 있다 갈게요. 시내에 나온 김에 서점에도 들러야하고……….”
지혁은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더 큰 관심은 자제했다. 엮이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비록 첫 느낌이 싫지 않은 여자라 할지라도……아니 상당히 끌리는 여자였다. 차분한 모습 뒤로 신비로운 느낌도 있었고 거기다 그녀의 입술은………남자로서의 욕구를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았다.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이 여자와 엮인다는 것은 자신이 유철웅 준장의 그늘에 들어간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혁은 단호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커피숍의 문을 나섰다.
탁.
정현은 자신의 방에서 아버지가 현관을 들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하루 종일 아버지에게 대답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껏 고민했지만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있었던 그대로를 말할 수는 없었다. 정현은 자신의 방문을 열고나서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고 있었다.
“정현이 들어왔나?”
“네………”
정현은 어머니의 대답 소리를 들으며 거실로 나갔다.
“다녀오셨어요?”
정현은 자신의 숙인 머리 위로 아버지의 매서운 눈빛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됐어?”
“………..”
“왜 말을 못해? 일을 그르친 게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고 있었다. 정현은 이를 악물었다. 낮의 일을 그대로 말한다면 오늘밤 자신과 어머니가 온전히 내일 아침을 맞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입이 붙었어? 왜 말을 못해!”
“잘됐어요.”
아버지의 급한 닦달에 정현은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이 방법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거짓말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로는 그가 오늘부터 4일간의 휴가를 가진다고 했으니 앞으로 3일간의 시간이 있었다. 그 안에 다른 방법이 생길 것이다.
“잘됐어? 그가 널 마음에 들어 하더냐?”
“네………서로 호감을 가졌어요.”
“그래?”
정현의 대답에 아버지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를 향한 목소리마저 부드러워졌다.
“언제 다시 만나기로 했냐?”
“아……….전화하기로 했어요.”
“…….그래?”
“네………”
정현은 떨리는 손끝을 감추기 위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음…….앞으로가 중요해. 만만한 놈이 아니니 잘해. 어쨌든 이 일에 내 미래가 달렸다는 걸 명심해. 널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그만한 신랑감이 어디 흔한 줄 알아?”
한동안 정현을 탐색하던 아버지가 협박하듯 말하고 돌아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정현은 자신의 방을 서성이며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3일뿐이었다. 그의 휴가가 끝나고 부대로 출근을 하게 되면 아버지와 마주칠 테고 그녀의 거짓말이 들통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두려웠다. 그가 자신에게 쉽게 이용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아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그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그나마 평화 비슷한 것이라도 누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깨질 것이다. 아버지의 분노가 어디로 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그녀를 그와 결혼시킬 마음으로 그녀에게 직장까지 그만두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직장은 어차피 그녀도 그만둘 생각이었다. 정후의 미국행이 성공하면 어차피 자신도 떠날 생각이었으니 직장은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후…………”
정현은 활짝 열린 창문으로 골목의 가로등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선가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해군인 아버지를 따라 바다가 있는 곳으로만 옮겨 다녔다. 그것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현은 바다가 좋았다. 언젠가 바다를 떠나게 된다면………아마도 많이 그리워할 것이다.
한동안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던 정현은 무언가 결심한 듯 창틀을 꼭 쥐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정후와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할 것이다. 그것이 설사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될지라도……….
*
“네. 어머니. 압니다. 어젯밤에 형 전화 받았습니다. 네. 형수는 건강하다더군요……..훗. 딸이라 더 좋아하던데요.”
딩동.
지혁은 현관 벨 소리에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고개를 현관으로 돌렸다.
“누가 온 것 같습니다. 제가 다시 전화 드리죠.”
지혁은 전화를 끊고 손에 들고 있던 티셔츠를 입으며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
지혁은 눈앞에 서있는 그녀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부탁이 있어요.”
다짜고짜 던지는 그녀의 말에 지혁의 눈빛이 더욱 의문을 띠었다. 순간 그가 현관문을 활짝 열어둔 채 뒤돌아 들어가 버렸다. 정현은 잠시 당황한 듯 서있다 곧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원룸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주방과 그 끝은 작은 베란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넓은 거실이 펼쳐졌다. 한쪽 벽면은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으로 밝은 햇살이 가득 들어와 넓은 거실을 더욱 환하게 비쳐주고 있었다.
“앉아.”
가스렌지 위에 작은 주전자를 올려놓고 컵을 꺼내는 그가 어느새 그녀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가 나이도 4살이나 더 많으니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까짓 말 놓는 것이 무엇이 대수라고………
그가 커피가 든 머그잔을 두잔 가지고 와 그녀의 앞에 한잔을 내려놓고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부탁이 뭐지?”
“………….”
“…………….용건이 없으면…”
그리고는 그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정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붙잡았다.
“잠깐……….후………….”
그녀가 다시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자 지혁은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당분간만……..저와 만나주세요……..”
정현은 힘겹게 말을 꺼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계속하라는 눈짓을 해보였다.
“사정이 있어요. 자세한 내막은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저와 사귀는 척 해주세요.”
“……………..아버지 때문인가?”
“…………….네.”
“나와의 결혼을 강요하시나?”
“……………….네.”
그녀는 결국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본인이 의사를 명확히 밝히는데 억지로 시킬 수는 없지.”
정현은 다시 아랫입술을 베어 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라면 할 수 있어요. 당신이 안 되면 다른 후보라도 데려와서 저와 결혼시키려 하시겠죠.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목표는 당신이고 난 아버지께 반항할 수 없어요.”
“왜?”
“!………….무슨 뜻이죠?”
“왜 반항할 수 없냐고? 나이가 몇 살이지? 내가 듣기론 스물여섯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현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다 큰 여자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사 표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는 그의 비난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당신이 뭘 안다고…….당신이 나에 대해……..우리 가족에 대해 뭘 알아?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당신이 짐작이나 할 수 있는 줄 알아?
정현은 당장 소리치고 싶었다. 느물거리며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그에게 악다구니라도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였다.
“아버지를 몰라서 그래요………”
“………….얼마 동안?”
“3개월 정도……….”
“그 후엔 어쩔 셈이지?”
“계획이 있어요.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그가 의문의 빛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사귀는 척 해 달라?”
“당신이 나를 만나주는 대신……..당신이 원하는 게 있다면…….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뭐든 주겠어요.”
정현은 굳은 의지를 담으며 ‘뭐든’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뭐든?”
그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네.”
“그 ‘뭐든’에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도 포함되는 건가?”
“………………네.”
정현은 이대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그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자신의 제안 자체도 그런 의미였고……….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치욕스러웠다.
“쿡………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의 비웃음에도 정현은 물러설 수 없었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정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그에게 증거를 보여야했다. 자신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에게 알려야했다.
그의 옆에 앉은 정현은 그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히 앉아있는 그가 두려웠다.
정현은 단단한 그의 어깨에 떨리는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그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정현은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부드러웠다. 그리고 따뜻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입술이 자신의 심장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녀의 얼어있던 심장이 녹기 시작하고 있었다. 힘들게 살아왔던 지난 시간으로 인해 차가워진 그녀의 피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순간 정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제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현도 남녀 간의 사이에 벌어지는 일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는 달랐다. 단지 입술을 가져다대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10살 난 아이라도 알 것이다. 그가 무슨 반응이라도 보여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에게 손끝 하나도 대지 않는 걸 보면………
정현은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서 입술을 떼고 용기를 내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그의 눈빛이 짙어져 있었다. 분명히 좀 전의 여유로웠던 눈빛은 사라지고 무언가……..다른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해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무언가는 알 수 있었다. 작은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었다. 그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확실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가 보이는 이런 작은 반응이라도 정현은 붙잡고 싶었다.
정현이 다시 용기를 그러모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만하지.”
그리고는 거친 동작으로 거실 끝으로 걸어가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그 끝에 방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정현은 말없이 앉아있었다. 고개를 돌려 환한 햇살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부신 햇살에 두 눈을 살며시 감아버렸다. 그녀의 볼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느님……..제게 용기를 주세요……..
그의 인기척에 정현은 황급히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고 있었다.
“나와.”
그가 현관으로 곧장 나가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
“집에 데려다 줄 테니 나와.”
!!
“아버지께 말할 건가요?”
정현의 겁에 질린 목소리에 지혁의 표정은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아직은.”
그리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정현은 황급히 일어나 그를 따라 나섰다.
그는 정면을 응시한 채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집을 나온 뒤로 정현의 집이 있는 위치를 묻는 말 외에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정현도 덩달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차가 그녀의 집 앞 골목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가 몸을 비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들어가.”
“!………..?”
“네 제안에 대한 답은 이틀 후에 주지.”
“그 말은 생각해 보겠다는 건가요?”
“……..그래. 네 제안이 변하지 않는다면……..”
“전 변하지 않아요.”
“훗. 궁금하군. 그 결심이 어느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지…….작은 입맞춤 하나에도 벌벌 떠는 순진한 여자가…….”
그의 마지막 말에 정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생각만큼 순진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녀의 화난 얼굴에 그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래?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점부터 다시 확인해야겠군.”
정현은 그의 미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굳었던 얼굴이 부드러워지며 입가에 미소를 짓자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혹시 그의 귀에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까 두려워 정현은 얼른 그의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열린 창문 사이로 그녀를 뚫어질듯 쳐다보더니 그대로 차를 출발시켜 멀어져갔다.
정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 쯤 가만히 손을 올려 자신의 입술을 쓸어보았다. 아직도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지혁은 백미러를 통해 우두커니 서있는 정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깊은 밤 청담동 고급 주택가에는 간혹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조용한 주택가 골목으로 검은색 스타렉스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와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차문이 스르르 열리며 온통 검은색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그중 한명이 주위를 재빠르게 확인하고는 곧장 맞은편 벽면을 타고 담장을 뛰어넘었다. 뒤이어 다른 한명도 눈 깜박할 사이도 없이 담장 저편으로 사라졌다.
스타렉스의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두 남자가 담장 너머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손목시계의 타이머를 작동시켰다.
정확히 10분 후 다시 두 남자가 거의 동시에 담장을 넘어 사뿐히 땅으로 내려섰다. 다시한번 주위를 확인한 뒤 빠른 동작으로 기다리고 있던 차량에 올라타자 검은색 스타렉스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골목을 벗어났다.
*
지혁은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베란다로 나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종일 그녀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처음 만날 때부터 말썽이 예상되던 여자였다. 이틀 전 그녀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지혁은 그녀를 떨쳐버릴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단 한번의 만남으로 끝낼 여자였다. 비록 첫 만남에서 강한 끌림을 느꼈고 헤어지고 난 후에도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성가심도 있었지만 다시 보지 않을 여자였기에 단호하게 떨쳐버릴 생각이었다.
이틀 전 자신에게 찾아와 부탁을 하며 뭐든 주겠다던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에 닿던 그녀의 말캉한 젖가슴의 부드러움도……….젠장. 그녀의 단순한 입맞춤에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 했다. 그녀에게 단순한 입맞춤에도 벌벌 떤다고 놀렸던가…….? 훗……..정작 처음 입맞춤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벌벌 떨었던 사람은 바로 지혁 자신이었다………
지혁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이 생소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앞으로 자신을 아주 성가시게 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겠다면 자신도 그녀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와의 관계는 그것이 다였다. 다른 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때 탁자 위의 휴대폰이 진동하자 지혁은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음………알았다. 전 대원 복귀해.”
지혁은 끊어진 휴대폰을 꼭 쥐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그렇게 쉬운 곳에 둘리가 없었다. 지혁은 눈길을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라도 오려는지 공기 중에 습기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