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ncy Exit to Freedom RAW novel - Chapter 5
5]
정현은 회사에 사표를 낸지 2주 만에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마쳤다. 회사 앞에서 지혁과 마주쳤던 김과장은 다시 그녀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고 그녀의 사표를 아무 말 없이 수리해주었다.
“유정현씨. 자. 내 잔 한잔 받아.”
“네. 이대리님.”
출근 마지막 날인 오늘 정현을 위해 마련된 회식 장소는 고기 굽는 소리와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혹시 시집가는 거 아냐?”
“……아니에요.”
“아유….이대리님은…..시집가는데 왜 말도 안하겠어요? 축의금 받기 위해서라도 소문내지.”
“유정현씨가 최은영씨 같은 줄 알아? 그러니까 시집가는 건 아니지?”
이대리가 그래도 혹시 하는 눈빛으로 정현을 쳐다보았다.
“네. 아니에요.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 그래도 많이 섭섭하다. 그래도 2년이나 한솥밥 먹었는데…….”
항상 자신에게 잘해주던 이대리가 섭섭해 하자 정현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에잇. 정말. 이대리님은 왜 또 분위기 잡고 그래요? 가는 사람 마음 좀 편하게 해주면 안돼요?”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은영씨가 또 이대리를 타박하자 이대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난 하도 섭섭해서……하하하. 어쨌든 어딜 가든 잘 먹고 잘살아.”
“네. 감사합니다. 이대리님.”
“정현씨. 내 잔도 한잔 받지.”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있던 김과장이 술병을 들고 그녀의 잔을 채워주었다.
“나가더라도 결혼하게 되면 청첩장 보내.”
“네. 과장님………”
그의 뼈있는 말에 정현은 별다른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지혁 소령을 만났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일 것이다.
“어. 언니 휴대폰 울리는 거 아니에요?”
어딘가에서 들리는 희미한 벨소리에 은영이 정현을 바라보았다. 정현은 자신의 가방 속에서 들리는 벨소리를 확인하고 휴대폰의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어디지?]
“!……..회사 회식이에요.”
근 열흘 만의 연락이었다. 그날 그렇게 정현의 집 앞에서 헤어진 후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조용한 아버지로 인해 그가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멀었나?] “글쎄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거기가 어디지?] “…………”
[유정현.] “……….시청 쪽이에요.”
[데리러갈 테니 기다려.] “도착해서 전화하면 내가 나갈게요.”
[………30분이면 도착할 거야.]
정현은 끊어진 전화를 잠시 멍하니 들고 있다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죄송해요.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 주인공이 가면 어떡해?”
“정말 죄송해요. 일간 회사로 들를게요.”
“그래. 할 수 없지. 조심해서 가.”
“네. 과장님. 죄송합니다.”
정현은 섭섭해 하는 직원들을 뒤로한 채 고기 집을 빠져나오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언니!”
“은영씨………”
“언니…………이대로 헤어지려니 섭섭해요.”
학창시절에서조차 사귀지 못했던 친구를 사회에 나와서는 만들려는 노력조차 해본 적이 없는 정현이었다. 하지만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항상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은영에게는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었었다. 아마도 낯선 회사생활에 적응하고 즐겁게 다닐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이 밝고 명랑한 은영 때문일지도 몰랐다.
“언니 내 전화번호 알고 있죠?”
“응.”
“시간 내서 전화해요. 심심하면 내 원룸에 놀러오고요. 알았죠?”
“그래. 고마워. 은영씨.”
“너무 섭섭해요. 난 외동딸이라 정현언니를 진짜 친언니처럼 따랐는데…….”
“나도 그랬어. 나도 은영씨 여동생처럼 좋아했어.”
“정말요? 언닌 별로 감정표현을 안 해서 몰랐어요. 내가 가끔 전화해도 되죠?”
“그럼. 꼭 전화해.”
“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땅끝 마을 해남의 작은 어촌마을에서 이곳 진해로 올라와 회사에 입사한 은영이었다. 그런 은영이 영업부의 특성상 남자가 대다수인 틈새에서 정현을 언니처럼 따르며 좋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정현은 섭섭해 하는 은영을 뒤로하고 시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청 앞으로 향했다.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밤공기에 제법 차가움이 느껴졌다. 정현은 밤이 깊어 인적이 드문 시청 앞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들과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어디론가 급히 빠른 걸음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자신의 지난 세월이 생각이 났다. 다른 여느 여학생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했던 그녀였다. 아버지에게 기합을 받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고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오직 집과 학교만을 오가며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다니는 동안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버지에게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사는 꿈을 꾸고 상상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상상만 하던 자유로운 삶을 현실의 삶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다른 어떤 것도 그녀의 삶에 끼어들 여지 같은 것은 없었다. 다른 평범한 여자들이 고민하는 진로문제, 남자문제, 결혼문제…….그런 것들은 정현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못했다. 그녀의 오직 하나 관심사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왜 벌써 나와 있어?”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저음에 정현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어올렸다.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지 군복이 아닌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풍기는 강한 이미지는 그가 어쩔 수 없는 군인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좀 일찍 나왔어요.”
정현은 옆자리에 앉는 지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현은 보지 않아도 그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그 눈빛 앞에서는 거짓이란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어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지.”
얼마 동안 그렇게 앉아있던 그가 일어서자 그를 따라 일어서던 정현은 오랜 시간 동안 한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있어서인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거렸다. 지혁이 곧바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정현은 저도 모르게 그의 티셔츠를 움켜쥐며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 이 시끄러운 심장의 진동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정현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도 그의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강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연 그에게 무서운 것이 있을까? 자신은 이 세상에 무서운 것 천지인데 저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놔줘요……..”
그녀의 작은 속삭임에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아담한 커피숍이었다. 겨우 10여개의 테이블이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정현은 맞은편의 그가 담배를 하나 꺼내 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종업원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여기는 금연입니다.”
“피는 거 아니에요.”
“네?”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빼려하자 정현이 그를 대신해 종업원을 바라보았다.
“그냥 물고만 있는 거예요. 실내에선 안 펴요.”
“아. 네……..죄송합니다. 뭘로 드릴까요?”
종업원의 물음에 두 사람 모두 커피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떠나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느꼈지만 정현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왜 그를 위해 변호를 했는지…….
“좋군……..”
그의 단 한마디 말에 정현은 궁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따뜻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궁금한 눈빛에도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왜 피지도 않을 담배를 물고 있어요?”
“훗. 글쎄. 그냥 습관이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종업원이 그들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커피를 놓고 멀어져갔다. 정현은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 따뜻함을 온몸으로 흘려보냈다.
“추운가?”
“아뇨. 그냥 따뜻한 걸 좋아해요.”
정현은 항상 추위를 느꼈다. 태양빛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그녀의 가슴속은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여린 동생과 겁 많은 어머니를 감싸고 항상 그들을 돌봐야했던 정현은 아버지로 인한 공포와 혼자 싸워야했다. 그런 그녀의 가슴은 항상 차가운 긴장으로 따뜻한 평화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부드러운 커피 향을 즐기며 말없이 앉아있었다.
“………..왜 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글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하는군. 나도 몰라.”
“………?”
그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정현은 2층 자신의 방에서 어두운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가을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이제 곧 정후가 제대할 것이다.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 달만 더 있으면……….
정지혁 소령……..그는 그녀의 미래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결코 포함시킬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고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그는 군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군인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군인에게 안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아는 군인은 그저 명령만 내리고 주위 사람들을 억압하고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완벽주의자였다.
정현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정지혁 소령은 그저 자신과 동생 정후가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그 뿐이어야 했다………..
“올해 림팩 훈련에서 완전히 미국 네이비씰팀이 우리 UDT/SEAL팀에 감탄하는 것 보셨죠? 지들이 보기에도 예전의 우리가 아니라는 거죠. 그쪽 팀과 우리가 거의 맞먹는 수준으로 향상되니까 이젠 거들먹거리지도 못하고…..큭큭큭…….전 그 허버트 중사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니까요. 해상침투작전 때 지네 팀이 가장 먼저 성공할거라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섬에 침투해서 보니 우리 팀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놀라서 입을 쩍 벌리더라니까요. 하하하하”
연병장 한가운데에는 15m의 인공장벽이 세워져있었고 좀 더 뒤로는 온통 진흙으로 덮인 바닥위로 거의 사람 하나가 누워 지나갈 수 있는 높이에 거친 철사 줄이 얼기설기 얽혀있었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늘진 곳에 앉아있던 이강석 중사가 바로 옆의 강상사에게 흥분되어 침을 튀기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뭐가 그리 우스운지 연신 웃어대는 이강석 중사를 바라보며 강석환 상사가 핀잔을 주었다.
“넌 도대체 그 얘기를 몇 번째 하는 거냐? 이젠 지겹다. 지겨워.”
“상사님은 지겹습니까? 전 해도 해도 재밌는데. 그 허버트 중사 놈 훈련이 모두 끝나고 해산할 때 어깨가 축 쳐져서는……킥킥킥…..”
“아! 이제 그만 좀 해!”
“왜 그래? 상사. 나둬. 예전부터 그 허버트 중사가 은근히 이중사를 무시해서 그래. 하긴 그놈은 한국 UDT/SEAL 전체를 무시하는 놈이지만…….”
“그렇죠? 중위님. 그 놈이 저희를 좀 무시했습니까? 이번에 그놈 코를 아주 납작하게 뭉갰으니 다신 우릴 우습게 보는 일 없을 겁니다.”
“그래. 그건 나도 그렇더라. 미국 놈들이 우릴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최중위가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자 더욱 신이 난 팀의 막내 이강석 중사가 강상사를 돌아보았다.
“거보세요. 중위님도 그렇게 느끼셨다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죽을 때까지 올해 림팩 훈련을 잊지 말아라.”
“그럼요. 전 절대 못 잊습니다. 내 생애 가장 통쾌한 순간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잊습니까?”
“뭐가? 뭐가 그렇게 통쾌했는데?”
점심식사 후 연병장 한쪽 그늘에서 쉬고 있는 그들에게로 다가오던 박상원 중위가 이 중사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이중사가 또 올해 하와이에서 있었던 림팩 훈련 얘기 하는 겁니다. 매번 듣던 얘기죠. 뭐.”
강상사의 설명에 박중위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누구 소령님 본 사람 없나?”
“아까 식당에서 대령님하고 함께 식사하시는 걸 봤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박중위는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내려온 훈련 지침에 페쇄회로 잠수법 훈련강화 내용 읽었나?”
“네. 적진 침투 시 꼭 필요한 잠수법이지만 위험이 커서 훈련에 임하기 전에 철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혁은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는 대령을 마주보았다.
“그래. 아무래도 실제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교육시간을 따로 만들어야겠지? 고도로 숙련된 대원들 몇 명 뽑아서 조별 교육을 시켜야겠어.”
“네. 그렇습니다.”
“참. 돌아오는 주말에 해양공원에서 열리는 가을 음악회 티켓 받았나?”
“아니.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참가하지 않으면 중장님 화내실걸?”
“훗……….”
“매번 중장님께서 소령 참석시키라고 나한테만 소리 지르시는데 이번에도 명령 어기면 내 입장이 뭐가 되나? 비밀작전 수행 때나 돼야 한 번씩 얼굴 보여준다고 매정한 놈이라고 매번 길길이 뛰시잖아? 중장님 성격 몰라?”
지혁은 대령의 말에 입가에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해군작전사령관인 여병순 중장은 걸죽한 부산 사투리를 거칠게 내뱉으며 급한 성정으로 유명한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속이 깊고 부하들을 생각하고 챙기는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분이었다. 몇 번인가 비상시 비밀 작전 수행 때마다 중장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던 적이 있는 지혁은 얼마돼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중장을 존경하게 되었고 중장 또한 자신이 굳게 신뢰하는 대원들의 리스트에 지혁을 포함시키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 후부터 가끔 사적으로 집으로 저녁초대를 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군들만의 작은 축제가 있을 때면 지혁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의지를 대령을 통해 전달하고는 했다. 언젠가 들은 말로는 해군작전사령부 직할로 비밀특수부대를 만들 예정인데 그 부대에 지혁이 강력히 거론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계획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의 진행이 이루어졌는지는 지혁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제도 내방으로 전화 하셔서는 그 뭐야? ‘쥑이뿐다’ 라고 했던가? 하여튼 ‘문디’니 그런 말 있잖나? 중장님 잘 쓰시는 말. 그런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몇 번이고 하시면서 소령 이번 행사에 참석시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시더라고. 휴………난 중장님 전화만 받고나면 귀가 멍멍해서…………..어쨌든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해! 자넨 젊은 사람이 만나는 여자도 없나? 도대체 여자들은 뭐하는 거야? 이렇게 멋진 소령을 가만 놔두다니……..”
지혁은 대령의 마지막 말에 정현을 떠올렸다. 중장의 명령도 명령이지만 해양공원의 아름다운 야경에 그녀가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섬에 지어진 해양공원은 낮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로 밤에는 그 아름다운 색색의 불빛으로 환상적인 야경이 눈부실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참석하겠습니다.”
“응? 그래? 웬일인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다니……작년까지만 해도 딱 잘라 거절해서 날 그렇게 난감하게 하더니. 혹시 온다하고 안 오는 것 아냐?”
“한번 약속한 것은 지킵니다.”
대령은 지혁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오겠다면 오는 것일 것이다. 자신이 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인물이었다.
지혁은 대답을 하며 식당입구를 들어서는 박상원 중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보고 사항이라도 있는지 자신에게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필승!”
“음? 아. 중위. 식사했나?”
“네. 대령님.”
“그래. 뭐 보고 사항 있나?”
“아닙니다. 소령님을 면회 온 사람이 있습니다.”
지혁은 박중위의 말에 눈썹을 슬쩍 밀어올렸다.
“면회?”
“네. 그렇습니다.”
“그럼 어서 가봐.”
대령이 식판을 들고 일어서자 지혁도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멀어지는 대령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중위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유정현이라는 아가씨랍니다.”
“!…………….알았다.”
박중위는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서는 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정현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아주 미세하게 밝아지는 그의 표정은 평소 어떤 충격에도 변하지 않는 무표정한 그 모습이 아니었다.
박상원 중위는 대장이 사라진 식당 출입문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평소 자신보다 세 살 나이가 적은 대장을 지켜보며 느낀 점은 너무 군 위주의 생활만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여자를 만나도 깊이 만나는 것 같지 않았고 군 외의 생활에는 무관심해 보였다. 그런 그가 여자 때문에 아주 약하긴 하지만 표정이 부드러워 졌다는 것은 그 여자가 그에게 중요한 의미라는 뜻일 것이다. 어쨌든 그건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정현은 면회소 입구에 서있는 녹색 베레모를 쓰고 이상한 모양의 기관단총을 든 채 정 자세로 서있는 군인을 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대략 20살 초반쯤 되었을까?……..누가 봐도 어린 티가 나는 것이 군복무를 하고 있는 동생 정후 생각이 났다. 동생도 아마 지금쯤 저렇게 군기가 잔뜩 든 채 늠름한 모습을 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가 살짝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자 정현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그를 향해 한발 다가섰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음료 캔 두 개 중 한 개를 내밀었다.
“저…….이거 하나 드세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지금 먹지 못하면 나중에라도 드세요. 제 동생도 군복무 중이라 동생이 생각나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처음 확고한 목소리로 거절하던 그가 정현이 동생 이야기를 꺼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그녀를 보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아직 한낮에는 햇볕이 뜨거운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
“그럼 이건 여기에 둘게요. 혹시 여유가 되면 드세요. 아직 차가워서 지금 드시면 좋은데……”
정현은 음료수를 그가 서있는 바로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감사인사를 하는 그를 바라보며 정현도 마주 웃어주었다.
지혁은 위병소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 보초를 서고 있는 위병에게 웃고 있는 정현을 보았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지혁은 걸음을 멈추었다. 결 고은 머리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등 뒤로 늘어져 있었고 검은색 카디건 아래로 옅은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한 낯의 햇살만큼이나 눈부셨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맑은 웃음이 여기서도 한눈에 보였다.
갑자기 지혁은 더욱 걸음을 빨리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필승!”
보초를 서던 위병이 소령을 보고 경례를 붙이고 그와 동시에 정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여긴 웬일이지?”
정현은 자신을 보지도 않고 질문을 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소령이 나타나자마자 다시 잔뜩 긴장하며 서있는 위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 심부름 왔다가………”
정현은 그가 갑자기 위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자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근무교대까지 얼마나 남았나?”
“30분정도 남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군. 자넨 위병소를 방문하는 모든 면회객들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나?”
“!!…….아닙니다!”
정현은 그가 위병에게 나무라듯 질문을 하자 깜짝 놀라며 그의 팔을 잡았다.
“아니. 그건 제가 말을 시켜서 그래요. 제가 여기 음료수를………”
“어떤 방문객이 와도 부대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부대는 특수전투 부대다. 그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마라.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정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신의 말은 무시하고 그저 자기가 본 사실만을 가지고 가엾은 위병을 나무라는 그가 너무 미웠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면회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정현은 서있는 위병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정현은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팔을 잡은 채 그대로 면회소 건물 밖 벤치 쪽으로 자신을 데려가자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제 잘못이었다고요. 그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었어요. 자기 임무를 다하느라 제가 주는 음료수도 받지 않았다고요!”
정현은 너무나 화가 났다. 아버지의 명령만 아니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령이 연락할 때까지 계속 기다리지만 말고 한번쯤은 음료수라도 들고 찾아가라는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는데………..
“아무 남자한테나 그렇게 웃음이 헤픈가?”
“!!………뭐라고요?”
“분명히 난 다른 남자는 안 된다고 했어.”
“!!………….기막혀서!”
정현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화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홱 돌려세웠다.
“젠장. 지금 뭐하는 거야?!”
그가 으르렁 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자 정현은 그의 단단한 가슴을 세게 밀었다.
“이거 놔요. 돌아가겠어요. 당신과 더 이상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내 말 똑똑히 들어. 저기 앞의 건물이 면회소야. 내가 부대로 돌아가서 일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면회소 안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 알았나? 만일 내가 돌아왔을 때 네가 없다면…….그 다음일은 나도 책임 못 진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예요?”
“아니. 공손히 부탁하는 거야.”
그가 조소하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비꼬듯 말하자 정현은 너무나 화가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훗. 그렇군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부탁하는 방식은 그런가 보죠? 네. 좋아요. 기다리죠. 어차피 당신 앞에서 난 비굴한 약자 아닌가요?”
그에게 그가 했던 대로 똑같은 말투로 쏘아붙이고는 정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그가 말한 면회소의 문을 밀고 들어가 버렸다.
지혁은 면회소 안으로 사라지는 정현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그녀에게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병에게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빌어먹게도 그 햇병아리 위병을 상대로 질투를 했던 것이 분명했다. 미칠 듯이 화가 나는 이 감정은 확실히 질투라는 감정이었다.
지혁은 자신의 차에 올라타면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입술을 꼭 다물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는 폼이 몹시 화가 난 듯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지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자의 화를 풀어주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분명 그가 잘못한 일이니 사과는 해야 했다.
지혁은 그녀의 집 근처 놀이터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시동을 끄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
“후…….좋아. 빌어먹을. 내가 잘못했다.”
“…………..”
“유정현!”
“……….당신 사과 같은 거 받고 싶지 않아요. 우린 어차피 거래로 만난 관계고 당신이 왜 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제안을 받아들여준 당신한테 고마워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오늘같이 불쑥 당신을 만나러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정현은 그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 알았지만 그를 외면한 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의 비웃는 눈빛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못 견디게 화가 났다.
“질투였다.”
정현은 밑도 끝도 없이 내뱉는 그의 한마디 말에 놀라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
“네가 그 위병에게 웃고 있는 걸 보는 순간 질투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요……..당신과 난……….우린 정말은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그런데……..”
그녀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질투라니. 그런 건 정말로 사귀는 연인들에게나 생기는 감정이 아닌가………? 우린 그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사귀는 척 하는 가짜 연인이었다.
“언젠가 물었었지? 왜 네 제안을 받아들였냐고. 오늘 그 해답을 찾았다.”
정현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이어질 그의 말이 두려웠다. 그의 말을 듣고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것 같아 두려웠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미칠 것같이 두려웠다.
“집에 가야겠어요. 너무 늦었어요.”
그리고 정현은 급히 차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얼마못가 그의 손에 의해 걸음이 멈춰지고 몸이 돌려지고 말았다.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놀이터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지혁은 그녀의 팔을 잡은 채 그녀의 숙인 머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 여자의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녀의 눈이 젖어있었다. 왠지 겁먹어 보이는 그녀의 눈빛에 자신의 심장에 작은 균열이 일고 있었다. 지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하기 시작했다.
정현은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부드럽게 자신의 입술을 쓸며 달래는 듯한 손짓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의 군복을 꽉 움켜쥐며 그의 부드러움이 주는 느낌에 힘껏 저항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온 힘을 다해 밀어버리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에게 안주하려는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한동안 뒤에서 들려오던 그의 발자국 소리도 그녀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멈추었다. 정현은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마당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미친 짓이었다. 그에게 끌리다니…….아버지보다 더한 강인함으로 무장된 그에게 끌리다니……..정현은 그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