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104
마염의 황제 104화
신성연맹의 아네스와 그녀의 동료들도 격전 속에서 눈을 감았다. 폐허와도 같던 이데아로크의 성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이터와 엘리스뿐이었다. 체력을 회복한 이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폐허 속에서 동료들의 시체를 찾는 일이었다. 완전히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린 시체는 찾아낼 수 없었지만 그 외에는 다행히 그 폭발 속에서도 시체만은 무사히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레이센을 묻고 아네스와 그녀의 일행들을 묻었다. 하지만 이터는 로자리아의 시체만은 태우지 않았다. 그녀의 시체를 곱게 가루로 만든 이터는 그것을 가지고 알센데린으로 돌아갔다.
마녀, 로자리아의 고향이자 이터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그곳으로.
“너무해. 다 타버렸잖아. 이터 씨, 여기가 정말 로자리아 씨의 집인가요?”
불타버린 로자리아의 탑에 도착한 엘리스의 첫마디였다. 타다 남은 벽돌과 가재도구들, 박살나 흩어진 실험도구들로 엉망인 로자리아의 탑은 이전에 정말 사람이 살았던 곳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타버린 흔적을 바라보는 이터의 눈은 그리운 것을 발견한 사람의 눈이 되어 있었다.
“응. 여기야.”
이 숲이다.
이 숲에서 자신은 처음으로 로자리아를 만났다.
-꼬마야, 그럼 이름이 뭐니?
-본명은 모른다고 했고… 아, 그래. 먹는 걸 좋아하니까 ‘이터(Eater)’라고 부르면? 이터… 이터 어때? 좋지?
환청처럼 들려오는 로자리아의 목소리.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만들어졌던 추억들이 그림책처럼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마을 영주의 집에서 가즈 블레이드를 훔쳐 달아났던 일. 알제라드의 흑마법사들과 자객들과 치열했던 싸움. 루시펠과 그의 부하, 루시펠 나이츠… 이 세상을 파멸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악신, 이데아로크.
정말 꿈만 같은 여행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이 모든 일을 겪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로자리아,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엘리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레이센을, 론을, 소류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터 씨.”
말없이 상념에 빠진 이터를 엘리스가 부드럽게 깨웠다. 그녀가 살며시 이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괴로워하지 말아요. 지나간 일은 이제 주워 담을 수 없는 걸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추억을 잊지 않게 기억해 줘야 하는 거잖아요.”
“응.”
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는 되지 않았다. 로자리아를 잃었지만… 친구들을 잃어버렸지만 지금의 이 가슴 벅찬 기분은 그들을 만났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 느낌도 없었으리라. 이터는 조용히 로자리아의 유해를 탑 주변에 뿌렸다. 시커멓게 타들어간 탑 위로 부서지는 가루들은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을 반기는 듯 하늘거리며 흩어져갔다. 엘리스가 그 가루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로자리아 씨, 엘리스예요. 잘 지내세요? 거기서도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리고 계신 건 아니겠죠?”
푸른 하늘 사이로 가루가 흩어져 나간다. 엘리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살짝 반짝였다.
“덕분에 이터 씨도, 저도 무사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이터 씨를 지켜줘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엘리스.”
짧았던 눈물을 지워버린 엘리스는 어느새 웃는 얼굴을 되찾아 이터를 바라보았다.
“이터 씨는 뭔가 로자리아 씨에게 하실 말 없나요?”
“로자리아에게? 난…….”
로자리아에게 할 말이라니,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당황하는 이터를 짓궂은 얼굴로 보던 엘리스가 그를 탑을 향해 떠밀었다.
“자, 빼지 말고요. 로자리아 씨가 기다리잖아요.”
로자리아의 유해는 바람을 탔는데도 흩어지지 않았다. 엘리스의 말대로 정말 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머뭇거리는 이터의 귓가에 엘리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어서요.”
한참을 망설이던 이터는 마침내 겨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먹었다. 로자리아가 해준 밥… 달고 짜고 싱겁고… 정말 이상한 음식이었다.”
처음 길에서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오직 배가 고프다는 그 사실만 인지되던 그때, 로자리아의 탑에서 얻어먹은 정말 맛없었던 밥.
하지만…….
이터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때 먹었던 밥. 앞으로도 잊지 못할 거야.”
“이터 씨.”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결국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허나, 바람에 흩어지는 로자리아의 육신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사라지는 그들 너머로 로자리아의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가루가 사라지고 그녀의 미소도 사라져 간다. 이터와 엘리스는 로자리아의 육신이 바람에 날려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제부터 이터 씨는 어떻게 할 거죠?”
잠시간의 침묵이 지난 뒤에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말대로였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데아로크를 쓰러뜨리고, 로자리아도 없는 지금 무엇을 할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이터에게 엘리스가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우리 함께 여행 떠나지 않을래요?”
“여행?”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엘데라드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요. 따분하기만 하고… 어릴 때부터 늘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알제라드니, 이데아로크니 끌려 다니기에 바빠서 세상 구경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잖아요? 이터 씨도 그렇죠?”
엘리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로자리아들과 만난 이후로 알제라드와 루시펠 때문에 늘 바쁘게 움직여야 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럼~ 결정! 출발하는 거예요.”
“잠깐. 에, 엘리스.”
그렇게 엘리스의 손에 이끌려 시작된 여행이었다.
일 년의 시간 동안 이터와 엘리스는 크고 작은 마을들을 구경하며 여행했다. 더 이상 누군가와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닌, 기억의 잔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닌 그냥 평화로움을 즐기는 여행.
요 일 년간 정말 즐거웠다.
분수대 앞에서 상념에 젖어 있던 이터를 흥분된 엘리스의 목소리가 깨웠다.
“와아, 이터 씨! 오늘 저녁에 마을에서 간이 무도회가 벌어진대요.”
“간이 무도회? 그게 뭐냐?”
얼굴이 발개진 엘리스는 아직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인간들의 동화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남자와 여자들이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는 거라고 그랬어요.”
“춤? 난 춤 못 추는데.”
“괜찮아요, 저도 못 추는 걸요.”
이터는 짧게 휘청거렸다. 둘 다 춤도 못 추는데 무도회에 가서 뭘 한단 말인가? 엘리스는 히~ 하며 웃었다.
“하지만 한 번 가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터는 머뭇거렸다. 엘리스는 두둑한 금화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직 금화는 많이 남아 있어요. 우리도 무도회 의상 준비해요, 네?”
이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엘리스가 이렇게 매달리기 시작하면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터는 결국 저녁에 무도회 가는 것에 동의했다.
“앙~ 배고프다.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이터 씨도 배고프죠?”
배를 문지르며 장난스럽게 웃는 엘리스. 이터 역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을 안의 음식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억이 없는 이터에게 있어 가족처럼 여기던 친구들의 죽음은 큰 사건이었다. 특히나 로자리아의 죽음은 은연중에 이터의 가슴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슬픔을 떠올릴 정도로.
하지만 엘리스가 곁에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이터의 마음속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조금씩 지워내고 있었다.
이터는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은 엘리스는 점원을 향해 손을 크게 들어 보이며 외쳤다.
“잔뜩 주세요. 우리 엄청 먹거든요~”
엘프면서도 엘리스는 이미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엘리스는 창 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바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축제 때문인지 시끌벅적하네요. 분주하다는 건 이런 뜻이었구나. 음…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지?”
잠시 생각하느라 미간을 좁히던 엘리스는 마침내 적당한 말을 찾아냈다.
“평화. 맞아, 평화로워 보이네요.”
“응.”
이터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들이 웃으면서 축제를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일 년 전의 그 싸움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패했었다면 지금쯤 이 마을도 이데아로크의 마물 군단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유령도시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평화. 그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 이터였다.
그러는 사이, 점원이 음식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손님,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야아~ 나왔다. 잘 먹겠습니다. 이터 씨도 많이 드세요.”
탁자에 놓인 음식 그릇을 보며 엘리스는 군침을 흘렸다. 그녀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음식을 손봐주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그때, 거대한 폭발과 함께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음식점 안은 테이블, 의자,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엘리스도 갑작스러운 지진에 놀라 바닥에 넘어졌다.
“꺄아악!”
그녀가 막 쓰러지기 직전에 이터가 그녀를 안아 세웠다.
“이, 이터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 일 없이 멀쩡하던 마을에 갑자기 폭발음이라니?
박살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엉망진창으로 박살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축제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처참하게 찢겨져나간 시체로 변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 답을 찾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폐허의 바로 앞에서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삼두용이 새빨간 불길을 토하며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폭발에 놀라 밖으로 뛰어나온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괴, 괴물이다!”
“캬아아아!”
세 개의 머리 중 하나가 붉은 불길을 내뿜었다. 그 불길에 휩싸인 마을사람들은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버렸다.
“사, 살려줘!”
“도망쳐!”
혼란에 빠져서 도망치는 마을사람들. 두 번째 머리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마을사람들의 몸을 꽁꽁 얼려버렸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얼음 덩어리가 되어버린 마을사람들을 세 번째 머리가 후려쳐 부숴버렸다. 마을의 거리가 잘게 부서진 얼음 덩어리들로 가득 찼다.
“이터 씨!”
당황한 엘리스가 이터를 불렀다. 하지만 이터는 이미 왼손에 불꽃을 맺은 채 삼두용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지워라, 불.”
이터를 발견한 삼두용이 냉기를 쏘아낸다. 하지만 이터의 폭염은 그보다 더 강했다. 불타오르는 이터의 손이 냉기를 쏘아내는 머리를 으깨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