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89
마염의 황제 089화
“이터 씨가 이겼어요.”
“제길! 베가스가…….”
전투를 처음부터 지켜보던 쉐드가 울분을 터트렸다.
“저 꼬마 놈이 잘도 베가스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공격을 퍼부으려는 쉐드와 올가. 하지만 그들을 막는 손이 있었다. 이조르네였다.
“뭘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뭐야, 이조르네. 이런 상황에서 넌 화도 안…….”
말을 잇던 쉐드가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뜬 이조르네의 눈 너머로 살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분노가 쉐드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늘 여유로움을 잃지 않던 그녀가 베가스의 죽음 앞에서 분노하고 있었다.
“이, 이조르네…….”
촤악.
이조르네는 부채를 펼치며 걸음을 내딛었다. 활활 타오르는 플레어 브레이져를 옆에 둔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베가스와는 충분히 즐겼겠지? 지금부터는 우리 차례. 우리는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을 테니까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루시펠 나이츠의 상대는 이터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단숨에 이터의 곁으로 다가온 로자리아 일행이 이터와 함께 섰다.
“웃기지 마. 언제까지 너희들의 장단에 놀아날 것 같아?”
“이번에는 우리도 함께 싸울 거라고요.”
흥.
이조르네는 부채를 불태우며 코웃음을 쳤다.
“누구든 상관없어.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줄 테니.”
쉐드는 새로운 소환수를 불러내기 위한 진을 준비했다. 올가는 날카로운 손톱을 반짝이며 으르렁거렸다. 이터 일행도 각자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를 했다.
당장 격돌해도 이상하지 않을 팽팽한 긴장감. 그것을 깨뜨린 것은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만. 거기까지 해둬.]“이 목소리는…….”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은 이조르네들도, 이터 일행도 잘 아는 이의 것이었다.
“루시펠님?”
이조르네의 눈이 흔들렸다. 그만두라니. 지금 루시펠 님께서는 이터와 싸우는 것을 멈추라고 말씀하시는 건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루시펠님. 베가스는 녀석들에게 당해버렸습니다. 저희들에게 갚아줄 기회를…….”
[싫어.]루시펠은 이조르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끊어버렸다. 귀찮음이 가득 묻어난 그의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지루해하고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듯했다.
[베가스에게 기회를 줬던 걸로 충분해. 이 이상 싸워봤자 결과는 뻔하잖아. 너희들은 이터를 못 이겨. 그게 뻔히 보이는데도 나보고 계속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은 아니겠지?]마지막 목소리에는 추궁이 섞여 있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을 깨달은 이조르네는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스럽습니다.”
루시펠은 끝을 명했다.
그렇다면 그의 수하인 루시펠 나이츠가 이 자리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불꽃에 휘감긴 이조르네는 커다란 폭음과 함께 사라졌고 그 뒤를 쉐드와 올가가 뒤따랐다. 폐허가 된 콜로세움에는 이터 일행과 넋이 나간 마을사람들, 그리고 루시펠에게로 향하는 문만이 남았다.
루시펠의 목소리가 이터를 향했다.
[수고했어, 이터. 그리고 나머지도. 그 문을 따라 들어오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을 거다. 기다리기 지루해. 서둘러서 오라고.]끼이이.
마치 루시펠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굳게 닫힌 철문이 열렸다. 철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지독한 어둠뿐.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물러설 자리도 없어.’
수많은 시간과 사건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돌아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앞을 향해 전진할 뿐.
그렇게 이터 일행이 문을 향해 나아가려 할 때였다.
[참, 그 전에.]콰아앙!
잊어버린 게 생각났다는 듯한 루시펠의 목소리. 그것과 함께 콜로세움의 객석에서 요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마을사람들이 터져나가는 소리였다.
“마, 마을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장난스럽고도 짓궂은 악동의 웃음소리. 루시펠이 웃으며 말했다.
[게임은 끝났어. 필요 없어진 소품들은 정리하는 게 당연하잖아?]퍼엉. 펑. 퍼어엉!
폭발은 계속되었다. 멈출 방법은 역시 없었다. 이터 일행은 모든 사람들이 먼지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폭발은 최후의 사람이 산산이 터져나간 뒤에야 비로써 멈추었다. 엘리스는 황량한 주위를 바라보며 얼굴을 흐렸다. 가루가 된 사람들의 파편이 바람을 타고 부스러지며 사라져갔다.
“소품이라니… 너무해.”
로자리아도 입술을 깨물었다.
‘녀석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건가.’
데미지 판정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저 유희였을 뿐이다. 루시펠은 처음부터 일행이 루시펠 나이츠를 꺾었다고 해도 마을사람들을 살려둘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시펠이 당한 것을 분해하는 일행들 사이로 이터가 걸음을 옮겼다.
“가자. 너무 오래 지체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로자리아는 돌아서는 이터에게 물었다.
“이터… 설마 넌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어느 정도는. 루시펠에게 있어 마을사람들의 목숨은 말 그대로 게임도구였을 뿐이니까.”
짧게 고개를 끄덕인 이터는 철문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펠은 그런 녀석이야.”
“가, 같이 가요, 이터 씨.”
엘리스가 허겁지겁 이터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그런 이터의 뒷모습을 보며 로자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아이다운 귀여운 맛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는 놈들뿐이라니까.”
그레이센이 그녀의 곁에서 한마디 했다.
“너한테도 여자다운 맛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으니 피차일…….”
퍼억!
말도 끝나기 전에 그레이센의 얼굴을 후려치는 로자리아. 바닥에 고꾸라지는 그레이센의 뒤로 새하얗게 질린 론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이마에 튀어나온 힘줄을 가라앉히며 로자리아는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어둠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로자리아는 긴장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이 뒤에서는 무슨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신들은, 이터는 루시펠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답을 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건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로자리아는 잘 알았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칠흑과 같은 통로는 그렇게 이터와 일행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Chapter 4-3. 루시펠과 이터
어둠의 통로를 지나는 일행의 여행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앞서 나간 이터의 뒤를 허겁지겁 따르던 로자리아 일행은 저 앞 통로에 선 이터를 보고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이터, 왜 그래? 안…….”
말을 잇던 로자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통로 너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둠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너는…….”
“여, 오랜만이군. …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찍 다시 만났나?”
쉐드가 중절모를 눌러쓰며 키득거렸다. 이터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글쎄, 뭘 하는 걸까.”
쉐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잘 모르겠는걸?”
“뭐야?”
로자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자신들을 앞에 두고 말장난을 하는 건가? 하지만 쉐드는 그런 로자리아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보스의 명령은 절대적. 분신인 나는 그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지. 하지만 말이야. 베가스의 일은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거든. 어찌 되었건 그동안 함께해온 동료였는데 그렇게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을 떼버리는 건 너무하잖아?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터가 그의 장황한 말을 한마디로 압축했다.
“복수하겠다는 건가?”
풋.
쉐드가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콧잔등을 쓸었다.
“복수라기보다는 나도 열 좀 받았다는 거지.”
“크아아앙!”
그 말에 대꾸라도 하듯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과 함께 야수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수, 올가.
쉐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도 나랑 같은 생각인 모양이군.”
파밧.
상대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일행은 재빨리 좌우로 대형을 펼치며 자세를 잡았다.
그들을 보며 쉐드는 새로운 소환의 진을 만들어냈다.
“너희들의 실력은 잘 안다. 너희들이랑 싸우는데 자잘한 소환수 따위를 만들어내는 건 시간낭비겠지?”
쿠우우우.
어둠 속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일어난다. 하늘 위에 그려지는 푸른 오성의 마법진. 그 안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소환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뿔을 가진 바위만한 크기의 스켈레톤 헤드. 하지만 그것은 그냥 평범한 스켈레톤 헤드가 아니었다. 스켈레톤 헤드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은빛의 갑옷이었다.
“갑옷?”
파아앗!
스켈레톤 헤드의 형상으로 뭉쳐 있던 갑옷이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올가의 몸에 절로 달라붙었다. 갑옷과 하나가 된 올가가 푸른 섬광을 내뿜으며 울부짖었다.
“크아아아…….”
“녀석이 변화했어!”
스켈레톤 헤드의 갑옷을 장착한 올가. 그의 몸에서 풍겨지는 기운은 베가스 못지않았다. 쉐드가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2라운드를 시작해 보실까?”
“…….”
아무래도 쓰러뜨리기 전에는 지나갈 수 없을 모양이었다. 주먹을 움켜쥔 이터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잠깐 기다려.”
올가를 향해 나아가는 이터의 앞을 그레이센이 막아섰다.
“여기는 내가 맡겠다. 너희들은 어서 루시펠이 있는 곳으로 가라.”
“그레이센?”
론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무, 무모합니다. 왕자님. 단신으로 상대를 하겠다니. 그건!”
그레이센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랐어.”
“네?”
그레이센의 기억은 페이샨 왕국이 멸망했을 때를 향하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군들의 검 앞에 왕국의 기사단은 무력했다. 능력과 수, 모든 면에서.
그때, 왕국의 백성들은 수도로 쳐들어온 적군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마치…….
아까 콜로세움에서 터져버린 마을사람들처럼.
그레이센은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아냈다. 검집을 빠져나오는 검의 차디찬 소음이 통로를 울렸다.
“어차피 루시펠과의 싸움에서 내 힘은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잔챙이 처리라도 맡아야 하지 않겠어? 어서 가라고.”
“왕자님…….”
쉐드는 짧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군. 네 녀석의 힘이라고 해봤자 시간제한이 있는 이상한 주술뿐이지 않나? 확실히 그 기술을 쓰고 있을 때는 데미지도 받지 않는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