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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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
목이 마르다.
물 한 모금 마실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기분이다. 이 빌어먹을 정도로 극심한 가뭄은 근처에 흐르던 천까지 모두 마르게 만들어버렸다.
분명 예전에 여기 물이 흘렀었는데, 이제는 흔적만 있을 뿐이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집념 하나로 계속해서 걷던 세현의 눈에 민가가 들어온다. 풀려가던 눈동자에 약간이지만 생기가 돌았다.
우물. 우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허겁지겁 움직인 그가 마을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적막함만이 감도는, 집도 몇 채 없는, 사실 마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화전민들의 소규모 부락.
다행히 규모는 작았지만 우물은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물은 폐쇄된 상태였다. 꼴을 보니 꽤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벌개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주변의 민가 한 채에 다가가 문을 두들겼다.
이보시오.
물 좀 주시오.
사람 좀 살려주시오.
대답은 없다. 예상했지만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렇게 질기게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겨우 이따위 가뭄에 죽는 건가.
소원하던 누이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날아온 이 이계의 촌구석에서.
힘없이 옆쪽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그때, 미약한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평생을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한 아낙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주저앉은 그를 살핀다.
뭘 원하세요?
물, 물을 조금만……
투박하고 작은 나무그릇에 담긴 생명수가 돌아온다. 허겁지겁 마시자 위장이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이성이 날아가버릴 정도의 극심한 고통. 누군가 내장을 손톱으로 쥐어짜 할퀴는 듯한.
바로 허기.
먹을 것 조금만 주시오.
우리도 없어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안 돼요. 없어요.
그래, 이들도 먹을 것이 없겠지. 그러니 그냥 가자.
하지만 그냥 떠나면, 다음 마을로 갈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설혹 살아남아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거긴 먹을 게 있을까.
나는 죽을 수 없다. 나는 죽어선 안 돼.
이런 세계로 날아온 것도 억울한데, 고향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내가 죽으면 누이가 얼마나 슬퍼할지 뻔히 아는데. 이미 늦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몇십 년이 걸려도 나는 반드시 살아 돌아갈 것이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누나의 얼굴이 너무나, 너무나 보고 싶다.
그간의 전투로 이가 나간 싸구려 철검을 뽑는다. 생명수를 건넨 아낙에게 그것을 겨누고 말한다.
먹을 것을 내놔, 죽기 싫으면!
그들이 아끼고 아꼈을, 다음 농사에 써야 할 한 줌도 안 되는 씨앗까지 남김없이 씹어 삼킨다. 한 집으로는 부족해 다음 집을, 그 다음 집을 털어 배를 채운다. 위장을 할퀴어대던 고통이 차츰 덜어진다. 늘어지던 육체에 약간이지만 활력이 돈다.
그리 아귀처럼 굴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세현의 주위에 이 부락의 모든 주민들이 나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벌개진 눈이다. 손에 든 쇠스랑과 낫, 호미 등의 농기구도 보인다.
아아, 그렇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이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현을 죽일 것이다. 그의 육체라도 씹어먹을 생각인 게다. 그나마 남아있던 식량을 먹어치운 그를 대신 잡아먹을 것이다.
나는 죽을 수 없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검을 든다. 달려드는 화전민 주민들을 베어넘긴다. 굶주린 그들은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다. 그러나 세현 역시 굶주린 것은 마찬가지, 그는 어느 때보다 힘든 전투를 치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침내 마지막 남자를 베어 넘겼을 때, 주위에 있는 것은 힘없는 아낙과 아이들 뿐이었다.
여보, 도망가시오…… 제발……
검에 몸통이 베인 한 남자가 피를 쿨럭이며 말한다. 허나 아낙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 악마나 다름없는 세현을 죽일듯 노려볼 뿐이다. 그건 아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선이 세현의 전신을, 정신을, 영혼과 심장을 찌른다. 후벼판다.
온통 피에 절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그는 다시 검을 겨눴다.
비명과 절규.
투박한 칼날이 살과 뼈를 가르는 끔찍한 감각.
말라붙은 대지에 흩뿌려지는 진득하고 검붉은 핏물.
“……”
눈을 뜨자 잠든 아엘라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던 세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 전 성의 구조가 다시금 변했다. 이곳은 용인 길드성 5층에 자리한 그의 거처, 무림이 아니라 지구다. 에레도스 시스템으로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제 다시 나름의 질서를 찾아가는.
스스로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침대를 나섰다. 몸을 씻고 옷을 입을 때까지 아엘라는 깨어나지 않았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천천히 방을 나서 곧바로 십여 미터 떨어진 누이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똑똑 두들기자 잠시 후, 안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달칵-
“뭐야?”
졸린 기색 역력한 혜진이 하품과 함께 물어온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현이 피식 웃었다.
“산책이나 좀 할까?”
“산책? 갑자기 웬 산책?”
“마을이나 한 번 둘러볼까 싶어서.”
“음…… 그럴까?”
안 그래도 최근에 류한이 주도적으로 행한 사업이 많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고 흥미로울 것이다.
“준비할게. 아, 시간되면 식당가서 밥좀 가져다주라. 네 것도 갖고 오고. 아침은 먹고 가야지.”
그러면서 헤헤 웃는다. 감히 길드장에게 밥셔틀을 시키다니.
세현은 기꺼이 식당으로 향했다.
@
새해가 지났다. 에레도스 사태가 일어난 지 드디어 1년이 지났다.
지난 1년을 돌아보라면 살아남은 이들 전부가 할 말이 너무 많을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그들은 모두 수라장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들이니까.
당시만 해도 미래란 없을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변했다. 고작 일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사람이 모여 살 수 있는 마을이 몇 개나 생겨났다.
모든 것이 류한의 길드장, 한세현 덕분이다.
영지민이 된 이들 중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 이곳은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지금만큼 안전하고 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최근들어 마을은 점점 더 발전하고 있었다.
단순히 생존과 생활의 편의를 위한 방향이 아닌, 영지민들이 성장하고 변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기본적인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은 옷과 무기상점이었다.
사냥을 통해 모은 룬으로 류한 길드에서 직접 만들어낸 양질의 무기와 방어구 같은 물건들을 구할 수 있었다. 또한 각종 마법적인 기능을 가진 옷가지들을 구할 수도 있다. 지금처럼 추운 겨울에도 온도조절 기능이 걸린 망토 하나만 있으면 그럭저럭 따뜻해질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들어선 것은 물약상점과 의료원이다.
부상이나 질병을 치료해주는 각종 신묘한 성능의 물약들, 그리고 물약이나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의 경우, 의료원의 최용선 의사가 치료를 해준다.
한때 TV에도 자주 나왔던 만큼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또한 의료원이 생겼다는 말에 원래 의사나 간호사였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제는 정말로 병원다운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 류한의 길드원 신분이다.
다음으로 생긴 것은 훈련장이었다.
성의 동쪽에 있던 커다란 공사부지를 밀어버리고 새로 들어선 그 훈련장은 류한 길드에서 파견나온 전투원들에게 기초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심화 과정을 배우려면 적지 않은 룬이 들었으나 충분히 돈을 들일 가치가 있다.
또한 홀로그램 같은 환영을 통한 훈련도 가능했다. 이것 역시 적지 않은 룬이 들었으나 위험을 배제하고 실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매리트다. 덕분에 사람들이 끊이질 않아 대기표를 발행해야 할 정도였다.
흡사 온라인 게임의 마을을 닮은 모습이다.
몬스터들의 위협을 피해 머물 수 있는 안전한 마을, 치안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리빙 아머 병사들, 초보 유저들이 힘을 기를 수 있는 훈련장, 사냥을 통해 번 룬으로 더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구매할 수 있는 각종 상점들, 다치거나 병들면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물약상점과 의료원.
이 모든 것이 류한 길드가 이룩해낸 것이다.
그렇기에 세현과 혜진이 길을 지날 때, 그들이 입은 제복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하면서 길을 비켰다. 몇 이들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어, 좀…… 부담스럽다?”
혜진이 그렇게 나직이 말하며 경직되는 표정을 애써 풀어냈다.
세현은 물론 혜진도 이런 식으로 그들이 만든 마을에서 활보한 적이 없었다. 항상 다수의 사람들을 이끌고 특정한 곳을 방문할 목적을 갖고 움직였기에 영지민들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마을을 돌아보는 셈이다. 그렇기에 몰랐던 그들의 위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왕의 행차.
그렇게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냥 평상복 입고 올 걸 그랬나……”
“뭐 어때.”
반면 세현은 익숙한 태도였다. 그는 사람들의 어려워하고 경외어린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며 마을의 모습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가 화산의 장문인일때 이런 종류의 시선은 적지 않게 받아봤다. 처음엔 어색하고 부담스럽지만, 익숙해지면 오히려 즐기게 된다. 권력의 맛에 취하는 것이다. 그러다 더 익숙해지면 이젠 그게 당연해진다.
애당초 산책을 입에 담았으나 그들의 목적은 어느새 시찰(視察)로 바뀌었다. 적어도 혜진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이제 슬슬 사치품을 파는 상점을 만들어볼까 하는데.”
“사치품을?”
세현의 말에 혜진이 반문하며 그를 쳐다봤다.
“기본적인 삶의 기반은 얼추 마련됐으니까. 맛있는 음식이라든가, 보석 같은 걸 팔 때도 됐지.”
“그런 게 팔릴까?”
“빈부격차는 어디서나 생겨. 하루하루 사냥해서 간신히 먹고 사는 이들도 있지만, 제대로 된 파티나 클랜을 짜서 많은 룬을 버는 이들도 있어.”
그들이라면 값비싼 음식과 아름답기만 한 보석 같은 것들에 룬을 소비할 의향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원래 그렇다.
사치란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불필요하지만,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값비싸지만 유용하진 않은 물건에서 자기만족을 얻고 남들에게 과시하기도 한다. 누구도 어리석다 말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시간이 지나면 류한이 나서지 않아도 이런 사치를 위한 것들이 등장할 것이다.
“음식이야 그렇다 치고, 보석은 어떻게?”
“내가 전에 기념품으로 준 것 있지. 다르바드에서 가져온 거.”
“아, 그거?”
내부에 빛을 품은 형형색색의 보석들.
이전의 지구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그리고 다르바드의 출입권을 가진 류한 길드가 아니면 절대 얻을 수 없는 물건이다. 그것들이 풀리기 시작하면 기존 보석들의 가치는 낮아질 게 분명했다.
물론 지금 당장 상점을 만든다고 그 보석들이 팔리진 않을 것이다. 아직까진 낭비라는 인식이 더 강할 테니까.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고급 음식점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팔릴 것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룬으로는 마을에 다른 편의시설을 건설하거나 사람들에게 임금을 주며 공사를 한다. 류한의 노동력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각종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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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부디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