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32
232====================
길들이기
누군가 내쉰 한숨이 들려온다. 그러나 아무도 손호은의 말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엎드려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의 말처럼 최대한 납작 엎드리는 게 나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같다. 사회는 겉에 문명이란 껍질을 뒤집어 썼으나 본질을 살펴보면 힘의 논리대로 돌아간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안위를 챙기려면 지배당하는 자는 지배하는 자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
또한 그들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가진 자들이었다. 손에 쥔 게 많아 모험을 할 수가 없다. 애초에 그 가진 것들 대부분이 류한의 영토에서 얻은 것들이기도 하고.
“그럼 누가 대표가 되실 겁니까?”
“제가 하지요. 일단은 임시로 말입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투표 같은 방식을 통해 결정합시다.”
손호은이 다시금 나섰다.
협회장 자리는 계륵이다. 권력을 쥐게 될지도 모르지만 온갖 책임만 지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동의하신 걸로 알고, 참석하지 않은 클랜들에는 제가 따로 공문을 보내지요.”
그렇게 손호은은 임시 협회장이 되었다. 이후 회담은 이후 별다른 이야기 없이 파하게 됐다.
@
회담이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손호은은 곧장 류한 본성을 방문했다.
어제 오후에 방문사실을 알려놓긴 했지만 답변이 오기도 전에 일단 움직인 것이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간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게 될지 모르니까.
어쨌든 그래서 정문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정문 근무자에게 말을 전하고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안쪽으로 안내될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다소 삭막한 어투와 함께 그를 안내한 근무자는 무려 5층 계단을 올라 어느 방 앞까지 이동했다.
그냥 봐도 범상치 않은 장소였다. 인적이 드문 것은 물론 복도의 모습과 분위기가 격이 다르다. 눈앞에 둔 문짝마저 귀금속으로 심플하지만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일종의 엄숙함이 가슴팍을 짓누르는 것 같아 손호은은 자신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침을 삼켰다.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시면 됩니다.”
“구, 국왕님께서 말입니까?”
“아니요. 총리님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하며 근무자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총리, 국왕 한세현의 누이 한혜진. 명실상부 왕국의 이인자.
긴장으로 떨려오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킨 그가 정중한 노크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집무실치곤 상당히 넓은 방에서 한 여성이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든 태블릿으로 업무에 집중하는 여성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한혜진.
손호은은 최대한 조용하게 문을 닫은 후 곁눈질로 방안의 풍경을 살폈다. 가구나 장식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어쩐지 더 공적이고 어려운 장소 같은 느낌을 주며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애써 태연함을 되찾으며 그가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총리님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아람 클랜의 손호은이라고 합니다.”
“거기 잠깐 앉아 있으세요.”
그를 잠깐 쳐다보기만 한 혜진이 집무실 중앙의 소파를 가리켰다. 그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그곳으로 움직여 앉았다.
그 뒤로 약 십여 분 후, 중요한 일을 전부 처리했는지 혜진이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로 오셨죠?”
“다름이 아니라, 최근 클랜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신 점에 관련하여 왔습니다.”
“그에 대해선 할 말이 없군요. 죄가 있으면 합당한 처벌이 내려질 테고 없다면 괜찮을 테니,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약속도 없이 온 건가요?”
약간 피로한 기색의, 그러나 손호은에게는 적지 않은 압박이 느껴지는 냉담한 시선이 쏘아진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확실한 죄질이 있는 클랜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처벌하기엔 애매한 클랜들이라면 협상의 여지가 있다. 상대가 절대적 갑의 위치이고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짐작가는 바가 없지 않기에 그는 이 자리에 왔다.
“협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해서 손호은은 다소 난데없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간의 회담에서 논의되던 핵심이 간결하게 설명되고, 이어 마무리를 꺼내든다.
“앞으로도 클랜들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협회가 있다면 클랜들이 자발적으로 내부를 단속하고 규제할 수 있고, 또한 의견을 한곳으로 모아 보다 빠르고 능동적인 움직임이 가능할 겁니다. 협회는 분명히 왕국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 협회장이고요?”
“임시이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혜진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세현에게서 옮은 버릇, 그렇게 잠시간 생각에 골몰하던 그녀가 말했다.
“권한을 줄 테니 제대로 만들어보세요. 참가하지 않은 클랜들도 전부 가입시키고.”
기다렸다는 것처럼 손호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각 클랜마다 규모를 고려해서 치안활동에 전념할 인력을 차출해보세요.”
도시가 커지면서 그에 따른 치안과 주변 방위에 소모되는 인력이 상당한 상황이다. 애초에 류한은 왕실에서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형태의 국가가 아닌 바, 나름의 무력을 갖춘 이들의 손을 빌리는 건 결코 나쁜 생각이 아니다. 통제할 수 없다면 위험하겠지만 류한이 이들을 통제하지 못할 리 없으니까.
“당연하지만 전체적인 조율과 감독은 왕실에서 합니다.”
“맡겨만 주시면 추진계획서와 진행사항을 정기적으로 보고하겠습니다.”
그제야 표정을 푼 혜진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테이블 한쪽에 놓여있던 메모지를 한 장 떼어내 펜으로 뭔가를 적은 후, 그를 향해 가볍게 날려보냈다.
마력이 담긴 얇은 메모지가 허공을 깃털처럼 부드럽게 날아 손호은의 바로 앞에 떨어진다. 그것을 받아들면서 그는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간단해 보이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는 고급기예다.
혜진이 자하신공을 익히며 내공과 마력의 운용 숙련도가 높아 가능한 일.
메모지에 적힌 것은 두 개의 연락처였다.
“위에는 감찰부단장, 아래는 치안대장의 연락처예요. 보고는 둘 모두에게 하고 실무는 치안대장과 연계해서 처리하시고요.”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손호은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구십도로 숙이며 굽신거렸다.
@
[돌격-!!] 쾅!전사 직업 스킬 전투의 함성이 울려퍼진 후, 그보다 배는 더 큰 함성과 함께 병력들이 해일처럼 달려나간다. 그에 맞서 맞은편 진영에서도 지휘관의 사력을 다한 외침이 터지고 원거리 공격이 폭풍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섬광과 화광, 쏟아지는 총탄과 마법, 그를 막아서는 공격들과 보호막들!
여기저기서 폭발과 함께 땅이 진동하고 피가 흩뿌려진다. 돌파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충돌이 한순간이 수십 수백에 가까운 희생자를 발생시키며 전쟁이라는 괴물의 비합리성을 설파한다.
그 끔찍한 아수라장을 돌파하고서 마침내 양측의 선두가 맞붙자, 서로가 충돌하며 천둥 같은 굉음이 터져나왔다.
언뜻 보면 방어하는 측의 수가 공격하는 측보다 배는 많아 유리해 보이는 상황이다. 갈리아 연합, 최근들어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으로 무섭게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구 독일 지역의 미토스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다섯 세력들이 힘을 모았다. 서로가 서로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에 미토스의 힘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곧장 알아챘다.
어줍잖은 어부지리를 노리다간 차례차례 상대를 때려눕히는 미토스에 의해 모두가 죽을 판, 갈리아 연합은 기존의 대립이 무색하게 번개처럼 동맹을 맺고 이번 전투를 기획했다.
“디버프를 걸어! 발을 묶으란 말이다!”
“소환수들 앞으로! 기사단 우회하여 돌격!”
“머리를 노려라! 머리를 쏘라고!”
갈리아 연합의 지휘관들 대부분은 오직 한 대상을 향한 명령으로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중이었다. 그들의 압도적인 머릿수 대부분이 미토스 진영의 선두에 선 한 존재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이 혼란한 전장에서도 한 번에 보일 만큼 시선을 잡아끄는, 보통의 인간보다 네다섯 배는 큰 신장에 타오르는 적금발을 흩날리며 전신에 휘광을 감고 은빛 대검을 휘두르며 맞서는 상대를 학살하고 있는 존재.
잊혀진 영웅 켈데브렘!
그가 날아드는 수많은 공격들을 향해 손을 뻗자 빛이 명멸하며 반구형 보호막이 세워진다. 이어 그 뒤편에서 뚜렷한 주문이 울려퍼진다.
[라티마를 위하여, 신념이 내게 있어 정의가 나를 보호하니, 어둠을 짓밟아 달리고 빛으로 적을 베어내리라-.]연합군의 온갖가지 공격의 타겟이 된 상태에서, 전신을 휘감고 물결치던 은빛 휘광이 한순간 번쩍이며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 직후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다시금 번쩍이는 빛을 등지고 홀연히 나타난 그가 대검을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쳐올렸다.
대지가 찢어지는 굉음이 울린다.
동시에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갈라진 땅 틈새에서 폭발적으로 치솟아 내달리고, 경로에 걸쳐진 모든 사람들이 산산조각 나며 주변에 있던 자들도 피투성이가 되어 아무렇게나 튕겨나갔다.
“이때다!”
“시간을 주지 마라! 파고들어!”
그 엄청난 공격이 쏟아진 틈새를 노련하게 파고든 미토스의 특수단원들이 적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켈데브렘에게 온갖 보호막과 버프마법을 쏟아냈다.
제 아무리 켈데브렘이 남색 등급의 힘을 가졌다고 하나 수만이 넘어가는 갈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혼자서 무쌍할 수는 없다. 적진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쏘아낸 강력한 일격은, 그를 보조하는 미토스의 전투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이기도 했던 것이다.
– 내게 대적하지 마라! –
아군의 지원을 등에 엎고 한결 부담을 덜어낸 그가 사방으로 대검을 휘두르며 걸음을 옮겼다.
가히 폭풍이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기세의 빠르고 강력한 패검(覇劍)이 펼쳐진다. 어떻게든 그를 저지하려던 갈리아 연합의 전사들과 기사들이 무참하게 베여지고 부서져갔다. 방패를 들어 막건 보호막을 덮어쓰고 버티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가 빛의 해일로를 뿜어내며 이동한 곳에 인간들의 시체가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였다. 땅에 새겨진 발자국에는 핏물이 고여 찰박인다. 그 끔찍한 광경과 상반되게,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빛무리가 혼란 가득한 전장 중앙에서 그를 초월적인 무언가로 보이게끔 만들고 있었다.
공격을 받을 때마다 빛을 품고 번쩍이는 풀 플레이트 메일, 은빛을 휘감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내는 예리한 대검, 투구 밑으로 흘러내려 흩날리는 타오르는 듯한 적금발에 몸 뒤편에서 어른거리는 륜 형태의 후광!
그 모든 위엄을 지고 켈데브렘이 거대한 고함과 함게 다시금 대검을 휘둘렀다.
그가 나아가는 길로 갈리아 연합의 전열이 형편없이 찢어진다. 뒤를 이어 파고드는 미토스의 특수단과 전투원들이 갈리아 연합군 진형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연합 지휘관들은 어떻게든 켈데브렘을 저지하려 가능한 모든 명령을 내렸다. 목이 쉬어버릴 때까지 고함치고, 어떤 이는 직접 달려들어 제 목숨을 담보로 그의 발을 묶으려 했다.
그러나 모두 헛수고였다. 바로 등 뒤에서 수백이 넘는 마법사와 신성술사들의 지원을 받는 남색 등급 존재의 힘은 그 정도로 막강했다.
그야말로 영웅의 모습!
혼자서 전쟁의 판도를 바꾼다. 갈리아 연합의 사기가 실시간으로 뚝뚝 깍여나가고 그에 반비례해 미토스 진영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는다.
켈데브렘은 전장 어디에서나 보이는 만큼 그가 보여주는 위용 역시 전장 어디에서나 보였다. 그가 적 한 명을 죽일 때마다 연합군 수백 명이 죽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퇴-!!”
“후퇴하라!”
전투가 시작된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갈리아 연합이 몸을 빼기 시작했다. 어어어 하는 사이 전장의 균형이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졌다.
대부분의 전투가 그렇듯, 후퇴하는 적을 물어뜯는 것은 상식이고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도 후퇴하는 때다.
켈데브렘은 철천지원수를 만나기라도 한 듯 갈리아 연합군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어마어마한 피해를 누적시켰다. 그를 따르던 특수단원들과 전투원들 역시 혁혁한 전공을 세워갔다.
패잔병처럼 허겁지겁 물러나는 적들을 바라보며, 전선 뒤쪽에서 지휘를 맡고 있던 미토스의 영주 크리스토프 발츠가 희열에 몸을 떨었다.
연합군을 대패시켰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제각각 본거지로 도망친 적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굴복시키는 것뿐이다. 애당초 그렇게 찾아가기도 전 항복의 뜻을 알리기 위해 찾아오는 세력도 분명히 있을 터다.
추격이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마침내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우리가 승리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에 호응하여, 주변의 모든 병력들이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각자의 무기를 열정적으로 치켜들었다. 그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대지가 들썩였다.
바야흐로 미토스가 유럽지역의 패권을 쥐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지금 보니 소제목이 조금 안 어울리는 것도 같네요. 추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시험 잘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이 월요일이네요. 부디 즐거운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눌러주세요. (__) 내일도 한 편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