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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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는…… 나는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이런 식? 정확히 어떤 식?”
“별다른 대책도 없이 현상유지와 스스로의 안위만 생각하는 것 말이오. 계속 이런 식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하고 말 거요. 이미 사방에서 조짐이 있기도 하고. 다른 이들을 선동해서 군인들을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중이오. 외부인인 당신에게 이런 말까지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강서구를 시작으로 동작구까지 통제력을 상실하기도 했고.”
“통제력을 상실했다?”
“우리쪽 군인들은 철수하고 알아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리지. 당연히 관계도 별로 좋지 않소. 섣불리 진압하기도 애매한 게, 그쪽에 주둔하던 칠천 병력이 등을 돌렸거든. 진압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싸움을 걸 수 있는 수준도 아니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군인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칠 테고.”
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썩 좋지 않은 상황이군. 그래서 대책은 뭔가?”
“현재는 정치적으로 협상하자는 게 전부요.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아. 일단 쟁여두고 있는 물자부터 풀어줄 필요가 있지. 그렇게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서울 남쪽 평야지대를 확보해서 옥수수라도 심어야 하지 않겠소? 쟁여둔 물자가 상당하니까 낭비만 하지 않는다면 삼사 년은 버틸 수 있고, 그 이후가 조금 불안하지만 당장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보다야 낫겠지. 지금처럼 쓸데없는 곳에 병력 낭비만 하지 않는다면 농경지 확보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거요.”
“북쪽에 대해선 어떻게 할 건가?”
“거긴 당장은 포기하는 수밖에. 하지만 전기와 물은 지금처럼 계속 공급할 생각이오. 괴물 놈들이 빛과 물 때문에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거든. 만약 공급을 중단하면 대규모로 이쪽으로 밀고 내려올 가능성도 있소. 일단은 방어만 하면서 시간을 벌고, 군인과 함께 생존자들을 키울 거요. 우리의 전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게 바로 내가 대통령과 등을 돌리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의견이오.”
생존자들을 키운다.
확실히 기존 권력자들에겐 위험하게 들릴 수 있는 내용이다. 스스로 찔리는 점이 많다면 군중이 힘을 갖길 원하지 않을 테니까.
세현의 그 속내를 짐작하듯, 차석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시기에서조차 국민의 자위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발상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죽이게 될 거요. 모든 이들이 힘을 키우고 합쳐도 모자랄 판에, 군인들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가축처럼 지배하려고만 하다니? 설령 그들을 가축처럼 생각하더라도 이용해야 할 때는 이용해야지!”
“그래서, 너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약간의 지원과 허락만 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우리가 병신 같은 짓만 하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소. 권력을 누리는 것까진 좋다 이거요. 그런데 그걸 굳이 독점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더군. 그렇게 누리는 한정적인 권력이 의미가 있겠소? 어차피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무너져버릴 텐데. 이왕 누리는 권력, 사방에 조금 나눠주더라도 오래오래 누리는 게 낫지.”
그 능력이나 심성은 둘째 치고, 원하는 바가 세현과 꽤 부합되는 방향이었다.
“그럼, 네가 권력을 잡으면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더 이상 적대적으로 굴지 않을 거란 이야긴가?”
“당연한 소리요. 안 그래도 힘든 마당에 같은 사람과 싸우는 건 정말로 멍청한 짓이지.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바로 그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 이거요. 지방에서 군벌 세력이 만들어져 자신을 위협할까 걱정하는 건데,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도 어쩌지 못하면서 일만 벌여놓는 꼴이지.”
“그래, 너와는 말이 통할 것 같군. 내가 원하는 건 서로 이득을 주고받으며 상생하는 거다.”
“그건 부탁이랄 것도 없는데…… 정말로 그게 끝이오?”
“그리고 필요시 우리 쪽에 최대한 협조할 것. 그것만 약속하면 된다. 빚은 갚아야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예상대로 차석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앞으로도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협조하겠소.”
“좋군. 그러면 이제, 누가 죽어야 하는지 적어봐라.”
세현이 방을 슥 둘러봤다. 그리고 한쪽 탁자 위에 있는 볼펜과 메모지를 발견하고 허공섭물로 그것을 끌어당겨 차석원에게 건넸다.
그는 허공을 날아 자신에게 오는 물건들을 보며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당신, 혹시 마법사요?”
“내 직업이 중요한가? 아니면 능력이 중요한가?”
그러면서 세현은 손가락에 지강을 만들어냈다. 그것으로 그와 차석원 사이에 있던 단단한 대리석 테이블을 두부처럼 쪼개기 시작했다.
툭- 툭-
잘려진 테이블 조각이 카펫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섬뜩하다. 그것을 본 차석원이 잊었던 긴장감을 되찾고 살짝 말을 더듬었다.
“그, 그만 하셔도 좋소. 능력은 충분히 알겠으니까.”
“아니, 부족해. 네게 더한 확신을 주마. 행여나 나중에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
자리에서 일어선 세현이 어딘가로 향했다.
다름 아닌 차석원이 그에게 겨눴던 권총이 떨어진 자리였다. 그것을 다시 허공섭물로 끌어당겨 잡은 후, 탄창을 끼우고 장전까지 마쳐 차석원에게 건넨다.
“나를 쏴 봐라.”
“여기서 말이오?”
“그래.”
“설마, 총알이라고 막아내겠다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소리 때문에 당장 사람들이……”
“말이 많군.”
총을 받을 생각도 없는 차석원을 대신해 세현이 직접 허공섭물로 그것을 띄웠다.
그리고 두세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총구를 자신을 향하게 만든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타타탕! 타탕-!
허공섭물로 방아쇠 누르는 것 정도는 별 일 아니었지만, 반동까지 견뎌내는 건 쉽지 않아 빗나가는 총알이 생겼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다.
총성은 기막으로 차단했고, 빗나간 총알까지 모두 손으로 잡아냈으니까.
맥없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권총과 함께, 세현의 손아귀에 잡힌 매끈한 구리 탄두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영화나 만화에서나 보던 묘기를 실제로 목격한 차석원은 눈을 부릅뜬 채 감을 줄 몰랐다.
막아낸 것도 아니고, 불과 두세 걸음 사이에서 쏘아진 탄환을 모두 잡아냈다. 차라리 막아냈으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거다.
“인간이 아니군……”
“칭찬으로 듣지.”
정말 종족적인 의미로 인간이 아니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서서히, 차석원의 표정에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흥분이 서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정말 내게 왕좌를 주겠다고?”
“그래. 나는 이곳 서울이 전혀 탐나지 않아. 아, 생각난 김에 말하지. 우리 쪽으로 온 이곳 병사들은 모두 죽이거나 제압했으니 돌려받을 생각은 말아라.”
“그, 뭐, 뭐라고요?”
“장근석 소장, 김재훈 대령, 두 놈이 끌던 병사들 대부분을 사살하고 일부 생포했다. 돌려줄 생각 없으니 포기하라고.”
“김재훈 대령이야 그렇다 쳐도, 장근석 소장 그 사람은 내가 알기로 꽤 많은……”
“장갑차와 전차를 포함한 약 사백 정도의 병력이었지. 감히 내 영토에서 사람을 징집하겠다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하더군.”
“내 영토……”
잠시 말을 잃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세상이 이렇게 된 마당인데, 그곳이 당신 땅이라고 주장해도 우리는 관여치 않겠소. 오히려 동맹 관계를 이어갔으면 좋겠군. 아래쪽에서 괴물이 판을 치는 것보다야 사람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는 게 훨씬 낫지.”
“역시, 말이 통해서 좋아. 네가 멍청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상생할 수 있을 거다.”
서울은 당장 집어삼키거나 하기엔 너무 크다.
게다가 이곳을 지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골치 아픈 문제까지 함께 떠안을 바에야 별개의 동맹 세력으로 취급하며 이득만 교환하는 쪽이 훨씬 낫다.
“전기와 수도시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나?”
세현이 문득 떠오른 것을 질문하자, 약간의 생각을 거쳐 차석원이 대답했다.
“당연히 있었지. 짧지 않은 이야기요. 간단히 말하면 발전시설과 수도시설은 그냥 확보만 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 없소. 기술자들이 필요하지. 일반 기술자는 물론이고 마도공학자로 전직한 사람이 필요하오. 보통은 원래 기술자였던 사람들이 작업을 하다가 그쪽으로 전직하더군. 그때 처음으로 괴물을 죽이지 않아도 각성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흐음.”
전직에 대한 건 세현도 이승원 소령에게서 얼핏 들은적 있다. 부대의 차량정비병과 몇 통신병들이 관련 작업을 하다가 각성했다고.
세현의 류한 길드는 모두 사냥이나 훈련장을 통해 각성했지만, 특별한 기술이나 적성을 가진 이들은 해당 일을 열심히 해도 각성할 수 있다고 한다. 조건을 만들기도 어렵고 이렇게 각성할 수 있는 직업이 굉장히 한정적이기에 그다지 중요한 정보는 아니다.
어쨌든, 마도공학자가 있어야만 발전소와 수도시설을 정상화 할 수 있다는 정보는 중요했다.
“그쪽 용인에 물과 전기를 공급하려는 모양인데, 일단 취수장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전부 파악하고 확보해야 할 거요. 그 밖에도 신경 써야 할 게 많지.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쉽지 않을 테니 이쪽에서 도와주겠소. 이걸로 뭔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고, 대신에 일만 확실하게 처리해주시오.”
“그거 고맙군. 그럼 이제, 누가 없어져야 하는지, 어디에 머무는지 작성해라. 다른 특징적인 정보도 있으면 좋다. 혹시 뒤처리도 도와줘야 하나?”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
초췌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보이는 걸 보니, 마냥 무능한 인물은 아닌 듯하다.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무총리라는 자리를 고스톱으로 따진 않았을 것이다. 설령 생각보다 능력이 부족해도, 단기간에 서울이 붕괴할 정도만 아니면 된다. 어지간히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정도로 무능하기도 어렵다.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세현은 썩 만족스러운 기분에 미소를 띄웠다.
차석원의 손에 의해서 하나둘씩, 살생부가 완성되어 갔다. 이들만 없어지면 그가 확실하게 서울을 장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침내 그에게 메모지 세 장을 받아든 세현이 명단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밝기까지 전부 처리해주지.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길 바란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소.”
“일이 끝나면 이승원 소령 쪽으로 무전해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기만 하면 된다.”
세현이 메모지를 확인하며 몸 돌려 방을 나서려는 그때, 차석원이 물었다.
“만약에,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적합자가 아니었으면, 그땐 어떻게 했을 거요?”
뒤를 돌아본 세현이 피식 웃었다.
“몰라서 묻나?”
메모장을 가볍게 흔들어 보인 세현의 신형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깜작 놀란 차석원이 벌떡 일어섰다.
방 안에서는 누구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옷장으로 향했다. 자신이 미쳐버린 게 아니라면, 몇 시간 후에 모든 일이 끝난다. 이렇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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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석원이 만들어준 살생부는 정확했다. 중요 인물의 근처일수록 순찰 또는 경계를 서는 군인들이 많았지만, 그 정도로 세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호실을 찾아가 인물의 특징을 확인하고 죽이면 된다. 대부분 잠에 빠졌거나 여자와 뒹굴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간혹 자리를 비운 이가 있었지만, 그러면 주변을 돌아다니며 찾으면 될 일이었다. 복도를 돌아다니다 마주친 한 남자에게 이름을 묻는다.
“김지원?”
“누구시오?”
“김지원?”
“내 이름은 어떻…?”
푸확!
어느새 잘린 목에서 뿜어진 피가 복도를 적신다. 시체가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세현은 그 자리에 없었다.
혹시나 이상을 눈치채고 도망치는 이가 생길새라 그의 작업은 1층에서부터 시작됐다. 한 시간도 안 되는 동안 무려 20층까지 올라오며 청소를 하자, 그제야 군인들이 이상을 알아챘는지 호텔 내부가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정도로 세현을 막을 수는 없다. 애초에 발견하지도 못하는 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호텔 내부는 넓었고 숨거나 적을 따돌릴 곳은 너무 많았다.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그는 모든 이들을 손쉽게 처리했다. 마지막 30층에서 마주친 이는 다름 아닌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상을 눈치채고 호위병력과 함께 대피하는 와중이었다. 그 와중에 벌거벗은 여인들 세 명도 함께 이동한다.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대통령의 얼굴 정도는 세현도 알고 있었으니까.
멀리서 뻗은 손에 한줄기 섬광이 번쩍이고, 대통령의 뒤통수에 구멍이 뚫리며 피가 튄다. 얼굴과 몸에 점점이 튄 피를 맞은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혼란에 빠진 군인들이 서둘러 은엄폐를 시도하며 사방으로 총구를 겨눈다.
물론, 거기서 세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혼란을 어떻게 잠재우고 권력을 틀어쥘지는 모두 차석원의 몫이다. 모퉁이에 숨은 그는 마지막으로 메모를 확인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떴다.
============================ 작품 후기 ============================
서울 파트 완입니다.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