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30
830화. 무슨 이유로 나를 막을 건데?
자리에서 일어난 장목화는 벽에 기댄 성건우와 핵탄두가 든 나무 상자를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곧 결단을 내렸다.
지프에 실린 물자를 전부 이곳으로 옮겨올 작정이었다.
그러면 터널과 지프 사이를 오가는 데 드는 시간도 줄일 수 있고, 터널 밖 작은 도시를 탐색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집중시킬 수도 있을 터였다.
동시에 길을 잃는 횟수까지도 줄일 수 있었다.
“휴⋯⋯.”
장목화는 한숨을 토하며 속으로 자조했다.
‘사실 내가 저길 탐색할 필요는 없어. 건우한테 수확이 있기를 기다리다가 정보를 뒤덮은 안개가 어느 정도 걷히면 그때 움직여도 돼.
근데, 난 건우의 발목을 잡고 싶지는 않아. 게다가 현실 신세계에서 발견된 이상이나 단서는 건우한테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커.’
스스로를 설득한 그녀는 곧 제8 연구원 밖으로 향했다.
장목화는 몇 번이나 길을 잃어가며 모든 물자를 성건우와 핵탄두가 있는 곳에 옮겨놓고 지프를 바깥의 으슥한 곳에 숨겨두었다.
모든 작업을 마친 그녀는 충전할 곳을 찾아 벽에 기대 앉았다.
기원의 바다로 떠나는 여정이었다.
미약한 빛이 번득이는 바닷속에서 장목화는 계속 먼 곳으로 헤엄쳐갔다.
* * *
헤엄치는 와중에도 장목화는 특별히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다음 섬을 찾기 시작한 지도 이미 한참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이맘때쯤이면 다음 섬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1분 1초 흐르는 사이, 돌연 전방에 크지 않은 섬 하나가 떠올랐다.
은은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섬이었다.
순간 장목화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제 자신을 수용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섬의 외형적 특징은 언젠가 성건우가 했던 묘사와 똑같았다.
하지만 장목화는 더 빨리 헤엄치는 대신 원래의 박자를 유지했다. 지금 그녀는 그 섬에 올라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데만 집중했다.
단순히 수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자신과 처음 만나자마자 화해하고 수용을 완료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실패하더라도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에서는 일단 바닥부터 확인해보는 게 좋았다. 또 다른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는지 알아낸 뒤 그것에 근거해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계속 머리를 굴리며 이동하던 장목화가 이내 섬 가장자리에 올랐다.
예상대로 눈앞엔 지하 깊은 곳으로 연결되는 황금 엘리베이터가 하나 보였다. 그 엘리베이터 앞에, 매우 익숙한 누군가가 기대 있었다.
거의 180센티미터에 달하는 키, 밀색 피부, 큼직하고 화려한 이목구비, 검은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여자. 바로 장목화 그 자신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상대는 회색 제복이 아닌 장목화가 가장 좋아하는 옅은 흰색 면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저 장목화는 아주 편안하고 나른해 보였다.
그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성급하게 공격부터 하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어. 우리 일단 얘기부터 좀 하자.”
“좋아. 무슨 이유로 심령의 복도에 들어가려는 나를 막을 건데?”
장목화는 일찍이 세워둔 계획을 철저히 실행에 옮겼다.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심령의 복도에 들어가려는 너를 막아야 하는데? 그건 우리 모두한테 아주 잘된 일이잖아!”
“그럼 왜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있는 거야?”
장목화의 표정은 상당히 여유로웠다.
‘장목화’가 정색을 한 채 답했다.
“누가 주체가 되느냐를 두고 토론하려고.”
“뭐?”
장목화가 의혹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내 ‘장목화’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네 마음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우리의 꿈은 구세계 파괴의 원인과 무심병의 근원을 밝혀내는 거였고 그건 이미 달성했어.
무심병은 신세계 급 이상의 각성자들이 인간 의식을 흡수함에 따라 발생하는 거고, 구세계는 제8 연구원이 인간 의식을 연구하다가 신령의 금기 구역을 건드려서 파괴된 거야.
어둠에 잠들어 있다가 그 연구 때문에 깨어난 달지기 본체가 거리낌 없이 미식을 탐하면서 무심병 폭풍이 일어났고, 요직에 있던 수많은 사람은 무심자로 변해 주변 정상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지.
그러자 자동 방어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제작한 무기가 인간의 문명을 거의 소멸시킨 거야.”
장목화는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구세계 파괴와 관련된 추측은 아직 확인할 수 없어. 신세계에 있는 건우의 탐색을 기다려야 해. 구세계 파괴전에 여러 달지기는 강림체로 대지 위에서 활동했지, 어둠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거든.”
‘장목화’는 반박하는 대신 웃었다.
“그래, 맞아. 근데 그건 우리한테 아무 의미도 없어. 앞으로 몇 년간은 신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우리의 일과 꿈은 이미 일단락났어.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지.
변명하지 마, 난 다 알아. 넌 사실 신세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잖아. 1년에 한 번 돌아올 수 있을까 말까 한 그 정신 감옥에 갇히기 싫잖아.”
“…….”
장목화는 침묵했다.
성건우에게 신세계가 고급 각성자의 자유를 제안하는 작용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녀는 승급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옛날 퍼스트 시티의 전 황제 오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장목화는 달지기들이 신세계 강자를 강제로 구속하는 게 잘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본인이 신세계 강자였다면 그 생각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었다.
그러한 곤경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녀는 진심으로 신세계 대문을 열지 않길 바랐다. 물론 그 문제를 고려하기에 지금 그녀의 레벨은 한참 낮았다.
이러한 생각들은 그저 진상을 알게 된 후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장목화’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건우처럼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숭고한 마음이 없어. 우리는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진, 허무맹랑한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건우는 계속 신세계를 탐색하도록 둬. 언젠가 건우는 우리한테 구세계 파괴를 세세하게 알려줄 수 있을 거고, 그때 우리는 회사로 돌아가는 거야.”
장목화는 구세계 파괴가 제8 연구원, 인류 의식 연구, 신령의 금기 구역, 달지기 등의 단어와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는 건 알았다. 다만 그 중요 단어들을 연결하고 짜 맞출 세세한 부분은 부족한 상황이었다.
장목화가 미간을 구겼다.
“돌아가서 빅보스가 기르는 가축이 되자고? 매일 언제 무심자로 변할지 모르는 걱정을 안은 채 살라고?”
‘장목화’가 웃었다.
“너도 사실은 잘 알고 있잖아. 우리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는 거. 이번에 돌아가면 우린 관리층에 진입할 수 있어. 그리고 관리층과 직계 가족들은 무심병에 걸릴 확률이 굉장히, 굉장히 낮지.
설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달지기에 도전하려는 거야? 너도, 엄마도, 아빠, 오빠, 새언니의 안정적인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놓으려는 거냐고.”
“…….”
장목화는 침묵했다.
그러다 몇 초 후, 그녀는 마음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장목화는 눈앞의 상대가 자신의 성격 중 가장 나약한 부분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대충 알아차렸다.
상대는 이기적인 장목화였다.
* * *
신세계.
벽에 기댄 성건우는 6층 창문 너머로 목표 지점을 관찰했다.
관찰은 한나절 동안 이어졌지만 고전적인 남회색 건물 입구는 내내 고요했다. 왕래하는 사람도 없고, 꼭대기 층 불빛에도 변화는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방문하는 사람도 없고, 나오는 사람도 없다니. 혼자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안 답답한가?”
그 소리를 듣고,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건우가 깊이 동조했다.
“이래서는 감옥에 갇혀 있는 거랑 뭐가 달라? 일반적인 감옥에는 대화를 나눌 사람이라도 있지. 가끔 치고받으면서 감정을 분출할 수도 있고.”
“그걸 이제야 느낀 거야?”
성실한 성건우가 반문했다.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건우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몇 초 후에야 억지로 해명했다.
“내 말은, 기왕 감옥에 갇혀 있으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다른 각성자와 싸우면서 스트레스라도 풀어야 한다는 거지. 이렇게 손님도 없이 혼자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정말로 답답해 미쳐버릴지도 몰라!”
성실한 성건우가 재차 반문했다.
“저 등을 대표하는 각성자가 이미 미쳐있을지 어쩔지 어떻게 알아?”
“…….”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건우는 결국 침묵에 들어갔다.
이에 무슨 의견이든 동조하는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맞아, 맞아.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 대목에서 성건우는 계속 목표 건물을 관찰하며 종이와 펜을 구현했다.
무기 구현에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이런 작은 물건을 구현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뒤이어 그는 벽을 받침으로 삼아 종이에 제목을 적기 시작했다.
[신세계의 폐쇄적인 환경과 단조로운 인간관계가 정신 상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제목을 정한 성건우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글을 써 내려갔다.
「장목화님이 연구해주시길.」
“휴⋯⋯.”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 놀이를 마무리했다.
또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수확은 없었다. 이에 성건우는 스스로를 분열시켜 성건우 몇 명더러 심령 방에서 재밋거리를 찾도록 했다.
신세계에 진입한 이래, 그의 대가인 인격 분열 증상은 더욱 심해져 있었다. 다만 이곳의 규칙으로 인한 제한 때문에 증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성건우 역시 10명으로 완전히 분열하지는 못했다.
이제 그의 심령 세계 속 성건우들은 자주성과 독립성이 더 높아졌다. 몇몇 성건우들은 심지어 더 강화되기도 했다.
덕분에 성건우는 현재 다른 자신과 심령 방에서 카드 게임을 하면서 또 다른 자신을 통제해 목표 지점을 관찰하게 할 수 있었다.
만약 타인의 방도 탐색할 수 있었다면, 성건우는 일찍이 그곳으로도 한 사람 보냈을 것이었다.
* * *
심령의 복도, 131호.
할 일이 없는 몇몇 성건우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누구라도 어서 재미있는 제안을 하기를 기다렸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성급한 성건우가 손을 흔들었다.
“기원의 바다로 가서 수종이 틈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볼까? 우린 이제 신세계에 들어왔잖아. 그 틈에서 뭔가 다른 발견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수종이가 정말로 장생의 유년 시절이라면 그 틈의 끝은 탑 내부로 이어져 있지 않을까?”
나머지 성건우들의 눈이 확 밝아졌다.
성격이 발랄한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 틈 안에 엎드리면 탑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수종이는 신세계의 탑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했을 거야. 지금쯤 어느 인간 거점에서 게임 중일걸.”
성실한 성건우가 말했다.
성급한 성건우는 이제 입씨름은 물린다는 듯 홱 돌아섰다.
“일단 가서 보자고!”
* * *
성급한 성건우를 선두로 기원의 바다에 들어간 성건우들은 곧장 수종을 대표하는 고공의 틈으로 날아올랐다.
각자의 독립성과 자주성이 증강된 까닭에 성건우들은 더 이상 날개 역할과 본체 역할을 나누지 않았다. 대신 구름을 밟거나 바람을 타는 식으로 구세계 콘텐츠에서 보고 배운 방법을 동원했다.
물론 이는 주로 재미를 위한 행동이었다. 이미 신세계의 대문을 통과한 성건우들은 굳이 본인의 기원의 바다에서 이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제는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공중으로 떠오른 몇몇 성건우들이 그 틈을 에워쌌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내부는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가끔 번득이는 미약한 빛과 짙은 어둠, 모두 그대로였다.
“어떻게 아무 변화도 없을 수 있지?”
성급한 성건우는 퍽 실망한 듯했다.
그는 아예 더 다가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안쪽으로 파고 들어갈 생각인 듯했다.
다음 순간, 성급한 성건우는 기쁨과 충격이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와서 들어봐! 말소리가 들려!”
나머지 성건우들은 곧장 그쪽으로 다가갔다.
틈의 출입구가 물 샐 틈 없이 꽉 채워졌다.
이후 그들은 틈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말소리를 들었다.
아주 낮고 모호해서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이 소리가 각각 다른 곳에서 기원한다는 것만 구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남은, 스물 정도의 인원이 한 화제를 두고 토론하고 있는 듯했다.
“잘 안 들리네!”
성급한 성건우는 틈 반대편 끝을 뚫고 나가 소리와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하지만 육신은 그의 지휘에 따르지 않았다.
나머지 성건우들이 그의 두 다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성급한 성건우가 목청을 높였다.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의 말에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위험할수록 모험해야 하는 법이라고!”
성급한 성건우의 말투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머지 성건우들은 단단히 협심한 채 그를 옭아맸다.
한 차례 논쟁과 협상 끝에, 성건우들은 무턱대고 수종이 심령 세계에 들어가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상대는 장생의 유년기일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그의 심령 세계는 곧 장생의 심령 세계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