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Rank Supporting Role’s Replay in a Prestigious School RAW novel - Chapter 1101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01)
125. X (1)
조의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은호는 매일같이 연표를 살폈다.
처음 제작했을 때나 이전과는 달리 은호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었다.
영인과 흑호.
은호는 기록에 남지 않은 둘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지만, 위화감이 커지고 있어. 특히 흑호 님에 관한 건이 그래.’
은호는 수장이었던 시절 자신이 내린 판단과 결과를 복기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위화감에 흑호의 존재를 넣는다면 딱 맞아떨어졌다.
은호와 황호는 옛 수장과 현 수장으로서 대화했다.
대화 결과, 황호가 수장의 입장으로는 딱히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음이 판명되었다.
‘황호 님이 수장으로서 지낸 시간이 훨씬 긴 데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어. 그렇다는 건 수장이 교체될 즈음에 흑호 님이 사라진 게 아닐까?’
은호는 위화감을 캐 보는 것과 동시에 하루 세 번 조의신을 찾아가 맥을 짚으며 교신의 내용을 생각했다.
조의신이 질문을 한 계기, 얻은 힌트와 생각, 얻었을 답변, 흑호의 정체를 바로 밝히는 걸 꺼리는 이유, 호족의 상황, 동분서주하는 백호 그리고 은호가 느꼈던 위화감과 모순.
은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사고를 멈추었다.
‘의신이 형은 흑호 님이 깨어나면 일어날 일을 대비하고 있구나. 내 생각대로라면 큰일이 벌어지겠지.’
은호는 조의신의 뜻을 그르칠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에 생각을 잇는 대신 별채에 대기 중인 황호의 분신에게 호족의 정황을 묻기로 했다.
조의신은 흑막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두를 것이고, 그때 호족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다면 또 무리를 할 게 뻔했다.
그러나 황호의 분신보다 다른 이를 먼저 마주쳤다.
“적호 님?”
적호가 복도에 멈춰 서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어두웠고 유리창을 부술 기세로 비가 퍼붓고 있었다.
적호는 영인의 조사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신화시대의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곳마다 적호는 저도 모르게 옛 정인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은호가 한 번 더 이름을 부른 후에야 적호가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실례했습니다. 영인을 캐다 보니 옛일이 자꾸…… 백호는 또 어딜 갔답니까?”
“은광구 어딘가에 있겠죠.”
적호가 서투르게 말을 돌리고, 은호는 적당히 맞장구쳤다.
백호를 생각하자 또 울분이 솟는 건지 적호가 짧게 욕설을 뱉고 말했다.
“저번처럼 면죄부를 써서 은광구 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닐 거예요. 백호 형님은 오늘 천익산을 둘러본다고 하셨으니 멀리는…….”
은호는 말꼬리를 흐렸다.
면죄부 하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천신께서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거지?’
면죄부를 만들어 백호의 힘을 활용하는 것과 동시에 은호는 천신과 접촉할 기회를 노렸다.
은호가 면죄부를 만들어도, 백호가 면죄부를 사용해도 천신은 반응이 없었다.
이 의문에 답을 내리기 전, 조의신이 일어났다.
* * *
눈을 떠 보니 꽤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예전에 3일 정도 잠들었으니 이번에도 그것과 비슷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훨씬 오래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백호군이 아이템 카드를 두 장 내밀었다.
부와 생명의 무게와 교신에 대비해 마련한 치유 아이템이었다.
“치유광풍이 다녀갔다.”
설마 했는데 결국 유상희의 손을 번거롭게 만들었구나.
면목 없는 기분에 잠겼다.
유상희를 불렀다면 그냥 나보다는 황지호나 적호를 한 번 더 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막 깨어난 청호를 살펴보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네가 그 말을 내 친우들 앞에서 하면 반응이 재미있을 거다. 해라.”
대놓고 하라니까 하기 싫어졌다.
됐고 입수한 정보나 줘.
내 생각을 읽곤 백호군이 피식거리다 그간 있었던 일을 전했다.
백호군이 호랑이들이 들으면 속 터질 소리로 긴말을 마무리 지었다.
“네가 둔 수의 의미를 알지 못해 속 터져 하더군.”
누가 그걸 물었나.
어쨌든 준비를 마치기 전에 호랑이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다행이다.
‘대부분 내 생각대로야. 선수를 치자.’
나와 백호군이 사라진 X, 흑호의 정체를 아는데도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건, 흑막이 알고 있어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뜻이다.
흑막이 이번 건을 다른 사건과 동시에 터뜨리면 호족이 대응하기 매우 까다로워진다.
태풍이 몰아치고 있지만, 염준열의 폭주 같은 사건과 동시에 일이 터지느니 비바람 속에서 싸우는 게 나았다.
이건 백호군도 동감일 거다.
“호족이 준비된 것 같아?”
“그렇다.”
백호군의 답하기 무섭게 방문이 열렸다.
착한 황유호였다.
가호를 통해 치사하게 타이밍을 재고 나타난 백호군과 다르게 황유호는 똑똑하고 착해서 저렇게 빨리 왔다.
“조의신! 드디어 일어났군. 몸은 괜찮나?”
“응, 괜찮아.”
내 몸 상태보다는 황유호가 걱정되었다.
오늘 할 이야기가 작고 착한 황유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그렇겠지.”
황유호는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내가 부탁한 대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비록 중간에 진찰, 식사 등등의 과정을 거치느라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만, 내가 부르는 이들을 모으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으니 그냥 참기로 했다.
내가 일어난 건 아침이었으나 자리가 만들어진 건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다들 내 왼눈만 보고 있네.’
교신 탓에 왼눈에 무리가 간 건지 렌즈가 깨지고 오방색이 드러났다.
은호와 황지호가 다시 새 렌즈를 만들어 주긴 했으나 ‘착용은 나중에 하세요. 다들 의신이 형의 눈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 해요.’라는 말을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호랑이들은 물론이고 공청훤과 그 옆에 착 붙어 있는 산령도 내 왼눈을 응시하였다.
“의신아, 용궁에서 한 번 더 치료 받자.”
“용왕신의 무녀들은 용궁 주변의 비바람을 진정시키느라 바쁘다고 들었다만.”
“용궁에서 요양하는 셈 치고 기다렸다가 치료받으면 되지.”
용제건이 기분이 나빠 보이는 황지호와 말을 주고받는 걸 보자 김신록이 입을 뻐끔거렸다.
웅녀 건이 드러났는데 용제건이 넙죽 이 자리에 나타난 게 어이가 없을 거고, 나를 데려가겠다며 황지호와 말씨름을 하는 걸 보면 소름이 돋을 거다.
용제건은 멀쩡해 보였는데 김신록은 매우 긴장했다.
차를 내린 은호가 용제건을 상대했다.
“의신이 형의 왼눈이 많이 신경 쓰이나 봐요.”
“응. 의신이 눈이 저렇게 될 때 호족은 뭘 했어?”
“의신이 형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무리하셨어요. 그 덕에 흑막이 용족의 후예를 폭주시키려 한다는 걸 알아냈죠.”
“진짜?”
용제건의 눈에 흥분과 적의가 어렸다.
후예가 노려지는 게 화가 나면서도 들떠 보이는 게 참 용제건다웠다.
“저는 괜찮아요. 비록 눈이 이렇지만, 이능파 상태는 근래에 들어 가장 좋아요.”
“그야 그렇겠죠. 요즘 의신 학생은 도통 쉬질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왜 안구가 파괴될 뻔한 걸 별것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 거죠?”
공청훤의 말에 동의하듯 청호가 크게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다른 호랑이들도 청호만큼 격하진 않았으나 동의를 표했다.
나는 호랑이들을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진행시킬 겸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제 왼눈은 사라지지 않고 이 자리에 있어요. 흑호의 존재와 다르게요.”
흑호가 언급되자 청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멈추고 다른 호랑이들도 표정을 바꾸었다.
“하늘이 열리기 전, 흑호라는 호족이 존재했어요. 적어도 교류전 1차전의 유적형 이계 시뮬레이터가 재현한 시대에는 확실하게 있었죠.”
“보스 에너미로 등장한 존재가 흑호였어?”
“네.”
“대체 어떻게? 내 소원의 힘을 써도 그 정도로 무언가를 완전히 지우는 건 불가능할걸?”
용제건의 말에 나는 부와 생명의 무게 아이템 카드를 꺼냈다.
내가 이 카드를 소지하고 있다는 걸 아는 호족들의 반응은 담담했으나 이를 처음 안 이들은 경악하여 바라봤다.
“그 수단은 외적과 웅족이 다루는 천칭이에요. 진웅팔선은 흑호를 지운 여파로 실성하거나 잠들고, 천칭도 망가져 버렸죠. ‘부와 생명의 무게’라는 아이템은 일종의 열화판이에요.”
“인간의 가능성을 지우는 끔찍한 천칭이 열화된 버전이라니…….”
“의신이 형이 백호 형님께 맡긴 조사 중에 천칭에 관한 건도 포함되어 있나 보군요.”
황지호의 탄식에 이어 은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은호는 백호군을 제외하면 호족 중에서 가장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상태일 것이다.
나는 은호의 말을 긍정을 표하고 덧붙였다.
“부와 생명의 무게로 부정 입학자의 이능을 지웠을 때, 천칭이 지운 건 이능뿐이었어. 하지만 흑호의 경우는 달랐지.”
“걔들 이능 지운 게 너였구나. 의신이가 한 거니까 지울 만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어떤 부분이 달랐어?”
이 중에는 교사도 있으니 일개 학생이 다른 학생의 이능을 지운 걸 알고 경악할 법한데 공청훤은 물론이고 한이마저 담담하게 반응했다.
호랑이들은 부정 입학자의 사라진 이능보다는 흑호와 천칭 쪽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다들 부정 입학자의 이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흑호의 경우,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지워져 버렸지.”
“아……!”
내 말에 뒤늦게 차이점을 깨달은 몇몇 이들이 탄성을 뱉었다.
지워진 건 흑호뿐만이 아니었다.
흑호를 알고 있던 이들의 기억과 흑호가 남긴 업적, 흔적도 전부 사라졌다.
그러니 진웅팔선은 단순히 진족 하나를 지운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방관과 침묵의 마왕 시델렌티움이 천칭을 연구하는 중이야. 시델렌티움은 천칭이 고장 났다는 걸 알아냈어. 그 고장 때문에 이 천칭은 흑호를 지웠을 때와 같은 성능을 내지 못할 거야. 또, 아직도 무언가를 지울 때마다 더 큰 대가를 받고 있다고 해.”
부정 입학자의 이능을 지울 때에는 거스름돈을 받았다.
대가를 더 받는 천칭으로 재 봤을 때도 그 이능의 가치는 바닥에 가까웠나 보다.
나는 흑호에 관해 더 이야기하기 전에 말해 둬야 할 아주 중요한 말을 하기로 했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백호군을 움직여 천칭에 관해 알아보았다.
“굳이 천칭에 관해 조사하고 설명한 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야. 모두가 흑호를 잊은 건 저쪽에서 그만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라는 걸 명심해.”
“조의신…….”
황지호가 여러 감정이 섞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사라진 존재 X, 흑호는 점점 제 존재감을 되찾고 있었어. 그래서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건 알았지만, 나는 굳이 개입하지 않으려 했어.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사건이 산재한 상황인 데다가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돌아올 대상을 괜히 재촉했다가 일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주변이 조용해졌다.
용제건은 말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아 보였는데, 내가 할 말을 듣고 싶어서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김신록은 용제건을 진정시키기 위해 옆구리에 압핀을 박아 넣으려 했으나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흑막이 흑호의 각성을 이용해 수를 짤 가능성이 있고, 어쩌면 흑호는 모종의 이유로 제힘을 되찾는 걸 두려워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서두르기로 했어.”
나는 혼자 싱글벙글한 용제건을 보며 말했다.
“용궁에 방문했을 때, 황룡의 말을 듣고 생각했어요. 만약 흑호가 있다면 흑룡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요. 어쩌면 같은 방위와 색을 상징하는 현무와도 비슷할 것 같았죠.”
“흑룡과 현무 씨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을걸? 현무 씨는 점잖은 편이잖아. 이능파 색이나 냉기를 다룬다는 점, 연주를 잘한다는 것 정도는 비슷하긴 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실제로 유적형 이계 시뮬레이션 속의 흑호도 같은 특징을 지녔었죠.”
검은색 계통의 이능파.
한국 대표팀의 공격대의 발목을 잡던 얼음 폭풍.
까다로운 신인의 노래에 반주할 정도의 연주 실력.
“그리고 유적형 이계 시뮬레이터가 진행되는 동안 흑호는 관악기를 연주했어요.”
“보스 에너미의 연주는 이명이 섞여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을 텐데요. 편집하면서 소리를 걸러 내려고 시도했지만, 잘되지 않았어요.”
“기록 기기로는 잘 담기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귀가 좋은 연주자 플레이어가 그 소리를 들었지.”
얼후를 더 잘 다룬다는 야오러치는 흑호의 연주를 들은 후부터 마치 대항하듯이 디즈를 쥐었다.
상대가 관악기를 잘 다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경쟁하는 것처럼 디즈를 고집하는 야오러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누군가의 존재가 누락되어 있었다면, 아마 그 존재는 외적 사이에 잠입해 정보를 모으고 있었을 거라고 했지.”
이건 당시 수장이었던 은호가 느낀 위화감을 바탕으로 호족이 한 추측이었다.
시뮬레이션의 황호는 흑호의 존재를 감추려 했고, 은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잠입을 시키지 않은 게 이상하다고 여겼다.
“외적은 호족도 기록에 제대로 남기지 못했을 만큼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였어. 게다가 저쪽에선 역으로 얼굴을 훔쳐 댔지. 외적으로 위장해서 섞이는 건 어려워. 정보를 모으기 위해선 기척을 죽이고 숨어들어야 했을 거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흑호 님께 기척을 죽이는 힘이 없다면, 저는 적호 님의 적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정보 수집을 하려 했겠죠.”
흑호는 누구보다 기척을 잘 숨겼다.
은호가 신뢰하여 중요한 역을 맡길 정도라면 진족을 속일 만한 능력자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흑호가 어느 정도 존재감을 되찾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호족과 엮였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흑호를 잊었는데도?”
“응, 근거는 없지만 그래. 너랑 공청훤 선생님도 호족과 가까이에 있었잖아.”
이 말을 들은 청호가 다소 기운이 돌아온 표정을 지었다.
은호와 공청훤처럼 온화한 얼굴로 내 말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뮬레이터에서 보스 에너미를 목격한 플레이어들은 흑호를 ‘어린애’라고 불렀어.”
“진족은 겉모습을 자유로이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흑호가 어린 모습을 했다고는 단정 짓는 건…….”
“보스 에너미를 토벌한 건 하늘이 열리기 전이에요. 호족이 진족으로서 취급받기 전이죠.”
적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미 내가 한 말을 통해 내가 누구를 언급하려 하는지 알아챈 이들도 있었다.
“진웅팔선이 눈을 뜨고 있다는 건, 흑호는 이미 자신을 되찾고 있을 거야. 내가 언급한 특징을 이미 갖추고 있겠지.”
나는 하나하나 그 특징을 입에 담았다.
“겉모습은 어린아이. 냉기에 강하며 다루는 이능파는 검은색 계열.”
먹물색 같은 이능파를 감고 맨발로 천익산을 뛰어다니던 작은 실루엣이 떠올렸다.
그 아이는 불이 싫다고도 했다.
또, 나는 그 아이가 추워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동생이 생각나서 새 옷을 사 주고 싶었지만, 결국 장난감을 사 줬다.
“관악기를 다루는 솜씨와 기척을 죽이는 능력이 탁월한 존재.”
흑호는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관악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후예들에게 관악기 중 하나인 풀피리 부는 법을 가르쳐 공청훤과 같이 노래했다.
또한, 시체놀이를 지나치게 잘 가르치는 바람에 황지호나 적호, 옥토연도 후예들이 죽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저택을 뒤집어 두었다.
그 외에도 후예를 꼬드겨 짓궂은 장난을 여럿 하여 황지호의 관자놀이를 아프게 했다.
‘그럼에도, 호족은 곁에 두었지.’
내가 호족의 신임을 얻기 전에 그런 짓을 했다면 무슨 꼴을 당했을까?
흰 호랑이의 훈련에 어울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굳이 감시하고 지킬 필요가 있다면 호족 하나를 붙여 천익산 구석에 처박아 두면 그만인데, 호족의 신임을 사지 않는 한 올 수 없는 저택의 본채에, 그것도 귀한 후예 옆에 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호족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아이에게 정을 붙여서 체재를 허락했다.
호족들은 오랜 시간 흑호를 잊은 채로 객관성을 잃었지만, 완전히 잊지는 않은 셈이었다.
“그리고 호족에게는 또 다른 전우가 있어. 바로 영산인 천익산이야. 전우가 사라지려 한 순간, 천익산이 손을 내밀었을 거야.”
유적형 이계 시뮬레이션이 재현한 개천신화 속, 천익산은 흑호와 같이 싸웠다.
수천 년이 걸렸지만, 천익산은 제 기운을 나눠 줘 전우를 이 땅에 나타나게 하는 데에 성공한 게 아닐까.
‘그때 호랑이 인형 옷을 입지 않길 잘했다.’
호족들은 이전에 나한테 검은색 호랑이 옷까지 입히려고 했다.
나는 이를 사양하고 까마귀 인형 옷을 입었다.
그 아이가 서운해할 일을 늘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산령을 바라봤다.
“흑호.”
산령을 흑호라고 부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산령을 흑호로서 인식한 순간.
산령의 실체를 감추듯 주변을 휘감고 있던 먹색의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졌다.
흑호와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던 존재에게는 영향이 없었지만, 신화계 호족들의 얼굴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파아아아……!
흑호의 주변에서 거대한 힘이 요동쳤다.
먹물과 같은 이능파가 흑호에게 마치 색과 실체를 입히는 것처럼 보였다.
흑호의 각성에 다들 눈을 떼지 못했다.
공청훤이 비틀거리는 흑호의 작은 몸을 지지하고, 괜찮다고 언령으로 속삭이며 진정시키려 했다.
공청훤의 언령이 품은 따스한 빛과 어지러운 파동을 남기는 흑호의 힘이 여러 차례 뒤섞인 후에야 흑호가 진정했다.
흑호는 수많은 감정이 뒤범벅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친우들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뚝 멈췄다.
“아, 아아아!”
적호와 눈이 마주치자 흑호가 비명을 지르듯 오열했다.
적호가 자신을 보며 우는 흑호를 보고 당황하고, 다른 호족들도 반응에 곤란해하며 우왕좌왕했다.
그때, 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흑호 님, 보고를.”
은호는 수장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흘리던 흑호가 은호를 보자 겨우 진정하여 말했다.
“웅녀를 구하러 가야 해! 진웅팔선이 웅녀를 죽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