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07
107
죽음의 의사
사의와 역병 의사는 근원 세계에서도 드문, 각자의 분야에서 유일한 귀중한 인재들이다. 과거 있었던 두 번의 전쟁에서, 특히 과학과의 전쟁에서 두 사람의 활약은 엄청났다.
역병 의사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서, 사의는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귀찮아진다고 완장을 거부했지 그게 아니라면 위원회에서 간부 자리 하나는 차지했을 위인들이었다.
전쟁 당시 특이했던 건 사의의 태도였다. 그는 사람을 치료해주고 치료비를 받았다. 절대 무료는 없었다. 크든 작든 치료비를 받아냈고, 받아내지 못하면 기껏 치료한 환자에게 저주를 걸었다.
세계의 존망이 달린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그때도 사의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사의에게서 치료비를 떼먹는 건 그와 원수를 지는 행위였다.
“바보가 아니라면 사의에게 일을 맡길 때부터 그 정도는 조사했을 텐데.”
사의가 치료비를 받는 건 그의 자존심 때문이지, 그는 돈에 미친 사람은 아니었다. 사의의 치료비는 그 사람이 낼 수 있는 금액을 넘지 않았다. 그 범위에서 사의의 기분에 따라 가격이 널뛴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였다.
“사의의 치료비는 지불 능력이 있는 것으로만 한다. 맞아. 조사는 했지.”
“그런데도 못 주겠다는 건가?”
마즈믄의 살의가 현을 향했다. 검은 피부와 검은 눈은 마족의 상징, 그게 아니라도 그에게선 마족 특유의 마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족이 됐다고 해서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의 영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일렉시아 1톤의 가격이 얼마인 줄은 아나?”
“그래도 사의가 요구했다면 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
“그걸 사들이면 기업의 자금이 바닥난다! 그리고 마약 카르텔과 매음굴 놈들에게 잔뜩 공격을 받겠지. 우리 패밀리는 끝나는 거다. 겨우 시체 하나 부검한 걸 가지고 패밀리를 버리라는 거냐?!”
마력이 담긴 목소리에 방이 진동했다. 유리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대화는 무리겠군. 우리 요구는 하나다. 사의를 만나고 싶다.”
“요나! 이 사람들을 사의에게 데려가!”
아래층에 있던 비서가 올라왔다. 비서의 안내에 따라가는 현에게 마즈믄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사의를 만나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너희 책임이다. 채무도 네게 돌려주지. 기대해.”
“좋을 대로.”
마즈믄의 협박이 현은 우습기만 했다. 사람이 죽거나 빌딩 한두 개 무너지면 그냥 보상해주면 되는 거고, 사의가 발작해 마즈믄이 죽으면 돈을 안 내도 되니 그건 그것대로 좋다. 협박거리도 안 되는 협박이었다.
요나라는 비서는 악마였다. 엉치뼈에서 치마를 뚫고 나온 꼬리가 그녀가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여긴 마족이 많은 것 같군.”
눈앞의 비서를 포함해 총수인 마즈믄도 마족이었고, 죽은 리피테르도 마족이었다.
“마족이 되면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마신이 살아 있었다면 모르지만, 여기선 스스로 원해 마족이 되는 사람이 꽤 있답니다. 잃을 건 없고 힘만을 얻으니 원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요?”
“딱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군.”
힘을 얻기 위해 마족이 되길 택한 사람은 전쟁 때도 꽤 있었다. 그러나 딱히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도 영혼을 바꾼다는 행위 자체가 마법적으로나 주술적으로나 무공적으로나 좋은 행위는 아니었고, 사도급의 능력을 지닌 마신의 신자가 있다면 마족을 지배하는 것도 가능했다.
종족의 언 없이 종족을 지배하는 것. 마족과 마신의 신자들 사이에만 있는 특이한 연결이었다.
“여기입니다.”
몇 겹의 밀폐된 공간을 지나자 사의가 있다는 장소의 문이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심해진 사기는 눈으로 보일 정도로 밀도가 진해져 있었다.
“뮐리오네에서는 사의를 방치하고 있는 건가?”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니라, 끌어내고 싶어도 끌어낼 수 없습니다.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어제 빌딩이 부서져 빌딩 상층부가 도시를 덮칠 뻔한 적이 있습니다. 전부 사의를 끌어내려고 사람을 투입했다 생긴 일이죠. 그는 저 안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고 있습니다.”
“결국, 사의를 직접 설득해야 한다는 소리군.”
“꼭 좀 성공하셨으면 좋겠군요. 그가 저러고 있는 건 저희도 골칫거리라.”
“가벼운 마음으로 사의를 끌어들인 건 그쪽이면서 말도 잘하는군.”
“저희도 사의가 적당한 요구를 했다면 충분히 들어줄 생각이었습니다.”
요나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현은 그녀를 비웃었다.
“적당한 마음으로 사의를 불렀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야.”
사의는 확정된 죽음을 비껴가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의원이다.
의원과 의사는 다르다. 근원 세계식 구분법에 따르면 그렇다. 정해진 치료법을 밟아가는 것이 의사라면 의원은 치료를 위해 뭐든 한다. 현대 의학에 해당하는 과학적 치료는 물론이고 침술, 한방, 주술, 저주. 환자를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의원이다.
둘 중 누가 더 뛰어나고, 누가 못하고는 없다. 무슨 기술이든 배운 사람 나름이고, 의사들이 주술 등의 방법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사의의 의술은 죽음마저 피해가게 한다는 것이다. 가볍게 불러 부려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뮐리오네 패밀리를 모욕하는 겁니까?”
“아니,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 뿐인데.”
더욱 언성을 높이는 요나를 무시하며 현은 문으로 다가갔다. 사기가 감도는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농도 짙은 사기가 몸에 닿았고, 피부가 짜릿짜릿했다. 이 사기는 그저 사이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사기 자체에 죽음이 짙게 묻어 있었다.
진득하니 피가 흐르는 전장에 와 있는 듯했다.
사기가 안개처럼 낀 방 안쪽에서 붉은 안광이 흔들렸다. 음침한 목소리가 사기와 죽음을 타고 현의 고막을 때렸다.
“죽으러 왔나? 아니면 얌전히 일렉시아를 내놓을 거냐?”
“대화를 하러 왔다.”
현은 문을 닫았다. 뒤에서 에이네가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현은 사의에게 다가갔다. 스켈레톤이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몸에서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붉은빛이 대신하고 있었다.
사의의 안광이 번뜩였다.
“이 마력 운용. 마녀들의 것인가. 특이한 놈이군. 해부해보고 싶어졌어.”
“사의. 제안할 게 있다.”
“부검료를 받기 전까진 누구도 치료하지 않는다. 의사나 의원을 찾는 거라면 딴 데 가서 알아봐.”
“이들이 치료비를 낼 생각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건데.”
역병 의사는 몇 차례 만났었고, 치료받은 적도 있지만, 현은 사의와는 만난 적이 없었다. 현이 사의에 대해 아는 건 유명한 소문과 위원회가 조사한 정보가 끝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사의는 절대 멍청하지 않았다.
“네가 나에 대해 뭘 들었는지 몰라. 하지만 난 여기서 돈을 받아내야겠어. 그거면 끝이야. 알겠어? 알았으면 썩 꺼져!”
사의의 안광이 타올랐다. 눈구멍에서 튀어나온 안광이 이마까지 기어 올라갔다.
사의는 막무가내였다.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 중 하나가 괴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동거지였다.
“원하는 게 뭐지? 벌레에 대한 정보? 뮐리오네 기업의 몰락? 아니면 다른 무언가?”
“난 그딴 게 뭔지도 몰라. 그냥 돈을 받고 이 더러운 장소를 뜨면 끝이라고! 알아들었어?!”
스켈레톤에게는 얼굴 근육이 없다. 타오르다 식길 반복하는 안광을 빼면 사의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만한 표시는 없었다. 안광과 말투로는 사의가 극도로 짜증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에게는 그런 신호들이 전혀 다르게 읽혔다.
-더 내 흥미를 끌어봐라.
그래서 현은 냅다 돌직구를 던졌다.
“역병 의사가 저주에 걸렸다.”
타오르던 안광이 거짓말처럼 꺼졌다. 눈구멍의 안광이 작은 점으로 변해 반짝였다.
“뭐?”
“상당히 위독한 것 같더군. 치료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잠시 반짝이던 안광이 잔잔히 타올랐다. 사의가 현을 잔뜩 비꼬았다.
“내가 그놈을 왜 치료해 줘야 하지? 나를 만나러 왔으면서 내가 역병 의사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모르고 왔어?”
현은 대답하지 않고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맨 얼굴이 드러났음에도 사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뉘 집 귀한 자식이길래 자신만만하게 면구까지 벗어던지시나? 왜, 내가 얼굴만 보면 벌떡 일어날 줄 알았어?”
“골방에 박혀 있어서 소식도 느리군. 내가 아는 사의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막고 사는 인간은 아니었는데.”
현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사의에게 던졌다. 잠력이 담긴 종이를 사의는 가볍게 받아냈다.
“별 볼 일 없는 거면 산 채로 포를 떠주마.”
엄포를 놓으며 종이를 펼쳐본 사의의 안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현을 보았다.
“…… 이건.”
현이 사의에게 던진 건 새로 배포된 수배서였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에는 범죄자도 많지만 현상금 사냥꾼도 많다. 범죄자가 많은 장소에 범죄자를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이 모인다.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에는 어지간한 범죄자의 수배서는 다 있었고, 얼마 전에 배포된 현의 수배서 또한 존재했다.
현의 새로운 수배서의 내용은 기존 수배서의 내용 변경. 백지 수배서를 철회하고 수배범의 얼굴과 현상금을 재조정한다는 것이었다.
얼굴은 현의 현재 얼굴이었고, 현상금은 대기업과 제국도 무시 못 할 금액이었다. 백지 수배서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현을 잡을 가치는 있었다.
현의 수배서는 정상이 아니었다. 사의도 이 수배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김우현이 죽고 그를 사칭하는 자들이 못해도 기백은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위원회가 현상금을 건 적은 없었다.
가만히 두어도 김우현을 믿는 녀석들에게 죽을 놈에게 현상금까지 걸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번 가짜는 다른 가짜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너는 누구냐. 그것만 말하면 네 요청을 진지하게 검토해보지.”
현이 고개를 저었다.
“검토 정도로는 부족해. 나는 확신을 원한다.”
사의는 말이 없었다. 붉은 안광이 어둠에서 흔들렸다.
“조건이 있다. 나는 내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대로 갈 수 없다.”
“그래서?”
“뮐리오네 기업의 멸망. 그걸 보장해준다면 역병 의사를 치료하지. 그리고 치료비도 받지 않겠다.”
현은 양자폰을 꺼냈다. 양자폰을 본 사의의 안광이 한 차례 일렁였다.
현은 강기로 소리를 차단하고 리센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라는데.”
-뮐리오네는 어차피 정리할 기업이었다. 내 선에서 처리하겠다. 그리고 네 정보에 대한 값도 내 쪽에서 대신 치르지. 원래 내가 내야 할 치료비였으니까.
“그럼 그렇게.”
전화를 끊은 현이 사의와 마주했다.
“말하기 전에 하나. 약속의 이행을 죽음의 불멸성에 걸고 맹세해라.”
“날 못 믿겠다는 거냐!”
사의의 안광이 한 차례 크게 튀었다.
“근원 세계, 그레이트 다운타운에서 믿음을 논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사의는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네 정체와 뮐리오네 기업의 몰락을 치료비로 역병 의사를 치료하겠다. 이것을 죽음의 불멸성에 걸고 맹세한다. 자, 이제 만족하나? 만족했으면 약속이나 지켜! 넌 누구지? 김우현 본인인가? 아니면 거대한 배후를 둔 미끼인가!”
현은 대답을 행동으로 보였다.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백이여 타올라라.”
현의 수명이 타올라 마력이 되었다. 이건 단순한 증명이다. 부족한 마력을 약간만 보충하면 된다. 환계의 문을 열 필요도 없다. 이미 계약은 되어 있다. 현은 영혼으로 연결된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아스모스. 여기 너무 어둡고 칙칙한데?”
“나는 어두운 곳도 좋아하지만, 집사가 싫다니 어쩔 수 없지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