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34
134
판타지적 자본주의
-목표 지점에 명중 확인. 정말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김 교수의 의식은 물질적인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엄연한 구분으로는 물질적인 세계이긴 했다. 그러나 그 위상이 조금 특별했다. 그의 의식은 전자 세계에 있었다.
뇌 신호를 실시간으로 서버에 전송해 의식을 서버에 두는, 과학이 사용하는 의사소통 방법의 하나였다.
김 교수의 의식은 양자 통신으로 모함의 서버에 연결되어 있었다.
-북대륙 개발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3년 이내로는 시작될 일이었다.
-3년이면 대륙 하나를 지배하고 다른 대륙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위원회까지 무너진다면 과학은 확고하게 입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김 교수가 과학의 성인의 의견에 정면으로 이견을 제시했다. 과학의 성인 앞에서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한 신자는 다섯이 넘지 않았다.
제조 단계의 에이네를 마무리하고 기동 실험까지 했으며, 현재는 과학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북대륙 거점을 관리하고 있다. 과학 안에서 김 교수의 영향력은 사도라는 말로 정리되는 간단한 게 아니었다.
질문에 돌아온 답은 과학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선문답이었다.
-김 교수, 과학이란 뭐지?
-완전한 이론에 세상을 맞추는 것입니다.
-재앙으로서의 과학은 그렇지.
재앙으로서의 과학이 가진 이론은 완벽하다. 과학의 화신은 세계의 진리를 알고 있었고, 화신이 죽으며 많은 이론이 소실되었지만 과학의 성인이 가진 지식도 진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탐구는 필요치 않았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불확정 요소, 마력을 사용하는 생명체만 모두 없애면 세계는 모든 게 과학의 뜻대로 돌아가는 이상향이 된다.
재앙으로서의 과학은 아직도 마력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지구에서 의미하는 과학의 의미는?
-이론과 관찰의 연속입니다.
지구의 과학에 관찰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4차원 같은, 관찰되지 않은 것조차 가정하고 이론을 펼쳐나간다. 이론과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또는 부정하기 위한 관찰을 이어가는 것이 지구의 과학이다.
재앙으로서의 과학이 과학 자체로 완성되었기에 변화를 거부한다면, 지구에서 의미하는 과학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끝없이 변화한다.
-과학은 한 번 실패했다. 실패한 완벽을 완벽이라 부를 수 있을까? 완벽하지 않은 진리에 어떤 의미가 있나?
김 교수의 의식이 튕겨 나왔다. 콤마 몇 초간의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김 교수는 익숙한 통 속에 있는 자신을 자각했다.
‘과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1번째 최후의 안드로이드, 에이네의 설계도를 받았을 때부터 품었던 오랜 의문이었다.
***
이성철은 떨어지는 빛의 기둥을 보았다.
‘누가 또 사고쳤군.’
마력을 동반하지 않은 레이저를 쏠 수 있는 사람은 근원 세계에도 몇 없다. 과학의 사도, 또는 그들과 친분이 있는 자들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그게 가능한 사람이 둘 있었다.
이성철은 레이저를 보고 자연스럽게 현과 에이네를 떠올렸다.
“……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저게 말로만 듣던 과학의 무기일까요?”
이성철의 앞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그게 이성철의 관심을 되돌렸다. 이성철이 영업용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겠죠. 하던 일이나 계속합시다. 여기에 사인만 하면 당신이 가진 주식은 공식적으로 제 소유가 됩니다. 동의하십니까?”
“네, 동의합니다.”
“정말로요?”
“제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은근한 흔들기에 남자는 성난 어투로 대답하면서도 손은 탐욕스럽게 계약서를 집어 들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땅에 떨어진 주식을 두 배나 주고 매입하겠다는데 거절하면 바보다. 그러나 이성철 입장에선 백 배를 주고라도 매입해야 하는 주식이었다.
히름에 한차례 몰아칠 폭풍이 이 기업에서 시작된다. 돈을 위해서도, 미래를 위해서도 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식은 필요했다.
“공증되었습니다.”
거래가 끝나고 증인으로 자리에 참석한 집행자가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음을 알렸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이성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 태도에 남자는 찝찝함을 느꼈지만, 옆에 놓인 수표를 보고는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
“뭐라던?”
“자율 행동. 과학이 왜 이번 일에 끼어들었는지를 조사하라는데요. 이거 눈 가리고 아웅 아니에요? 형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데요.”
“불만이면 네가 살아 있다고 윌리엄에게 말하지 그래. 그럼 있는 정보 없는 정보 다 내줄 텐데.”
“그만큼 일이 늘어나잖아요. 그건 싫어요.”
우가혁이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떨어진 레이저가 이동 중이던 6번 부대를 삼켜버렸다고 위원회에 보고했고, 방금 막 다시 행동 지침을 전달받은 참이었다.
현에 대한 보고도 빼먹지 않았다. 현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잘 놀고 있던 6번 부대가 이동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히름이 기업 국가가 된 이후로 1, 2, 3번 부대를 제외한 신위 부대는 자본주의에 삼켜졌다. 그들이 현장에 나서는 건 신위로서 해야 할 최저한의 일을 제외하면 돈이 되는 일이 전부였다.
자본은 힘과 명예의 상징이던 12신위에게서 명예를 뺏어갔다.
6번 부대가 움직였다면 움직인 이유가 있어야 했고, 그게 현이었다. 숨길 것도 없었다. 우가혁 말고도 퇴폐 업소에 있던 종업원들이 전화 내용을 들었을 테니 언제고 밝혀질 내용이다. 숨겨서 의심을 받을 바에 처음부터 솔직하게 나가는 게 좋았다.
거짓이 좀 섞이긴 했지만.
“이제 어쩔래?”
“형은요?”
“히름이라는 지명을 지도 위에서 지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현의 머리에는 이미 반군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반군의 규모가 어떤지는 모른다. 그래도 대세를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다면 회귀자가 뭔가 알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남자의 능력이 걸렸다. 인지도를 보는 능력이라고 했지만, 남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건 절대로 그런 단순한 능력이 아니었다.
몸이 바뀌고 변장까지 한 현을 알아보고 신위가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리며 세계의 흐름까지 읽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이름도 없다는 건 이상했다.
위원회에 가면 당장 특채 채용. 다른 기업과 나라에서도 환영할 능력이다.
남자의 말을 들어보면 본인도 그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하고 있는 건 회귀자가 언급도 없는 반군.
상대가 자본을 가지고 논다면 인지도나 흐름을 보는 능력은 상당한 힘을 발휘할 터인데도 그렇다.
회귀자도 파악하지 못한,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 현은 그렇게 보았다.
“반군이라고 알아?”
“알죠. 위원회도 알고 히름도 알아요. 무능력한 쥐새끼 비슷한 거라 무시하는 거지. 형, 설마?”
현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바로 접촉할 건 아니야. 내 쪽에서 접촉할 방법도 없고.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그거 혹시, 모험의 냄새도 나요?”
“구린 냄새라면 나는데.”
“영웅이 휘말리는 일은 대개 구린 일에서 시작하는 거죠.”
“나 농담 아니다.”
“저도 반은 진심이에요. 자율 행동이라는 이상한 명령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위원회의 명령. 성과를 내야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형을 따라다니다 보면 사건 하나는 건질 수 있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인데.”
“내가 무슨 만악의 원흉처럼 말한다?”
“원흉은 아니라도 만악을 끌어들이거나 만악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되죠. 오지랖을 빼고서라도 형 근처는 조용할 날이 없었잖아요.”
현은 다른 초월자들보다 숨겨둔 비밀이 두 배는 많다. 남들의 두 배는 되는 사건을 겪었으니 그럴만했다. 그중 반은 현의 오지랖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나머지 반은 오지랖과 무관하게 일어났다.
현이라고 할 말이 없진 않았다.
“나머지 절반은 누구 씨들의 부탁으로 동행하다가 일어났지. 뇌음사가 자취를 감추고 소림과 무당이 무기한 봉문을 선언하게 만들어 불가 무공과 도가 무공의 맥을 끊어버린 사람이 누구였더라? 누구나 익힐 수 있던 무공들이 지금은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팔린다는 모양이던데.”
“뇌음사는 주지가 그리 선택한 거고, 소림하고 무당도 자기들이 약하다고 알아서 봉문한 거잖아요.”
“그 배경에는 다짜고짜 쳐들어가 무공을 내놓으라 한 누군가가 있었지. 예의도 모르는 무뢰배의 무공에 십팔나한진과 무당혜검이 파훼당한 도사와 스님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우가혁이 손사래를 쳤다.
“끝, 이 주제는 이걸로 끝! 아무튼 전 형 따라갈 거예요.”
“네가 그렇다면.”
현이 능청스레 말했다. 우가혁이 따라와 준다면 현으로서도 환영이었다. 우가혁은 수백 개의 무공을 알고 있으며 그것들을 하나로 만들어 발전시킨 천재다. 천마신공의 연습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몸이 바뀌어 마력 적성이 떨어진 현과 달리 죽기 전의 몸을 복제한 데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영혼 이전까지 마친 우가혁은 마력 적성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레벨만 올리면 우가혁은 전생의 그 경지에 그대로 도달할 수 있다.
게임으로 비교하면 현은 캐릭터를 다시 키우며 스텟과 스킬을 모두 다시 찍는 중이고, 우가혁은 원래 키우던 캐릭터가 레벨만 떨어진 것이다.
전혀 다른 스텟으로 새로운 스킬을 연습해야 하는 현과 이미 익숙한 스텟으로 익숙한 스킬을 펼치기만 하면 되는 우가혁. 같은 조건이라면 우가혁이 더 강하다.
12신위와 황족, 귀족이 기회를 노리는 히름에서 동행이 우가혁이라면 뒤가 든든했다.
“이제 어디 가요?”
“네가 추천해봐. 히름이 어떤 곳인지 노골적으로 알 수 있는 장소로. 다회차 회귀자는 카지노를 추천하더라.”
우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름에 파견되어 있던 시간이 한 달이 되어간다. 여행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한 나라를 평하기엔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카지노 괜찮죠. 그럼 다른 한 군데를 가봐요. 빛을 봤으면 어둠도 봐야죠.”
“그게 빛이었냐?”
카지노는 다른 도시였다면 당장 영주나 관리가 군을 파병해 작살을 내놓았을 마경이었다. 목숨을 돈으로 거래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목숨값마저 착각하게 하는 마경이 빛이란다.
“형은 자본을 얕보고 있어요. 기업이 영토를 통치하는 게 아니에요. 기업 국가. 기업과 국가가 합쳐진 형태. 권력을 쥔 자본, 자본을 쥔 권력. 지구에서 그런 건 질리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신분제가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는 역시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히름의 수도 알죠? 좌표는 안 바뀌었으니 그리로 오세요.”
“너는?”
“먼저 가 있을게요. 역시 그 광경은 혼자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오자마자 뒤통수 조심하세요. 변장도 좀 하시고.”
뒤통수란 말에 현은 튜토리얼 직후가 떠올라 뒤통수를 문질렀다. 튜토리얼 직후 퍽치기를 당한 일이 떠올랐다.
우가혁이 사라지고 잠시 후, 마음의 준비를 마친 현은 변장을 한 뒤 공간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근원 세계가 근원 세계한 거에 새삼 놀랄 마음은 없지만, 이건 좀 놀랍다.”
여긴 히름의 수도다. 그러나 우가혁은 히름의 어둠으로 이곳을 꼽았다. 현은 오자마자 그말이 맞음을 알았다.
기업과 국가. 압도적인 힘으로 성립하는 근원 세계의 국가. 그리고 철저히 수직적인 기업.
두 가지가 합쳐진 결과는 신분제였다.
지구의 것을 몇 배나 뛰어넘는 돈으로 성립하는 신분제.
수도의 풍경은 그걸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