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60
160
삼자삼색
오크의 몸에서 죽은 프로만은 캡슐에서 빠져나왔다. 주르륵. 그의 코에서 죽은 뇌충이 빠져나왔다. 이것도 개량의 성과였다.
수석 연구원인 남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어떠셨습니까?”
“실험은 실패했네. 다시 오크의 몸을 준비해야겠어. 그런데 자네는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프로만은 처음 뇌충의 실험이 성공했을 때처럼 들떠 있었다. 수석 연구원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세상은 우연의 산물입니다.”
“참신한 견해군. 하지만 난 생각한다네. 자신이 믿으면 그게 운명이 아닌가.”
“뭐든지 믿기 나름이겠죠.”
“그래, 믿기 나름이지. 그래서 말이야. 난 믿기로 했네.”
“무엇을 말입니까?”
“지구 최강과 노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그는 갑자기 프로만이 노망이라도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프로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프로만이 그에게 명령했다.
“유티안이 돌아오면 바로 실험 결과를 기록할 준비를 하게. 그도 상당한 성과를 올린 모양이니. 그리고……..”
이어진 침묵에 수석 연구원은 침을 삼켰다.
“우리도 슬슬 출생신고를 해야겠지. 세상을 상대로.”
그동안 해왔던 연구들이 세상에 보여 진다. 수석 연구원은 한 명의 과학자로서, 또 과학의 신자로서 전율에 몸을 떨었다.
***
현은 바로 투신의 땅에서 벗어났다. 저 음흉하고 속 모를 투신과는 되도록 멀어지고 싶었다. 현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각성제 과다 복용에 믿음의 부작용까지.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회복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충분히 쉬면 사흘에서 나흘. 몸도 몸이지만 정신 문제라 약으로도 안 돼.”
“질문을 바꾸지. 우리가 사흘이나 편히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럴 리가.”
현은 고개를 저었다. 투신의 땅에서 벗어났다. 투신의 땅이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놈들이 사흘씩이나 가만있을 리 없었다.
‘몸이 정상이 될 때까지는 투신의 땅에서 정양해야 했나?’
그것도 난센스. 오르가의 속셈도 모르면서 그의 구역에 있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솔직히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더 나을 정도다.
“빨리도 오는군.”
이성철이 품에서 꺼낸 지뢰를 땅에 던졌다. 지뢰는 땅에 닿자 알아서 땅으로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수인들이 몰려왔다.
“과학에 엘프에 요정에 수인에 인간에 드래곤만 오면 모든 종족 그랜드 슬램 아냐?”
“드래곤하고 원한 살 일은 안 했는데. 근원 세계니까 올지도 모르고.”
달려오던 수인들이 이성철이 던진 지뢰를 밟고 폭사했다.
모르면 당한다.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만, 여전히 과학을 상대할 때 가장 적절한 말이었다.
대충 밟으면 터진다는 걸 알아챈 수인들은 암기를 던지고 그걸 밟거나 허공답보를 쓰는 등 최대한 땅을 밟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과학의 무기란 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땅을 파고드는데 파고 나오지 못할 것도 없다. 땅에서 솟구친 지뢰가 하늘에 있는 수인들을 격추했다.
지뢰밭을 통과해 지척까지 도달한 수인은 원래 숫자의 반도 되지 않았다.
“엘프는 이해하는데, 수인들은 뭐가 억울하다고 이렇게 오는 거야?”
“종족차별, 수인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있다고 해도 저놈들 종류가 몇 종이냐. 수인이라는 종족으로 묶어두는 게 미안할 정도지.”
경쟁력이 떨어져 멸종한 종족도 많지만, 그래도 수인의 종류는 많았다. 그리고 수인은 본능의 재앙을 종족신으로 가질 만큼 본능에 충실하다. 이족 보행을 하고 높은 지능(동물에 비해)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에겐 동물의 본능도 남아 있었다. 피식자의 본능, 포식자의 본능.
본능을 억누르고 평범한 삶을 보내는 수인도 있는 한편 본능에 몸을 맡기고 사는 수인도 있다. 이성을 가지고 본능대로 살아가던 놈, 또 본능을 위해 이성을 사용하던 놈은 당연하게도 현의 척살대상이었다.
“쉬고 있어도 된다만?”
“적은 기다려주지 않지.”
현이 몸을 일으켰다. 허공에서 나타난 흰색 실이 수인들을 묶었다.
***
수인을 정리한 현은 대자로 뻗어 포션을 빨았다. 정신력도 마력도 회복되지 않고 체력이 약간 돌아오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와, 이 악마가 이럴 때도 있네.”
에이네가 신기해하며 뻗은 현을 내려다보았다.
“육체가 아닌 정신의 문제군. 뭘 하면 그렇게 되는 거지?”
“너에게 필요한 것.”
“그걸 말로 설명해라.”
“모르는 게 약이다. 알아서 깨우칠 수 있기를 빌어.”
이성철에게 필요한 건 믿음, 또는 의지다. 하지만 이 둘은 가르쳐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과는 사고 자체가 다른 다회차 회귀자에게 믿음에 대해 어떻게 조언하면 될지 현은 몰랐다. 어설프게 준비된 자에게 어설픈 조언을 해줄 바에 현은 침묵을 택했다.
조언은 적절하다면 도움이 되지만, 불필요한 조언과 간섭은 사람을 망친다.
“흠, 그런가.”
이성철도 깨끗이 포기했다. 현이 말하려는 바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허허벌판에서 누가 공격해 오는 것만 쭉 기다릴 거야?”
에이네가 흙을 툭툭 발로 찼다. 그럴 때마다 아까 터지지 않은 지뢰가 땅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손에 들렸다.
“그게 왜 네 주머니로 가는 거지?”
은근슬쩍 지뢰를 주머니에 챙기던 에이네는 이성철의 지적에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버리면 아깝잖아?”
“안 버릴 거니까 내놔라.”
이성철은 에이네의 손에 들린 지뢰를 자기 주머니로 가져갔다. 에이네는 아공간 주머니로 사라지는 지뢰를 보며 아쉬워했다.
다회차 회귀자와 최후의 안드로이드가 지뢰 몇 개를 두고 다투는 광경의 애잔함에 현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며 현이 말했다.
“놀이는 그쯤 하고, 우리는 엘프를 친다.”
“종족의 언 때문인가. 전에 내가 물었을 때는 시치미 뗐었지.”
“그럼, 그 위험한 게 존재한다고 순순히 말해줄까? 그게 악의를 가진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것도 그래.”
“일단 엘프의 공격을 한 번 더 기다린다. 그 후 엘프를 고문해 근거지를 알아내고 일망타진. 이걸 무한 반복.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없었다.
표적인 엘프는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자리에서 기다리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현은 만에 달하는 엘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숫자가 어째 점점 늘어난다?”
사방을 에워싼 엘프를 보며 에이네가 말했다. 엘프들이 뿜어대는 마력과 살기는 제법 사나웠다.
“역병은 없군.”
그러나 가장 걱정했던 역병의 신자는 없었다. 역병과 조율의 연합군이었다면 재앙 두 개의 대책을 마련해야 했지만, 조율 하나라면 대응도 하나다.
수십 개의 가능성이 십여 개로 줄어든다. 그것만으로도 싸우기는 매우 편해진다.
“버틸 수 있나?”
“버텨? 누가 많이 죽일지 내기를 해야지.”
뻗어 있던 현은 일어서 있었다. 이성철은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마력도 살기도 아닌 단순한 시선. 시선만으로 피부가 따끔거렸다.
“힉!”
이성철과 똑같은 시선을 받고 고개를 돌렸던 에이네는 짧게 숨을 삼켰다. 현의 몸에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시선은 여기 있는 일만 엘프를 모두 잡아먹을 듯했다. 에이네는 진짜 독기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현과 시선을 마주한 엘프들이 슬금슬금 발을 뺐다. 저 시선을 정면에서 받으면 에이네도 저럴 것 같았다.
엘프들이 망설이는 사이 현은 준비를 끝마쳤다. 기습적으로 나타난 실이 엘프 수백을 꿰뚫었다.
현은 반쯤 의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건 현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근원 세계에 소환되고 출세해 자리 잡기 전까지 쉴 틈은 없었다. 다치면 다친 몸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고, 쥐꼬리만 한 마력으로 전쟁의 선봉에 섰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날에서 현을 지탱해준 건 강렬한 의지였다.
기습으로 엘프들의 진열이 무너졌다. 현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 사전에 이야기도 안 된 갑작스러운 돌격이었다. 그러나 다른 둘도 만만치 않았다.
현이 엘프 사이로 파고들며 포위는 유명무실해졌고, 같은 편을 공격할까 공격도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걸 본 이성철과 에이네도 바로 엘프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숫자는 엘프들이 우위일지 모르나, 개개인의 역량은 현 일행이 우위. 엘프들은 공격마저 제한된 상황.
판은 마련했다. 하지만 부족하다. 현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조율의 신자들은 정령보단 마법과 무공을 선호하지만, 조율의 신자가 아닌 자연적인 신비한 종족은 정령술을 선호한다. 하늘에는 수천의 정령이 떠 있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망각한 게 분명했다. 알고 있었다면 정령 소환 같은 실수는 안 했을 것이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빛 아래서 피를 흘리며 엘프들은 혼란에 빠졌다. 수천 정령의 통제권을 한 번에 빼앗겼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일어났다.
엘프와 요정들은 정령을 역소환하려했지만, 그마저도 정령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위는 정령, 아래는 작은 괴물 셋.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격. 피아를 구분할 필요 없이 사방이 적이다. 현이 가장 좋아하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신체의 능력을 제일 잘 살릴 수 있는 싸움이기도 했다.
엘프들의 어설픈 공격은 현을 스치지도 못했다. 현은 엘프들 사이를 움직이며 손가락 끝에 연결된 실을 휘둘렀다. 검은 강기를 두른 열 가닥의 실은 가로막는 모든 걸 잘라냈다.
조율의 신자들이 현실 왜곡을 사용했다.
강제로 몸이 고정되고, 불가능한 각도로 꺾인 공격이 사방을 노려왔다.
현실 왜곡은 싸움에 강한 권능이다. 마력 반응도 없이 바뀌는 현실은 적에게 대응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압도적인 경험과 반응 속도를 가지고 있다면 의미가 없다.
현은 마력으로 공간을 고정한 권능을 떨쳐내고 다가오는 공격은 막고 피했다. 어떤 공격도 인식할 수만 있다면 이매망량의 무기로 막아낼 수 있다.
이매망량의 무기는 마력과 같이 생각의 속도로, 믿음의 속도로 움직였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이지만 현의 속도는 이 안에서 가장 빨랐다.
***
현이 휘젓고, 에이네가 돌격해 틈을 벌렸다. 이성철은 요정살의 단검을 들고 까다로운 요정만 골라서 처리했다.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전투는 이미 학살이었다.
싸움이 끝나는데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싸움이 끝났다. 심문은 1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자백기를 머리에 심는 것으로 끝.
“숲 세 개에 사람 셋. 딱 맞네.”
“제정신이냐?”
“쫄?”
“기대하는 너도 이상하다.”
“그래서 쫄?”
“아니. 누가!”
“그럼 됐네.”
유치한 도발이었지만, 이성철은 알면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 안드로이드에게 무시당하는 걸 본능이 거부했다.
딱히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그럼 다들 찬성?”
“제일 불안한 놈이 제일 의욕 넘쳐서는.”
“나를 뭐로 보고. 숲 하나 불태우는 정도는…….”
“그래, 마법사 하나 처리 못하고 세뇌당하는 안드로이드지.”
“지금 바로 출발해! 능력으로 증명해줄 테니까!”
“잡히지나 마라. 안 구해준다.”
“너나 잘하세요!”
현이 에이네를 먼저 보냈고, 다음으로 자신도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이성철이 스크롤을 찢었다.
공간을 이동한 이성철의 앞에 울창한 숲이 보였다.
공격해왔던 엘프와 요정은 세 개의 숲에서 차출되어 왔다. 그리고 현은 한 사람당 하나씩 숲을 맡아 정리하자고 했고, 에이네가 격하게 찬성했다.
이성철은 자신 몫으로 떨어진 숲을 봤다. 저 울창한 숲을, 지금부터 불태워야 한다.
“요즘 진심으로 싸운 적이 없긴 했지.”
이성철의 아공간 주머니가 열렸다. 다회차 회귀자의 모든 것이 담긴 주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