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62
162
삼자삼색
엘프와 요정의 출생비는 30 대 1 정도 된다. 그것도 태어날 때가 기준이고 성체를 기준으로 하면 숫자는 더욱 준다. 임신과 출산으로 숫자를 늘리는 엘프와 달리 요정은 특수한 상황에서 자란 꽃에서 태어나고, 종족의 특성 때문에 성장 중에 죽기도 쉬웠다.
요정은 강하다. 경험을 갖춘 요정은 강하고 까다롭다. 조율의 신자로 선택받은 요정은 강하고 까다롭고 잘 죽지도 않는다. 요정의 숫자가 엘프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많았다면 세상은 요정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엘프의 숲에서 현이 조심해야 할 건 엘프가 아닌 요정이었다.
요정을 어떻게 상대하느냐가 피해를 좌우한다.
실패? 현은 실패는 고려하지 않았다.
근원 세계가 근원 세계 하더라도 한 몸 건사해 살아나올 자신은 있었다.
‘그 암살자들이 실존한다면 모르겠지만.’
현실에선 어디서도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정령들에게서도 언질을 듣지 못했다. 계약된 정령들은 소환 절차 없이도 현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적잖은 힘을 소모하긴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정령들이 먼저 말해줬을 것이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그놈들은 이미 없다는 게 기정사실이다.
당장 현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규모면 숲에 사는 엘프의 숫자는 10만가량. 요정의 숫자는 불확실하다.
‘새삼 막막한데.’
그냥 쓸어버리는 거라면 방법은 몇 가지 있다. 그러나 무공 증진에 중점을 두고 생각하면 쉬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릴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10만이나 되는 숫자를 게릴라전으로 깎아 먹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일단 정찰부터.’
현은 엘프의 숲 중앙, 엘프들의 거처까지 침입했다. 엘프는 정령에 의존하는 면이 강하다. 그건 탐색도 마찬가지.
정령의 탐색으로는 현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정령을 지나치게 믿는 엘프들은 정령의 탐색과 자신의 감각을 쉽게 혼동한다.
정령을 완벽히 속일 수 있다면 엘프를 속이는 건 쉽다. 귀한 전력인 요정은 정찰이나 파수 같은 임무에 처음부터 투입되지 않는다.
마력 적성의 평균을 종족별로 따졌을 때, 첫 번째는 드래곤이고, 두 번째는 요정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는 막대한 차이가 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도 꽤 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세 번째는 트롤과 엘프다. 트롤의 재생 능력, 그게 다 마력 적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트롤 주술사들이 괜히 자기 피를 주술의 매개로 애용하는 게 아니었다.
요정은 그 자체로 강한 전력. 잘 먹고 잘 크는 것이 요정의 일이다. 마력과 육체를 모두 가진 드래곤과 달리 요정의 육체는 자기 마력조차 못 버티고 터져버릴 정도로 연약하다.
엘프의 마을은 현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엘프 하나에 노예 둘. 엘프들이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차별의 형태가 죽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상대의 인권을 짓밟으며 끝없이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도 엄연한 차별의 한 형태이며, 극단적인 차별주의자들에게는 그런 노예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기까지 하다.
노예들이 잡다한 일을 해줘야 그들의 정신은 오롯이 차별과 혐오로만 향할 테니까. 혐오하는 대상이 해주는 밥을 먹고, 차별하는 대상이 빨래한 옷을 입는다.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만들어준 생활 기반으로 그들은 차별을 계속하고 혐오를 더 키운다.
재미있는 건 차별주의자들은 그걸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월한 자신들이 열등한 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생각이 그들의 사상 기저에 깔려있다.
진짜 중의 진짜는 혐오 대상의 손이 닿았던 음식조차 혐오하지만, 현이 만나본 바로는 그런 진성들은 극히 일부다.
우월감과 열등감에 기인하는 대부분의 차별은 저런 식으로 이뤄진다.
현은 마을 내부를 익히는 한편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마을의 계급을 파악했다. 현이 봤을 때 특별한 점은 없었다.
‘정석대로 가면 되나.’
요정 먼저 잡고 엘프는 숲과 함께 전소. 현의 무력으로는 버거운 일이지만 계획을 잘 세우면 못할 것도 없었다. 몇 명쯤 도망쳐도 상관없다. 도망쳐서 다른 차별주의자의 마을을 만나면 그것도 좋다.
거기도 같은 방법으로 전소시키면 된다. 현이 애용하던 방법이었다.
현이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돌연 하늘의 정령들이 부르르 떨었다. 현은 처음 보는 그 신호를 간단히 읽어냈다.
침입자 발생. 북쪽 구역.
엘프들이 부산해졌다. 일상을 내팽개치고 무기를 챙겨 모두 북쪽으로 향했다.
현도 조심스레 엘프들의 뒤를 따랐다. 거주 구역에서 움직이지 않던 요정들이 다수 참전해 있어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다.
숲의 북쪽 경계선에선 엘프와 수인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놈들도 차별주의자군.’
엘프와 수인은 생김새부터 싸움법까지 모든 게 달랐지만, 한 가지 같은 게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고기 방패 노릇을 하는 노예였다.
엘프만이 아니라 수인들도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양측 노예들이 부닥쳤다. 엘프에게는 수인 노예가 많았고, 수인에게는 엘프 노예가 많았다.
‘기구하군.’
현은 작게 혀를 찼다. 최초에 저들이 어떻게 싸우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현재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는 알았다.
수인을 노예로 잡고, 엘프를 노예를 잡고, 각자 잡은 노예를 앞세워 다시 싸우고. 그렇게 얻은 노예로 다시 전력을 보충하고.
효율적인 미친 짓이다. 혐오하는 상대를 죽이며 한 번 만족하고, 붙잡은 노예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칼을 들이미는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만족하고.
말로는 표현 못할 광기와 비이성의 표출이다.
싸움이 격화되었다. 참았던 본능을 터뜨린 본능의 신자들이 날뛰었고, 엘프와 요정의 현실 왜곡이 공간을 비틀었다.
수인들도 권능을 사용했다. 본능의 권능에 이성을 놓은 엘프가 자기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본능의 신자들의 권능은 자기 자신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고작 그게 전부였다면 다섯 번째 재앙은 쟁쟁한 재앙들 사이에서 재앙 취급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번째 재앙도 엄연히 재앙이고, 끔찍했던 기록도 존재한다.
본능의 신자의 권능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
흥분으로 몸의 피로와 상처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사람에게서 흥분을 빼앗으면 덮쳐드는 격통에 대상은 전투 불능이 되거나 쇼크사한다.
냉정하던 사람에게서 이성을 빼앗으면 이성을 잃고 돌진하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기만 하면 된다.
세뇌 같은 복잡한 일을 할 수는 없다. 본능의 권능은 효과가 직접적인 대신 강력하며 저항이 어렵다. 적의 이성과 본능을 마음대로 껐다 켜는 힘은 사람이 많은 전장일수록 위협적이다.
같은 편 하나가 폭주했을 때의 전력 손실은 단순히 빼기 일에 그치지 않는다. 십이 될 수도, 백이 될 수도 있다.
이성을 잃은 같은 편 엘프에게 죽어가는 엘프들. 전열은 붕괴했고, 엘프의 패배가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인 쪽도 피해를 입고 있었다.
요정이 강한 마력과 정신력으로 권능을 막으며 하늘에서 마법을 난사했고, 조율의 사도 한 명이 광범위 공간 왜곡으로 돌격해오는 수인들을 여자로 바꿔버렸다. 한 순간에 단련한 근육이 모두 사라져버린 수인들은 정령의 공격에 맥없이 쓰러졌다.
이건 이용할 수 있다.
현은 바로 움직였다. 하늘에 있는 요정들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공격에는 대비하고 있어도, 위쪽의 방비에는 소홀했다. 공간을 넘어 나타난 한 줄기 강기가 요정들을 꿰뚫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강기의 비에 요정 몇이 즉사하고 반에 가까운 요정이 다쳤다.
현은 재빠르게 발을 뺐다. 건드리기도 힘든 요정에게 피해를 입혔고, 그로 인해 전세도 기울게 했다.
이제 들키지 않고 도망치면 된다.
현은 마을로 돌아왔다. 엘프들이 빠져나간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적적한 마을에 떠도는 공기는, 평화로운 숲 동네라기보다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들이 사냥을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것처럼 흉흉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엘프들이 남기고 간 마력이 공기에 스며들어 마을 전체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현은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경계가 삼엄해 들어가지 못했던 구역이었다.
싸울 수 있는 엘프는 모두 북쪽으로 몰려간 와중에도 마을 안쪽의 경계는 삼엄했다. 경계는 마을 중앙에 갈수록 심해졌다.
엘프의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며 마을 중앙까지 도착한 현은 나무 덩어리를 보았다. 나무의 뿌리들이 둥근 모양으로 땅에서 솟아 있었고, 그 주위를 엘프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딱 봐도 저거군.’
동포의 죽음을 방관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물건이 저 안에 있다.
현이 발을 디뎠다. 천마강림. 쾌보다는 강에 속하는 보법이지만, 쓰지 못할 것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압력에 엘프들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자세가 흐트러지며 드러난 틈을 이매망량의 실이 파고들었다.
폐혈폐맥장이 이어졌다. 엘프의 몸에 들어간 실에 강기가 피어올랐다. 실을 통해 펼쳐진 장법. 이름하자면 폐혈폐맥현이라고 불러야 할까. 몸속에서 터진 폐혈폐맥현이 엘프의 내부를 끈적거리는 반죽으로 만들었다.
현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에는 현실 왜곡도 통하지 않았다.
현은 고치 모양을 한 나무뿌리를 찢었다. 강기를 두른 손으로 찢어야 할 정도로 뿌리는 질기고 단단했다.
고치 안에는 크리스탈이 있었고, 크리스탈 안에는 현이 잘 아는 사람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뤼필……?’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착각이 들게 하는 외모의 소유자는 조율의 성인인 뤼필이었다.
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크리스탈은 조율의 신자가 자신을 지킬 때 사용하는 최후 수단 같은 것이다. 현실 왜곡의 힘을 최고로 끌어내어 절대 부술 수 없는 물질로 자신을 감싸는 방패를 만든다.
외부의 모든 간섭을 거부하는 크리스탈은 내부에 있는 사람이 직접 권능을 풀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법으로만 부술 수 있다.
크리스탈 내부와 외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내부에 있는 사람에겐 외부의 위험이 지나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저 막연한 기대를 갖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현은 뤼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선 우선 크리스탈을 부숴야 했다. 현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현은 대신 도우미를 불렀다.
“급한 연락이라 해서 와봤더니, 급하긴 하군.”
“그러는 너는? 뭘 하다 온 거야.”
검신의 정장은 피투성이였다. 본인의 피는 없었지만, 멋에 살고 멋에 죽는 검신이 옷을 더럽히는 싸움을 했다는 건 옷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전에 말했던 그거다. 최근 몬스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몬스터 월드의 안쪽을 탐색하고 있다.”
몬스터 월드. 사람들이 오랜 시간 개발하지 않아 몬스터의 천국이 된 땅의 이름이다. 수만 년 동안 서로 잡아먹으며 성장한 몬스터들의 땅은 이젠 개발하고 싶어도 개발할 수 없는 땅이 되었고, 몬스터 월드라는 고유 명사를 얻었다.
“…… 할 수 있겠냐?”
“한 번 휘두를 뿐이다.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검신이 장난치듯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일격에 담긴 마력과 믿음은 장난이 아니었다. 뤼필을 감싼 크리스탈에 금이 갔다.
스크롤을 찢으려는 검신에게 현이 말했다.
“인사라도 하고 가지?”
“싸우다 온 참이라 시간이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검신은 보너스로 사방에 있던 엘프와 마법, 정령을 일격에 베어냈다.
검신이 사라졌다.
크리스탈에 간 금이 점점 커졌고, 이내 크리스탈이 깨졌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크리스탈 조각 사이로 뤼필이 사뿐히 땅에 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