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217
1217화 일단 모르는 게 약
하루 뒤.
배가 움직이며 고해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어서 배가 반대편 해안에 닿으며 모든 이들이 하선했다.
하선이 끝난 뒤, 조타수는 해안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명백에게 승객들이 뱃삯으로 들려준 모든 이야기의 내용을 전달했다.
이들이 뱃삯으로 들려준 얘기는 하나같이 전부 중요한 정보들이다.
이걸 쥐고 있는다면 도문은 유사시 그 누구보다 먼저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해안가에 상륙한 이들 중 상고 천정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지부 사람은 어느 정도 있었다.
“뭐라도 느껴지나?”
포명백이 물었다.
“비록 직접 느끼고 경험하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그들의 희로애락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조타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생을 자제하시게. 이대로 가다간 부활은커녕 입도조차 불가능할 걸세. 자네, 살기가 너무 짙어. 원한의 기운과 원념을 전부 배에 녹아들게 한다고 해도 완전히 해결하는 건 불가능할 걸세.”
“이미 자제하는 중입니다. 이번엔 천정의 주구 녀석 하나를 죽인 게 전부니까요.”
“…….”
포명백은 할 말을 잃었다.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조타수의 본명이 무엇인지 그는 모른다.
어쩌면 도문 내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도문 역사상 가장 많은 살인을 저지른 자다.
나중엔 도문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자신의 신분, 심지어 이름까지도 말살시켜버렸다.
그는 예전에 진룡을 죽인 적이 있다.
당시 그의 이름과 영혼을 함께 소멸시켜 부활시키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는데, 이에 원한을 품은 진룡은 죽기 직전 자신을 희생하여 조타수에게 악랄한 저주를 걸었다.
상고 천정의 신을 죽인 적도 있다.
심지어 그가 죽인 자는 상고 천정의 구성진군 중 가장 강한 살기를 가진 계도와 나후다.
그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이 가진 권력까지 전부 말살시켰다.
이로 인해 발생한 힘의 역류로 그는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살기를 갖게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시 이성을 회복했기에 다행이지, 회복하지 못했다면 도문은 그의 손에 멸망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은 존재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모든 생기를 끊어내고 자신을 무덤 안에 봉인시켜버렸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그의 손에 죽어 나간 상고 천정 사람의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성질이 고약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묵묵히 뱃사공으로서 임무를 다하는 것만 해도 이미 새사람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비록 전과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제력을 되찾은 사람이다.
이게 아니었다면 털보는 절대 그가 뱃사공으로 고해에 남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를 속박하고 있는 쇠사슬이 풀린다면 망자의 세계에 있는 망자들은 전부 그의 손에 죽어 나갔을 것이다.
포명백은 새로 입수한 정보를 챙겨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볼일을 마친 조타수는 다시 고해로 돌아가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계속해서 본분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간 스스로로부터 해탈하고 깨달음을 얻어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걸린 저주에서도 풀려나며 살인을 통해 입도할 수 있을 것이다.
* * *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망자의 세계에는 해와 달이 없었기에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꼈다.
진양은 매일 벌레 껍데기를 바라보며 이것이 언젠가는 선천지물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비록 선천지물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긴 했지만, 진양은 그것이 선천지물이라고 확신했다.
이 외에 남는 시간에는 황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쓸 만한 물건이 있는지 찾아다녔다.
* * *
대황, 영야의 땅.
영원한 밤의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답게 하늘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어둠이 깔려있었다.
그때, 하늘에 돌연 몇 개의 별빛이 반짝였다.
반짝이던 별들은 새빨간 화염에 휩싸인 채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율종.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은 노승 하나가 돌연 눈을 번쩍 떴다.
그가 합장과 함께 큰소리로 불경을 외치자 황금빛이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퍼져나가며 하나의 장막이 되어 율종 전체를 뒤덮었다.
이어서 번개와 천화를 동반한 유성우가 율종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유성우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반점이 있는 얼굴, 인간의 몸, 이마에 달린 하나의 뿔, 그리고 적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무표정으로 아래쪽에 있는 율종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칙령, 참단(斬斷)!”
한 줄기의 황금빛이 허공에 나타나며 검강이 되어 율종의 방어막을 향해 날아들었다.
방어막 위로 수많은 부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검강은 마치 두부 썰 듯 부문을 전부 베어버렸다.
방어막은 순식간에 박살 나버렸다.
“육천비(戮天碑)를 내놓는다면 내게 무릎 꿇은 기회 정도는 주겠다.”
무표정으로 율종의 승려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마치 하찮은 개미 새끼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 * *
영야의 땅 깊은 곳 어딘가.
무목대사는 또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신이시여, 판국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들어섰습니다. 대황은 이미 표적이 되었으며, 영야의 땅이 첫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한마디를 남긴 뒤 지체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는 율종 출신의 승려다.
율종이 어려운 일을 당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무목대사가 자리를 떠난 뒤.
어둠 속 깊은 곳에서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피할 수는 없구나. 허나 선봉에 설 생각은 없다. 상고 천정의 위선자 놈들이 뿜어내는 그 역겨운 기운은 풍도대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역겹군.
상고 천정 놈들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그분의 손에 죽는 게 낫겠지.
원컨대 그분이 향불의 정을 기억해 주시길…….”
탄식이 끝나자 영야의 땅 깊은 곳에서부터 격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틈은 무려 수백 리 넘게 이어졌고, 영야의 땅은 마치 천지개벽이 일어날 때처럼 극심하게 뒤흔들렸다.
* * *
율종 상공.
빛에 휩싸인 채 아직 진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다른 자들도 빛을 거두며 진신을 드러냈다.
감정 없던 이들의 두 눈에 놀람이 가득했다.
이들은 일제히 영야의 땅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 무시무시한 게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대지가 갈라지며 그 틈에서 강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의 정체는 따로 있었다.
다만 높은 상공에서만 봐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갈라진 틈이 아니라 어느 정체 모를 생명체의 눈꺼풀이었다.
그리고 갈라진 틈 사이로 거대한 눈알이 보였다.
순간 강한 빛이 영야의 땅 전체를 휩쓸며 한 줌의 햇빛조차 들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환하게 만들었다.
하나의 거대한 태양이 떠오르며 오직 눈과 얼음밖에 없는 이곳을 밝혔다.
거대한 눈의 홍채가 조금씩 수축되며 길쭉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동자의 시선은 율종 상공에 떠 있는 이들에게 향했다.
시선을 받은 이들은 순간 무언가에 의해 속박된 것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번쩍이는 빛이 지나가며 이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거대한 눈동자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눈동자 안에 있는 이들의 동작은 거꾸로 흘러가며 영야의 땅에 들어오기 전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그 누구도 이들이 죽었다는 걸 느낄 순 없었지만, 이들은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더 이상 이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이들이 대황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이들은 작은 별빛이 되어 거대한 눈동자 속에서 천천히 소멸되었다.
눈동자는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대황 전체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본 뒤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영야의 땅 전체를 비췄던 밝은 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 *
어둠 깊은 곳.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호, 어째서 날 죽이러 오지 않으신 거지? 이상하군. 그분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분이신데. 아니면 이번만큼은 향불의 정을 생각해서 봐주기라도 한 걸까?”
한창 기뻐하고 있을 때.
무목대사가 다시 그를 찾아와 예를 갖추었다.
“신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내게 감사할 필요 없네. 감사는 그분께 하시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묻지 마시게. 스스로의 본명까지 말살하셨기에 그 누구도 그분이 누구인진 모른다네. 과거 그분께선 진룡을 베고 신을 죽이며 극한의 살기를 품게 되셨지.
그런데 어째서 내가 그분의 벌을 피해갈 수 있었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군…….”
‘벌을 피했다’라는 건 예전에 그가 했던 말.
‘다시는 다음날의 태양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일단은 죽이지 않겠다. 네가 죽을 날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는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당장은 상황을 모면하게 된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성격상 절대 자신을 죽일 수 없다며 봐줄 리는 없다.
그때 그는 문득 깨달았다.
이건 더 이상 관여하지 말고 물러서라는 일종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용한 구석을 찾아 눈을 감고 그 어떠한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가 있는 곳에선 다시는 태양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다음 날의 태양은 영원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이곳은 영야의 땅이 되었다.
지금까지 간신히 버텨오긴 했으나 천지가 격변하며 이젠 상고 천정의 사람들까지 대황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저 시간을 끌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분도 이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도, 그를 죽이지도 않았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
과거 그는 반드시 그를 죽이겠다고 단언했었다.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신은 조용히 냉정을 되찾은 뒤 생각해 보았다.
이번 일을 제외하고 그동안 했던 일들 중 도대체 무엇을 했길래 그가 나타나지 않은 걸까?
그가 죽거나 사라졌을 리는 없다.
설령 자신은 죽어도 그는 절대 죽을 리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몇몇 중요한 일들을 방관하고 있던 게 전부다.
육천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걸 보고도 모른 척했던 일, 명황의 부활을 조용히 막아섰던 일, 그리고 도문의 망자들이 명황의 사지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던 일까지.
그렇다면 이것들이 전부 관련이 있다는 뜻일까?
한참의 생각 끝에 그는 완전히 가능성을 배제하기보단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처리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근 몇 년 동안 영야의 땅에 벌어진 큰일이 단 몇 개뿐이라는 점.
문득 돌이켜 보니 과거 일어났던 일들 중 도문과 엮여있을 법한 일들이 몇 개 떠올랐다.
그렇다면 설마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그분’이 도문과 관련된 사람이란 뜻일까?
어쩌면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문을 도왔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분이 벌을 내리지 않고 조용히 넘어간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도문 사람들은 대부분 자비로운 편이니까.
예전에 있었던 비슷한 상황도 어쩌면 같은 이유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외에 다른 납득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도문에 원한을 산 적이 없다.
심지어 도문에는 그와 꽤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
특히 어떤 낯짝 두꺼운 녀석은 그에게 촛불을 빌려 가고 아직까지도 돌려주지 않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감히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때론 너무 많은 걸 알면 독이 되는 법.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은 모르는 게 약일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