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270
1270화 착한 녀석이었을 줄이야
진양은 다시 눈을 떴다.
대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진양은 다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빛을 뿜어내던 거대한 탑 위로 마치 검은 막이 씌워지는 것처럼 빛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거대한 탑은 한 층씩 무너져내리며 가루가 되어버렸다.
흘러나오던 빛도 소리 없이 사라졌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보던 진양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큰 사고를 친 것 같은데…….’
다시 정신을 차린 진양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태호라…….”
아마도 태호 천제를 말하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여러 천제들이 진양에게 처참하게 당했다.
간신히 숨이 붙어있던 태미 천제는 진양의 물귀신 작전에 말려들어 죽게 되었다.
태일 천제가 일을 꾸미려고 대황에 쏟아부었던 모든 힘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태호 천제는 상고 천정 사람들의 힘을 빌어 이곳에 천정을 재건하려고 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우선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외쳐 그가 가진 권력을 이곳에 스며들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망자의 세계에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망자의 세계의 첫 번째 규칙.
진양으로부터 비롯된 규칙이었다.
이 규칙으로 인해 태호 천제는 제대로 기반을 세워보지도 못하고 길이 가로막히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망자의 세계의 규칙보다 더 높은 곳에 군림하여 망자의 세계의 첫 번째 규칙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이곳에 나타나는 건 결코 불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태호 천제는 망자의 세계와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만 장 높이의 거대한 탑이 무너지는 모습에 상고 천정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들은 곧장 손에 잡고 있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탑을 향해 달렸다.
무엇이라도 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태호가 세운 계획은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양은 최대한 목을 움츠렸다.
지금 상황에선 절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들키는 순간 누명을 쓰게 될 것이다.
물론 진양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기서 누명을 쓰게 된다면 상고 천정과 정면으로 맞붙어야 할지도 모른다.
망자들은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거대한 탑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곳을 가득 뒤덮고 있던 빛은 어느덧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고, 귓가를 간지럽히던 속삭임도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열렬한 광신자들은 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인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애석하게도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죽어서도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계속해서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건, 대부분 해탈을 꿈꾸는 수도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많지 않다.
남은 대부분의 망자들은 그저 물살이 흐르는 대로 표류한 것뿐.
현재 이들은 극심한 공포감에 빠져있었다.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어렵게 얻은 기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기회를 잡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고 해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다.
반대로 눈앞에 주어진 기회에 집착하게 되며 죽음을 더욱 두려워하게 된다.
진양의 환생 능력이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망자들이 도박을 했던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편, 탑의 반대쪽에선 주위의 환경과 완전히 하나가 된 대취가 조용히 눈만 지면으로 내민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어째서 갑자기 탑이 무너진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빛과 신의 속삭임이 대지를 관통하는 기운이 되어 다가오는 순간, 그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적합한 방법으로 그것을 막았다.
체내로 흘러들어온 기운이 위력을 발휘하기 전에 삼켜버린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는 나락이 되어버린다.
상대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 흘러나온 기운의 일부가 사라졌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타고난 신통력이다.
대취는 계속해서 멀리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망자들은 주위를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방금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
일부 기운을 삼기는 순간 그것은 사라져버렸다.
기운이 원래 하나의 전체이고 서로가 연결이 되어있다고 한다면, 사라진 일부분은 설령 망자들이 발견하진 못하더라도 전체에는 이미 비어있는 부분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탑은 모든 기운이 실체화된 것이고, 일부가 사라지며 무너지게 된 것.
그렇다면 이 탑도 앞서 보았던 등대처럼 단순히 주위를 경계하기 위해 세운 것일지도 모른다.
즉, 상대가 이미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뜻이다.
대취는 차갑게 피식 웃었다.
이미 상대가 눈치를 챈 이상 더 이상 숨을 필요는 없다.
마침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봐야 할 필요도 있었다.
이곳에 자욱하게 깔려 있는 상고 천정의 신의 기운은 상당히 역하게 느껴졌다.
특히 일부 기운을 삼킬 때는 속이 매스꺼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예 코를 틀어막고 나서야 간신히 삼킬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말은 즉, 그는 ‘태호’라는 소리를 아예 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일을 꾸미고 있는 신이 태호 천제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태호 천제의 힘은 이곳에 닿을 수 없고, 본체도 이곳에 나타날 수 없다.
이곳에 있는 신의 기운은 망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에게 기운은 단순히 역겨운 수준에 불과하다.
신처럼 역겨운 수준은 아니었다.
대취는 더 이상 무언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망자들은 땅을 삼 척씩 파내며 어느새 부근까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지면으로 튀어나왔다.
수천 장에 이르는 거대한 괴수의 형상이 나타났다.
숨을 들이키니 주변에 있던 돌과 수십 명의 망자들이 함께 입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는 빠르게 거대한 탑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든 망자들은 그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절반 정도 가다 보니 회색 피부를 가진 회색 장포를 입은 대머리가 허공에서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취가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음에도 남자는 그저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대취에게 삼켜지는 순간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때, 앞으로 달려 나가던 대취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복부가 팽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육신 표면에 균열이 일어났고, 균열에선 붉은색과 황금색이 뒤섞이며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입에서는 적금색의 빛기둥이 뿜어져 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강한 열기를 뿜은 빛은 주위에 있던 돌을 전부 녹여 용암으로 만들었다.
회색 장포를 입은 대머리도 함께 토해져 나왔다.
빛 가운데 둥둥 떠 있는 그는 양손으로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적금색의 광구였다.
대취는 포효성을 내질렀다.
극도로 역겨운 신의 기운이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신의 기운을 삼키는 바람에 그의 육신엔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집어삼켰던 망자들은 신의 기운의 역류와 함께 역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풍도의 이족 고수셨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머리는 허공에서 차갑게 대취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대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상고 지부 출신이라는 걸 알아본 것까지는 그렇다 치겠는데, 풍도에서 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차가운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몸 안에서 뒤섞인 기운을 토해냈다.
그것은 어두운 황금색 물결과 함께 높은 파도가 되어 상대를 향해 휘몰아쳤다.
이어서 맹렬한 기세로 지면을 파고들었다.
그는 대지 조각 하부를 뚫고 나오며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머리는 대지를 관통하는 굴을 통해 그를 뒤쫓았다.
강한 힘을 가진 여러 망자들도 그를 따랐다.
더욱 많은 망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용히 땅속에 숨어 바깥의 상황을 느끼고 있던 진양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순간에 갑자기 대취가 나서서 모든 누명을 덮어써 주다니!
‘아무래도 내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 이렇게 착한 녀석이었을 줄이야.’
진양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고 바깥을 살폈다.
침입자를 찾기 위해 땅을 파헤치던 망자들은 어느새 방향을 바꿔 대취가 나타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어서 대취가 땅을 파고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매우 불쾌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강력한 망자가 그를 뒤쫓았다.
잠시 고민하던 진양은 자신의 얼굴을 길게 늘리며 비늘 없는 뱀 머리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가방을 뒤져 몇 가지 재료를 꺼내 자신의 얼굴에 붙여 비늘처럼 보이도록 했고, 기운을 조절하여 뱀 머리의 기운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장포까지 꺼내 입으니 지금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선 충분히 적을 속일 만큼 뱀 머리와 흡사한 모습이 되었다.
지면 밖으로 나온 진양은 힘을 움직여 죽음의 기운 일부를 흡수했다.
그리고 죽음의 기운을 몸 밖으로 빼낸 뒤 조금씩 강화했다.
진양은 크게 숨을 들이킨 뒤 망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존재감이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하며 망자의 바로 뒤까지 다가간 순간.
상대가 놀란 듯 고개를 홱 돌려 진양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진양은 곧바로 차가운 뱀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런 걸 따지고 있어? 빨리 쫓아가지 않고 뭐 해!”
진양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망자를 지나쳐갔다.
상대는 어딘가 이상하긴 했으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곤 곧장 진양의 뒤를 따라 대취가 사라진 동굴 안으로 몸을 던졌다.
진양은 망자들 사이에 뒤섞였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죽음의 기운은 그다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잠시 뒤.
한 무리의 망자들이 더 몰려왔다.
이들은 진양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처음 진양을 의심했던 망자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이 없는 걸 보곤 스스로 착각했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은 진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앞서 지나간 이들이 말없이 지나가고 나니 뒤따라온 이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대취를 쫓고 있는 진양이 누군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들의 관심은 온통 무너진 거대한 탑에 완전히 팔려있었다.
당장 중요한 건 진양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탑을 무너뜨린 원흉으로 추정되는 녀석을 잡는 것이다.
망자들은 대취가 사라진 동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었다.
진양은 인파 속에 뒤섞여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까지도 뱀 머리 녀석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니.’
과연 예상대로였다.
뱀 머리는 개나 소나 모두가 알아볼 만한 자가 아니었다.
내부 첩자 중에서도 꽤 급이 높은 듯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풍도대제는 뱀 머리를 상당히 신뢰했다.
때문에 많은 일들을 그에게 직접 맡겼다.
그렇다면 전생에 상고 지부에서도 꽤 이름을 알렸던 자라는 뜻이다.
이런 자를 단 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리 있을까?
아무리 뱀 머리를 한 녀석이 많다고 해도 망자들이 이들을 구별하지 못하기라도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