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298
1298화 별거 아니잖아
진양은 수문도를 다시 챙겨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쉽게도 약수는 오직 이곳 안에서만 순환하고 있었다.
산 자의 세계로 흐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무래도 잘못된 생각인 듯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어쨌든 희망을 보긴 본 셈이니까.
약수의 주맥은 매우 강력한 위력을 품고 있다.
그 위력은 심지어 스스로 공간을 만들어낼 정도로 강하다.
이는 곧 약수가 망자의 세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약수의 주맥은 망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를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약수는 사실상 망자의 세계 밖으로 뻗어있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되면 약수를 다리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된다.
과거 상고 지부는 멸망하며 수많은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다면 상고 지부를 감싸고 있던 약수도 사분오열되었을 것이다.
절대 그대로 소멸했을 리 없다.
누군가 산 자의 세계에 약수를 모은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이렇게 모인 약수의 주맥의 위력도 이곳처럼 스스로 공간을 이루어낼 만큼 강하다면?
산 자의 세계에 있는 약수는 산 자의 세계 밖으로 뻗어나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렇게 뻗어나간 두 개의 주맥을 하나로 잇는 순간 산 자의 세계와 망자의 세계가 연결될지도 모른다.
즉, 약수를 통해 자유롭게 두 세계로 왕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생각한 것보다 가능성은 훨씬 더 낮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정말로 실현 가능한 일일지도.
어쩌면 약수의 두 주맥이 스스로 서로 이어지며 산 자의 세계와 망자의 세계가 연결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모든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폐허를 빠져나와 다시 강가로 온 진양은 떠나기 전에 무언가 떠오른 듯 물소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물론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인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후일 연이 닿는다면 어르신께 꼭 술 한잔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양은 다시 한번 수신 상태로 약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폐허의 끝을 나서며 다시 한번 약수의 순환에 몸을 맡겼다.
다만 진양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올린 곳이 정확히 물소와 말의 중간 지점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두 녀석의 시선이 마주치는 곳을 가리게 된 것이다.
* * *
진양이 약수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
물소 조각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맞은편에서 곁눈질로 물소 조각상을 바라보던 말 조각상의 시선도 앞쪽으로 향했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조각상 표면에 붙어있던 풍화된 흔적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온몸이 푸른색으로 물든 물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대추처럼 붉은색으로 물든 말이 모습을 드러내며 힘껏 들고 있던 앞발을 지면에 내려놓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하찮은 놈!”
물소도 멸시 가득한 시선으로 말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누가 할 소리!”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은 뒤.
말이 물소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이런 꼴이 된 건 전부 네 녀석 탓이다. 그래도 끝까지 노려본 끝에 네 녀석이 수명이 다해 죽는 꼴을 지켜보게 됐지.
하지만 그 바람에 나 역시 죽어서도 네 녀석을 계속해서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된 거다. 조각상이 되어서도 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너와 마주 보게 된 거지.
아, 아니지. 이번에는 어쩌면 영원히 이런 상태로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군.”
한참을 투덜거리던 말은 어느덧 물소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말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물소가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렇게 멍하게 있고 싶으면 너나 멍하게 있으라고. 괜히 남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난 이제 질렸어. 질렸다고!”
말은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물소는 눈을 감은 채 피식 웃었다.
“쫄긴. 배짱이 있으면 어디 한 번 시선을 마주쳐보던지. 여차하면 또다시 평생을 서로를 바라보고 지내도 난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둘 다 죽은 몸인데 그런 것 따위 뭐가 대수겠어?”
“그만. 내가 잘못했네. 이번만큼은 내가 잘못을 인정할 테니 이만 넘어가도록 하시게.”
말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나 고개만은 절대로 돌리지 않았다.
“흥, 바보 같은 소리 하긴. 멍청하게 남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건 네 녀석이잖아. 그러니까 누가 날 쳐다보래? 네가 날 쳐다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상고 지부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서로를 쳐다보는 조각상이 되어버리다니 말이야.”
물소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래도 이번엔 운이 좋았어. 어디서 굴러온 녀석인진 모르지만 약수를 건너오다니 말이야.
게다가 약수를 통해 지부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무려 여든한 개나 되는 갈림길을 지나 이곳 약수사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어. 거기다가 떠나기 전에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을 가로막아준 덕분에 이렇게 살아날 수도 있었잖아.
누군진 몰라도 그 녀석 아니었으면 우린 평생 서로를 마주 보고 살아야 했을 거라고.”
“어휴, 그래. 네 녀석 말이 맞다. 다 내 잘못이다.”
말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끝까지 시비를 거는 걸 잊지 않았다.
“유치한 놈!”
“유치하다니! 자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시끄러워. 상대하기도 싫으니까.”
물소는 콧방귀를 뀌고는 폐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뒤.
물소와 말은 다시 약수를 중간에 둔 채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수문도가 사라졌어.”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분명 수문도를 약수사 밖으로 빼돌렸지만, 약수 수맥엔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 말은 수문도를 완전히 연화시켰다는 얘긴데.”
“아니야.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연화시키는 건 설령 풍도대제가 온다고 해도 불가능해. 하지만 부군이라면 가능하겠지.”
“하나 더. 부군의 신통력을 가진 자도 가능하겠지.”
“그렇다면 그 녀석이 부군인 걸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봐. 망자의 세계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 부군이 환생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뭐가 있겠어?”
“그럼 어떡하지? 이대로 수문도를 가져가게 내버려 둬도 괜찮을까?”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듯하네. 약수 수문도는 애초에 부군이 만든 게 아니던가? 그가 가져간다고 해서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상고 지부는 이미 멸망하지 않았던가? 굳이 나서서 간섭할 필요는 없지.”
“틀린 말은 아니군. 적어도 녀석은 우릴 구해줬으니 말이야.”
그렇게 두 사람은 수문도의 일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걸 가져간 건 결국 그의 실력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지독한 시간에서 이제 막 벗어난 상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수명이 다해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죽어서 이곳에 와서도 계속해서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던 도중 엄청난 우연이 발생하며 마침내 해방되었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에도 부족한데 굳이 귀찮게 수문도 따위를 신경 써서 뭐 한단 말인가?
‘어떻게든 되겠지!’
* * *
한편, 진양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혀 깨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두 고수가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깨어있었던 것이다.
다만 모종의 사고로 인해 오랜 시간 굳어있던 것뿐.
그러던 도중 진양의 의도치 않은 ‘시선 차단’ 덕분에 다시 풀려나게 된 것이다.
현재 진양은 약수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물살의 흐름과 변화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수맥을 뚫고 지나가면 한층 더 깊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만약 상고 지부가 건재했다면, 이곳을 뚫고 들어가는 건 곧 외층 방어를 뚫었다는 걸 의미한다.
여든한 개나 되는 갈림길을 지나 약수사까지 들어갈 필요조차 없던 것이다.
대략 계산해 보니 꽤 많은 시간을 썼다.
아무래도 수라가 무사히 떠났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만약 떠났다면 혼자 안쪽을 살펴보러 가고, 떠나지 않았다면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 * *
약수 수맥 밖.
수라의 눈은 검게 물들어있었다.
어느새 척추검을 뽑아 든 그의 몸은 새까만 불길에 휩싸인 채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상당히 요염한 모습의 여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라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마검 공법이군요. 움직임과 자세로 보아하니 마종의 수라인 것 같은데. 아직 죽지 않았나 보네요.”
유무의 목소리엔 강력하면서도 기이한 매혹의 힘이 느껴졌다.
듣고 있으면 판단력이 흐려질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수라의 두 눈은 검게 물들어있었다.
그의 일부는 진양에 의해 잘려 나갔고, 여기에 마존 도결로부터 비롯된 상당히 극단적인 마검 공법까지 익혔다.
때문에, 그녀의 유혹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소리 없이 펼쳐진 검은 장막이었다.
장막은 빠르게 펼쳐지며 유무의 육신을 반으로 갈랐다.
남은 여파는 곧장 약수로 흘러들었는데, 심지어 그 무엇도 녹이지 못하는 게 없는 약수조차 순간적으로 베어 갈랐다.
유무의 육신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한층 더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이럴 것까진 없잖아요.”
수라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수라가 베어 가른 자리에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양이 튀어나왔다.
의도치 않게 새어 나온 수라의 공격에 맞은 것이다.
그나마 지맥이 버텨준 덕분에 수라의 힘이 겨우 수십 리 정도 파고들어 오고 모두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어휴, 눈 썩는다 썩어. 당신은 또 누굽니까?”
진양은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미간을 찌푸렸다.
수라가 황급히 진양을 말렸다.
“삼사숙, 조심하십시오. 이상한 기운을 풍기는 요녀입니다.”
“이런, 이미 늦었군.”
몸에 변화가 느껴졌다.
마치 중독되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중독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그 순간 독소는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그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진양은 곧바로 약수 수신으로 몸 상태를 바꿨다.
은빛 약수로 이루어진 몸에 회색빛이 감도는 안개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약수에 의해 녹아내리며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별거 아니잖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진양은 어깨를 으쓱였다.
“…….”
수라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유무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진양을 쳐다보았다.
‘뭐 하는 놈이지? 약수에서 튀어나온 건 그렇다고 쳐도 약수로 수신을 만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