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396
1396화 대영의 영토로 만들 것
한안명이 사라지고 나자 어디선가 조용히 몽의가 나타났다.
몽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한 대인께서는 그동안 정천사의 수장으로 지내며 수도 없는 과오를 저질렀지만, 유일하게 제자를 통해 많은 덕을 쌓으신 듯하군요.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더군요. 아마 제 존재를 진작 눈치채고 있었을 겁니다. 다만 지금의 경지로 그런 곳에 가기엔 다소 부족할 것 같습니다만. 이대로 혼자 보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준비를 해뒀습니다만. 어쨌든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요. 함부로 남에게 넘길 순 없는 법이죠. 게다가 안명이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 녀석을 붙잡아두고 기회를 붙잡지 못하게 하는 건 녀석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치는 겁니다.”
위흥조의 심정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몽의의 말이 맞다.
그는 일생 동안 정천사의 수장을 맡으며 알게 모르게 수많은 과오를 저질러왔다.
이런 그가 유일하게 다른 이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건 바로 한안명뿐이었다.
* * *
햇빛조차 들지 않아 어둠이 깔린 이곳.
사방엔 스산한 기운이 가득했고, 짙은 음기가 모여들며 안개처럼 사방의 시야를 가렸다.
이곳에 한안명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목에는 옥부 하나가 걸려있었다.
한안명이 대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자 곧바로 그의 모든 기운이 가려지며 주위의 환경과 하나로 녹아들었다.
주위에선 쉴 새 없이 귀곡성이 울려 퍼지며 귀를 자극했다.
한안명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옥부를 손에 꽉 쥔 채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옥부에는 괴산 산귀로부터 받은 물건으로 수많은 고수들이 불어넣어 준 힘이 서려 있었다.
그나마 한안명이었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위흥조였다면 고수들은 아예 본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안명은 기운과 모습을 감춘 채 수십 일을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산한 기운과 엄청난 수의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지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고개를 들어보았다.
이곳은 여전히 깊은 밤이었다.
그러나 먹구름이 걷히자 아름다운 은빛을 뿜어내고 있는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달빛은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한안명은 잠시 눈을 감고 주위의 기운을 느껴보았다.
곧바로 이곳에 있는 모든 식물들이 달빛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안명은 동굴 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을 완전히 봉쇄시키고 난 뒤에야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를 묶고 있는 줄을 풀자 검은빛이 흘러나와 대귀(大鬼)의 형상을 이루었다.
대귀는 겉보기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미간에는 부문 징표가 새겨져 있었다.
한안명은 들고 있던 비단 주머니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대귀에게 던졌다.
“우리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또 이곳이 어디인지는 이미 얘기해 준 그대로다. 난 그저 윗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을 뿐.
비단 주머니는 다시 네게 돌려주겠다. 널 겁박하여 무언가를 하도록 만들 생각은 없다. 가고 싶으면 이만 가도 좋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대귀는 다시 비단 주머니를 한안명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내가 떠난다면 당신은 곧바로 다시 돌아가겠죠. 그렇게 되면 결국 저는 죽게 될 겁니다. 만약 제가 당신을 죽인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고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 죽어서도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당신을 따라 공을 세우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설령 죽어서 그곳에 가게 되더라도 진양이 날 홀대하진 않을 테니까요.”
대귀는 다른 자들을 삼키며 강해지는 대신 수련을 통해 실력을 쌓는 길을 걸어왔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 해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귀신의 음수(陰壽)는 비록 인간의 수명보다 열 배 이상 길다곤 하지만, 수련 속도는 평범한 인간 수도사보다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건 정도(正道)를 걷는 귀신의 경우다.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고의 과정을 반복하며 만들어진 대귀는 야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직 실력만 있으며 지능은 없고, 대다수가 이른 나이에 요절하기 마련이다.
대귀는 귀신 소굴의 잡귀였던 시절부터 백귀(白鬼)의 가르침을 통해 조금씩 성장했다.
그러나 그를 성장시키기 위해 백귀가 저지른 일 때문에 결국 앞길이 무너지게 되었고 잠재력도 거의 다 소모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절망을 느낀 게 전부였다.
유명성종과 부도마교의 싸움은 결국 긴 대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 돌연 대황에 큰 이변이 생겼다.
진양의 부활을 놓고 찬반이 갈리게 된 것이다.
그는 감히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망자였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존재로 여기고 곧바로 반대표를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온 천지에 영향을 줄 정도의 존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찬반이 갈리는 것도 그저 단순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런 자와는 악연을 맺어봐야 좋을 게 없다.
어차피 그는 영향력도 그다지 크지 않기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과연, 그 뒤로 세계의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그가 반응을 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수준의 속도로 변화했다.
대영 신조의 대제의 위엄은 천하를 압도했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모두들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도마교가 반항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어디선가 세 명의 도군이 나타나 부도마교를 방문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싸움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이 다녀가고 나자 부도마교는 아부까지 떨어가며 대영 대제에게 남만 땅을 양보했다.
대황에 언제 이토록 많은 강자가 생겨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어서 정천사의 수장이자 미친개로 알려진 위흥조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어귀지법(馭鬼之法)을 통해 강제로 대귀를 길들여 자신의 제자의 호법(護法)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위흥조의 실력이 어째서 알려진 것보다 더 강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어서 팔 없는 소경 노인이 나타나 그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차분하게 그를 구슬렸다.
‘넌 일전의 백귀에게 당한 일 때문에 잠재력을 거의 다 소모해버렸다. 그로 인해 평생 법상 경지의 한계를 뚫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지.
그러나 네겐 아직 남아있는 길이 하나 있다. 바로 대세를 따라 대영 신조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정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도문의 현임 문주인 진양에게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거라. 진양은 분명 네가 처한 곤경을 해결해줄 방법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설령 뜻밖의 사고로 죽게 된다고 해도 걱정할 건 없다. 망자의 세계가 나타나며 도문의 역대 강자들이 전부 망자가 되어 단체로 망자의 세계에 머물고 있으니까.
게다가 진양은 유일하게 망자의 세계에서 돌아와 다시 부활한 사람이다.
진양은 망자의 세계에서 대황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한참의 설득 끝에 대귀는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듣고 보니 상당히 합리적인 조건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뜻을 따르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한안명을 돕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천사의 마지막 양심인 한안명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조건을 받아들이고 이곳까지 오게 된 대귀는 어째서 그들이 자신을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이 귀신들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온 대황을 통틀어 정도를 선택한 귀신 중에 어느 정도 실력도 갖추고 이성도 갖추고 있는 귀신은 그가 유일했다.
또한 상고 지부나 여타 다른 대형 세력과도 얽히지 않은 자도 그가 유일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더 이상의 후회는 없습니다.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결국은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는 셈이니까요.”
대귀는 평온한 얼굴로 오히려 한안명을 위로했다.
두 사람은 함께 동굴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높이 뜬 달에서 쏟아져나온 달빛이 대지를 비췄다.
짙은 음기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곳은 마치 귀신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한안명은 잠깐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이곳을 대영 신조의 영토로 만들 것이다.”
“…….”
대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적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긴 했으나 간신히 눌러 참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안명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서 발아래 펼쳐진 세계를 내려다보았다.
정보에 따르면 이곳은 상고 신산 호량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섬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바다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마치 이곳이 육지라는 것을 증명하듯 땅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즉, 이곳의 조각은 애초에 바다가 아닌 대지에 떨어진 것이다.
이건 좋은 일이다.
적어도 사람은 대지에서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방이 망망대해로 둘러싸여 있었다면 귀신들은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달은 천천히 서쪽으로 저물어갔다.
그러자 천지를 뒤덮었던 달빛도 조금씩 사라졌고, 짙게 깔렸던 음기가 사라지며 양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방을 활보하던 귀신들의 모습도 점차 사라졌다.
대귀가 먼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자.”
한안명은 잠시 고민을 한 뒤에 또다시 입을 열어 대귀를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우리의 목적은 그저 호량 조각으로 추정되는 이 산맥을 점령하는 것뿐. 그 뒤의 일은 단순히 너와 나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대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망자의 세계로 넘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가희의 ‘확장 계획’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멀리 태호 세계의 진양은 계속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누워있기만 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본인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진양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더 이상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을 만큼 멍해져 버린 것이다.
마지막 편지는 이미 오래전에 끊겼다.
진양은 그대로 사흘 정도를 더 해저에 누워있다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겉보기엔 십이의 편지는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효과는 뚜렷하게 변화가 있었다.
십이는 강해졌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진양은 또다시 그녀가 태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녀에게 편지를 받았던 건 휘요와 흑철을 봉인했을 때다.
그리고 영감과 거변을 처치하고 나니 그녀는 강해졌다.
물론 네 명의 대신관의 권력을 봉인하며 속박의 힘이 약해진 덕분에 십이가 강력해진 것처럼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당장 과정은 확인해 볼 방법은 없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건 결과뿐이다.
이건 나중에 십이와 직접 만나게 된다면 그때 확실하게 물어봐도 늦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