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416
1416화 언제 사람이 될는지
잠시 고민하던 부군은 그가 나왔던 비경을 가리켰다.
“구체적으로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소. 허나 식견을 넓히고 싶다면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게요. 쓸 만한 물건은 없겠지만 상고 지부의 유적은 꽤 많이 남아있을 테니 말이오.”
진양은 곧바로 부군의 말에 숨겨진 또 다른 뜻을 알아차리곤 물었다.
“가시려는 건가요? 일개 화신 따위가 어디를 가려고요?”
부군이 하늘 위를 가리켰다.
“진곤은 자신이 가진 힘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일 검에 하늘을 베었소. 그 순간 이곳은 외부에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정보가 새어 나갔을 것이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진곤의 힘이라면 다르오. 꽤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좀 많아서 말이오.
아마 벌써부터 이곳을 노리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먼저 가서 살펴볼 생각이오. 누가 이곳을 발견했을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막아보도록 하겠소.
태호도 죽었고, 십 대 대신관도 모두 죽었소. 남아있는 자들이라고 해봤자 걸어다니는 시체나 다름없는 하급 신들뿐. 그야말로 군침이 도는 살코기가 아닐 수 없지. 이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미끼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오.”
부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진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계속해서 이곳에서 머물 생각이오?”
“아뇨. 이젠 더 이상 여기서 볼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허허…….”
부군은 아예 대놓고 진양을 비웃었다.
“일정 경지에 오르고 지위와 명성을 갖게 된다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얻게 되는 것도 있는 법이오. 설령 그대가 거절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당신에게 주려고 할 테니 말이오.”
여기까지 말한 부군은 돌연 무언가 생각났는지 잠시 침묵했다.
잠시 뒤, 그가 진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난 이만 가겠소. 꼭 살아남길 바라겠소.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오.
당신이 뭘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곳에 아직 가치 있는 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소. 다만 다른 곳이라면 괜찮은 곳을 몇 곳 알고 있소. 나의 화신이 있는 곳으로 가보시오. 그들을 깨워서 물어본다면 인색하게 굴지 않고 모두 답해줄 것이오.”
“됐어요.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전 체면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니깐요.”
“…….”
부군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포권을 취한 뒤 붉은빛에 휩싸여 하늘 위로 날아가 버렸다.
진양은 한숨을 푹 쉬며 소책자를 꺼내 살폈다.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긴.’
그동안 진양은 얼마나 많은 부군의 화신을 베었는지 모른다.
화신은 그야말로 전부 제각각이었다.
그나마 이번에 만난 부군의 화신은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직 부군의 화신이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 수많은 화신을 나눠놓은 것인지, 아니면 대재앙이 들이닥치는 순간 강제로 천지의 대세에 의해 찢겨나가며 수많은 화신으로 나눠진 것인지, 진양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 만난 화신은 비교적 우호적인 편이라 많은 걸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진양에게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게다가 무언가 정말로 급한 일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볍게 살펴보러 가겠다고 한 건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양도 너무 많은 걸 물어보진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태호 세계는 한층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도사들이 이곳에 찾아온 혼란을 반길 것이다.
지금까지는 불가계에 의해 억압을 받는 바람에 한층 더 높은 곳으로 향할 기회조차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불가계는 부서졌고, 재능과 잠재력을 품은 인재들은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강한 힘을 가진 강자들도 더 이상 태호의 손에 의해 꼭두각시가 될까 염려할 필요도 없어졌다.
가까이 보나 멀리 보나 어쨌든 좋은 일이었다.
다만 이들이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가능성은 거의 무에 가까웠다.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들을 막을 수 없다.
함부로 남의 앞길을 끊어먹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원한을 사는 행위다.
* * *
두 번째 층을 모두 살펴본 진양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일원궁 앞을 지날 때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별별자의 모습이 보였다.
진양은 잠시 갈등에 빠지긴 했으나 이내 단념했다.
아무래도 정체를 밝히지 않는 쪽이 좋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지금처럼 좋은 인상만 남기고 떠나는 게 좋다.
이제 와서 그를 속인 게 전부 대국을 위해서였다고 밝힌다면 별별자가 어떤 반응일지 너무나도 뻔했다.
아마 진양 자신조차도 크게 당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떠날 순 없는 법.
별별자는 태호에게 고개를 숙이며 천궁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으니까.
진양은 별별자에게 쪽지 하나를 남기곤 조용히 천궁을 벗어났다.
멍하게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별별자는 돌연 허공에 작은 쪽지 하나가 둥둥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그것을 집어 펼쳐보았다.
‘별별자 대인, 천제와 대신관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마침내 당신의 소원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이 대인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인께선 뭇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시겠죠.
천제라는 공포스러운 존재 앞에서조차 쓰러지지 않으셨던 대인께서 이런 순간 쓰러지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의향이 있으시다면 호량도 부근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언젠가 누군가 나타나 대인을 이곳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겁니다.
이 세계에는 태호 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추후에 큰일을 해내실 분이시니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별별자는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쪽지를 남긴 사람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별별자는 조용히 눈가를 훔쳤다.
마음속에서 그동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벅차올랐다.
그는 천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태호가 죽은 지금 과거 자신의 행적을 알고 있던 자들이 들고일어날 것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그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 나서서 그의 편을 들어준다고 해도 이미 배반자의 낙인이 찍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쪽지를 바라보고 있던 별별자는 조용히 일원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전적들을 챙겨 천궁을 빠져나왔다.
천궁을 빠져나와 바다 안으로 들어선 별별자는 곧바로 일원중수층에 몸을 숨겼다.
이렇게 하면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를 붙잡을 수가 없게 된다.
한편, 천궁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별별자는 진양이 권한대로 조용히 천궁을 빠져나갔다.
그 누구에게도 해명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뒤늦게 해명을 한다고 해서 그가 배반자라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의 해명을 들어줄 사람이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별별자가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지만, 이내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천궁을 빠져나온 진양은 얼마 가지 않아 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정자를 발견했다.
정자 위쪽에는 빛이 모여들며 글자가 만들어져있었고, 주위로는 영력의 파동이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게 육안으로도 뚜렷하게 보였다.
‘진가 놈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한 뚱뚱한 사내가 그곳에 누워 한참 단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양은 기척을 숨긴 채 조용히 정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으려는 순간.
잠을 자고 있던 사내는 순식간에 사라지며 정자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형, 아직 살아계셨습니까?”
진양은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장정의는 곧바로 꼬리를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사형이십니다! 사형이라면 분명 살아남으실 줄 알았다고요!”
“됐으니까 태호 호량 부근으로 가서 별별자를 찾아봐. 물어봐서 괜찮다고 하면 대황으로 그를 데려가도록 하고, 싫다고 하면 조금 더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적당한 곳을 찾을 때까지 근처 심해에서 몸을 피하고 있으라고 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군요.”
“그리고 대황으로 돌아가면 사숙께 이곳의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려. 태호도 죽었고, 십 대 대신관들도 모두 죽었고, 남은 건 걸어 다니는 시체나 다름없는 하급 신들뿐이라고.
이쪽은 현지 세력과 풍도대제 세력을 제외하면 별일 없을 거니 걱정 마시라고 전해줘.”
말을 마친 진양은 시시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정의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까 부군한테 들었는데, 상고 지부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비경 안에 상고 지부의 유적이 꽤 많이 남아있다고 하더라. 원한다면 사양할 것 없으니 마음껏 살펴봐도 좋다고도 했어.
난 그런 곳이나 살펴볼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까 네가 대신 살펴보도록 해. 거기서 나오는 건 전부 가져도 좋고.”
그러자 썩은 동태 눈깔이었던 장정의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내려주신 임무는 깔끔하게 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장정의는 홀연 듯 사라져버렸다.
“쯔쯧, 언제 사람이 될는지.”
장정의를 보내고 난 뒤.
진양은 적당한 곳을 찾아 쓸어온 물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대신관들의 거처는 전부 진작 박살 나버렸다.
때문에 유일하게 진양이 털 수 있는 곳은 영감궁뿐이었다.
다행히 영감궁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쓸 만한 물건은 모두 챙겨왔다.
일전에 영감궁에 갔을 때 그곳에 상당히 많은 양의 귀한 보물들이 많이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었다.
영감이 저주 위패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철두철미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챙겨온 물건들 중 진양이 쓸 수 없는 건 전부 남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었고, 전적은 전부 남겨둘 생각이었다.
사실 영감궁에 있던 물건 중 진양이 매우 탐내던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경자결(驚字訣) 전적이었다.
일전에 십이에게 경자결 전적이 영감궁에 보관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익힐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운에 맡겨야겠지만 일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