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419
1419화 그럴 리 없다
“아쉽군.”
진양은 유감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처음으로 십이와 함께 힘을 합쳐 펼친 전투였지만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무래도 상대의 눈을 멀게 만드는 정도의 효과를 바라긴 어려울 듯했다.
함께 싸우는 건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구해 봐야 할 듯했다.
훔쳐보는 시선을 통해 십이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상대를 하나의 과녁으로 만든다.
진양은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 과녁을 향해 공격을 날리기만 하면 된다.
장점은 매우 명확하다.
상대를 보지 않고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했다.
명중률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쓸 수 있는 힘도 한정적이었다.
일단은 자신이 가진 스스로의 힘만 날릴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훼멸구를 날려 상대를 공격하는 건 당분간은 기대하기 어려울 듯했다.
물론 단점이 있다곤 해도 크게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십이는 백옥 신문 내부의 환경이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
마음대로 밖으로 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꽤 기뻐하는 눈치였다.
완전히 성장한 선초는 수도사에겐 단숨에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다.
만약 선초와 자신이 쌓아온 수련, 그리고 도과가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선초를 소모하며 단숨에 봉호도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아니, 심지어 봉호도군 이상의 경지까지도 노려볼 수 있다.
상고 시대만 해도 같은 사례가 있었다.
물론 진양은 십이를 재료로 소모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눈독 들이는 걸 막으려는 것뿐이다.
선초에 관한 일은 최대한 숨기는 게 좋다.
정 숨길 수 없다면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쓸어버리고 선초에 대한 단서를 전부 지워버리는 수밖에 없다.
* * *
꿀맛 같던 잠깐의 휴식이 지나고.
진양은 상고 지부 조각으로 만들어진 비경 안으로 향했다.
비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열심히 이곳저곳을 발굴하고 있는 장정의를 발견했다.
장정의는 곳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실 큰 가치가 있는 보물은 별로 발견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대신 가치가 있는 다량의 정보를 발견해 냈다.
장정의의 입장에선 물건을 찾아내는 것보다 가치 있는 정보를 찾아내는 게 훨씬 더 이득이었다.
상고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치 있는 것.
심지어 그것이 별 볼 일 없는 부문이라고 해도 말이다.
때문에 장정의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처음으로 허락을 받고 유적을 터는 것이라 그런지 기분도 좋았다.
비록 조금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양을 따라 태호 세계로 넘어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진양은 폐허 안쪽을 둘러보았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열심히 폐허 속에서 부문을 탁본 뜨고 있는 장정의에게 다가갔다.
“정의야?”
장정의는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돌기둥에 붙였던 금박지를 떼어냈다.
돌기둥에는 이미 힘을 잃은 부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장정의가 떼어낸 금박에는 바로 이 부문이 탁본되어 있었다.
그러나 돌기둥은 금박지를 뗴어 내기 무섭게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사형, 제가 뭘 발견했는지 한번 보시죠!”
장정의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금박지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곳은 한때 풍파대(風波臺)라고 불렸던 곳입니다. 상고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는 곳이죠.”
“풍파대?”
장정의가 손을 뻗자 수백 개의 금박지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금박지는 하나로 합쳐지며 완전하지 않은 기록이 되었다.
“이미 완전히 유실되어 찾을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충 알아보는 데는 문제 없을 겁니다.
이건 당시의 사람들이 부문으로 남겨둔 기록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품고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고도 여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거죠.
물론 안에 숨어있는 깊은 뜻까진 아직 알아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뜻은 전부 해석해냈습니다.”
진양은 거대한 금박지에 새겨진 기록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부문이군.”
“그렇군요. 그럼 사형께서 먼저 살펴봐 주시지요.”
상당히 많은 양의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부분은 부문의 앞뒤의 내용을 모두 합쳐야만 비로소 완벽한 하나의 정보가 되었다.
장정의의 말대로였다.
부문이 힘을 잃게 되며 유실된 부분도 있었다.
때문에 앞과 뒤의 내용을 통해 유추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엔 풍파대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이곳은 아주 먼 옛날 바람 재앙이 나타날 징조가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할 무렵 지어진 곳으로 풍도대제와 부군이 함께 힘을 합쳐 만든 곳이다.
지어진 목적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징조와 변화를 관찰하고 바람 재앙을 막아낼 방법, 혹은 재앙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시간이 흐르며 정보는 점차 쌓여갔지만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찾아내지 못했다.
대신 재앙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나 찾아냈다.
부군은 모든 생명체들의 생각과 염원을 모아 망자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당시엔 망자의 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운 좋게 일부가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귀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훨씬 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이건 단순히 부군이 제시한 방법에 불과하니까.
처음에는 상고 지부의 모든 사람들이 부군의 계획을 따랐다.
가장 위에 있는 자들부터 가장 아래 있는 자들까지 모두의 머릿속에 망자의 세계의 개념이 생겨났다.
모두들 각자만의 망자의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점차 굳은 믿음으로 변해갔다.
모두가 망자의 세계라는 곳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한 것이다.
계획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기초를 다지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간단했다.
모든 생명체들이 본능적으로 망자의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모든 사람이 믿게 될 정도로 기반은 다져졌지만 이것을 검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망자의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부군이 유일했다.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이때부터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풍도대제는 다른 길을 선택하며 떠났다.
상고 천정도 자신들만의 길을 선택하며 떠나버렸다.
단순한 의견 차이는 점차 분쟁으로 발전되었고, 분쟁은 곧 충돌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상고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태호의 계획은 그야말로 단순무식 그 자체였다.
천지의 기운을 소모하는 생명체라면 인간은 물론이고 상고 백족(百族)까지도 전부 몰살시켜버리는 것이다.
모든 변화가 소모가 멈추며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았다.
비록 상황이 호전되기를 바라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악화되는 건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태가 계속해서 유지된다면 비록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순 없어도 지금보다 악화되진 않게 된 것이다.
태미는 처음에는 부군의 계획에 동의하는 쪽이었다.
심지어 직접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보곤 부군의 계획을 포기했다.
그리고 곧바로 ‘군성(群星)’이라는 이름을 가진 계획을 실행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태미가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의 계획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태미가 일으킨 풍파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일의 경우 남아있는 기록의 양이 훨씬 더 미비했다.
단순히 초기에는 부군의 계획을 따랐으나 나중엔 태호의 계획을 지지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태미보다도 훨씬 더 못한 결말을 맞이한 듯했다.
적어도 태미는 스스로 계획을 세우며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노력이라도 했었다.
반면 태일은 마치 박쥐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를 반복하기만 했다.
지금까지 본 태일의 관한 기록들을 돌이켜보았다.
십이가 가진 기록에서조차 태일은 상고 천정의 일원이었다는 기록이 전부다.
태일은 바람 재앙이 강림하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태호의 이념에 충실한 추종자였으며, 특히 인간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한 존재였다.
과거 단신으로 십이사와 싸운 적도 있었고 의사와 봉사를 막은 적도 있다.
그의 죽음조차도 의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진양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심으로 세 천제와 척을 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토대로 생각해 본다면 태일이 진양을 가만히 놔둘 리는 없다.
아니, 어쩌면 그 누구도 가만둘 생각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쪽이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태일의 부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부활했다.
태호는 부활을 하고도 수만 년 동안 조용히 숨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당히 양지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바람 재앙이 강림하며 천지의 대세에 의해 찢겨나갔다.
태호조차도 한참 전에 부활을 했는데 바람 재앙이 오기도 전에 먼저 죽은 태일이 아직까지 부활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어쩌면 이미 한참 전에 부활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떤 대세계에서 부활했는지 밝혀지지 않았을 뿐.
호량이 부서지고 상고가 멸망했다는 전제조건하에 태일이 어느 대세계에 갇혀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말이 된다.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대세계에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바람 재앙에 의해 찢겨나갔다고 한다.
허공은 점점 더 커지며 팽창해나갔고, 대세계와 대세계 사이의 거리도 점차 멀어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허공을 휘젓고 다니며 운 좋게 대세계를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은 백일몽이나 다름없다.
여기까지 금박에 적힌 내용을 모두 살펴보았다.
꽤 가치 있는 정보들이었다.
여러 자잘한 정보 외에도 태일에 대한 정보도 꽤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상당한 부분이 유실되어 확인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진양은 소책자를 꺼내 태일에 관한 것들을 기록했다.
그는 바람 재앙이 강림하기 얼마 전에 죽었다.
과연 단순히 재수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천제가 단순히 재수 없어서 죽음을 맞이했을 리는 없다.
어쩌면 바람 재앙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며 아예 미리 죽어서 재앙을 피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통해 재앙을 피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높은 확률로 한곳에 모여있는 십이사에게 달려들었을 수도 있다.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잔뜩 분노한 십이사에게 맞아 죽은 것이다.
우선은 죽음을 통해 바람 재앙을 피한다.
그리고 천지가 다시 안정을 되찾기 시작할 무렵.
조용히 다시 눈을 뜨며 계속해서 음모를 꾸민다.
전력을 다해 태호를 돕지만 결국 모든 화살은 태호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다.
말살 계획에 대해 얘기하면 모두가 태호를 꼽지, 그 누구도 태일을 꼽는 사람은 없다.
진양은 붓을 꺼내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는 이때까지 보아온 천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런 영악한 자가 멍청하게 남의 꽁무니만 쫓아다녔을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