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눈치는 있군
“모두 전투 준비. 오늘은 특식이다.”
진양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거대 괴수 사냥 경험이라면 매우 풍부했다.
사해를 건너오며 수도 없이 많은 괴수를 질리도록 붙잡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조련사 녀석, 겁대가리 없이 덤벼들면 바로 잡아들이도록 해. 산 채로 잡든 죽여서 잡든 상관없으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괴수 조련 기능서라. 그런 건 아직 본 적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꽤 탐나는군…….’
몸길이가 삼백여 장에 달하는 대시강두경이 꼬리를 흔들 때마다 거대한 물보라가 일어났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파도, 그리고 이곳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힘의 간섭까지.
대시강두경이 활개치기엔 최적의 장소가 따로 없었다.
비록 방대한 몸집을 가지긴 했지만, 수면으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녀석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 척의 해적선이 등천조의 파도에서 밀려나 허공 너머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이제 뒤로 남은 건 마지막 한 척.
무리의 가장 뒤쪽에서 따라오던 배였다.
대시강두경의 머릿속엔 깡마른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바로 경기, 고래 조련사였다.
얼굴은 흐릿하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대시강두경의 머리를 두드리자 녀석은 힘차게 꼬리를 흔들며 유령호 아래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대시강두경은 그대로 유령호와 부딪쳤다.
콰과광-
바닷물이 마치 폭발하듯 일어났고, 유령호의 거대한 함체는 수면 위로 붕- 하고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광막이 뿜어져 나오며 유령호를 감쌌다.
그리고 팟- 하며 돛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강력한 바람이 불어오며 유령호를 점점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령호는 허공에 뜬 채 더 이상 수면으로 추락하지 않았다.
거대한 유령호는 마치 바다 위를 항해하듯 수면에서 백여 장 정도 떨어진 허공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다음 파도 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를 쳐올린 대시강두경은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배가 다시 수면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떨어지지 않았다.
대시강두경은 천천히 해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머리를 일부만 내민 채 새까만 눈동자로 허공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녀석의 눈에 허공에 둥둥 뜬 채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는 유령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 대시강두경은 해적선 가장자리에서 머리를 쭉 내민 채 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죽어라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흑피는 연신 침을 질질 흘리며 대시강두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귀 역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녀석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헤벌쭉 벌린 나귀의 입 너머로 이빨 사이에 끼어있는 고기 조각이 보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마치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녀석을 손질해버릴 것처럼 칼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선장님, 저거 먹을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특히 저 날개가 아주 일품이라고. 하지만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날개보단 갑골 밑에 있는 살을 가장 먼저 먹겠지. 그곳이 진짜 별미거든!”
대시강두경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때, 녀석의 눈에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사람의 등 뒤로 검은 기운이 몰려들며 어떤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심해제경(深海帝鯨), 갑골용경(骨甲龍鯨), 호두흉경(虎頭兇鯨)까지.
이들은 모두 고래의 형상을 한 거대 바다 괴수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대시강두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흉포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이들을 육식동물이라고 본다면 대시강두경은 온순한 초식동물에 불과하다.
대시강두경의 눈빛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계속해서 더욱 많은 환상이 사람들의 등 뒤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환상이 보인다는 것은 곧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이 환상 속에 보이는 존재를 전부 잡아먹었다는 뜻이다.
“우어어어어…….”
겁에 질린 대시강두경은 마치 소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며 조금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백 장 정도 뒤로 물러선 대시강두경은 새까맣고 끈끈하면서도 썩은 비린내가 풍기는 검은 점액을 퉤- 하고 유령호를 향해 뱉었다.
바로 그 순간, 대시강두경은 미친 듯이 날개와 꼬리를 흔들며 파도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있는 조련사가 뭐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는 듯했으나 대시강두경은 듣지 않았다.
녀석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대시강두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배 가장자리에서 목을 쭉 뺀 채 침을 흘리며 녀석을 바라보던 이들은 멍한 눈으로 사라져가는 대시강두경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쉽군. 저녁 찬거리가 사라져버렸네.’
멍한 건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유령호에 타고 있는 다른 승객들 역시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사라져가는 대시강두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저 녀석들 이 근방에선 유명한 놈들이잖아.’
‘무적의 바다 괴수라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도망친다고?’
‘기껏해야 배와 한 번 부딪친 것이 전부잖아!’
갑자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대시강두경이 무언가에 의해 혼이 나갈 정도로 겁을 먹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용연향(龍涎香)을 토해내면서까지 유령호의 발목을 붙잡아놓으려고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선장님, 녀석이 그냥 가버렸는데요.”
흑피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녀석은 여전히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랬잖아. 그렇게 대놓고 침을 질질 흘리는데도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진양이 피식 웃으며 흑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놀라서 도망치게 만들다니. 어쩔 수 없지. 오늘은 굶는 수밖에!”
사실 아쉬운 건 진양도 마찬가지였다.
백수랑 고래 조련사가 가진 조련 기능서라니.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귀한 물건이었다.
심지어 백수랑 고래 조련사와 마주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름 희귀한 존재인데 알아서 제 발로 찾아와줘서 고마웠던 참이었다.
이제 남은 건 녀석을 죽이고 습득 능력을 사용하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선원들 때문에 잔뜩 겁을 먹은 대시강두경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버리고 만 것이다.
누가 봐도 조련사가 머리를 돌린 건 아니었다.
대시강두경이 극심한 공포 상태에 빠져 조련사마저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게 분명했다.
“죄송해요, 선장님. 다음부턴 선장님 말 잘 들을게요.”
흑피는 잔뜩 풀이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그래도 손해를 본 건 아니잖아.”
진양은 부드럽게 흑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못한 이 녀석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가서 장환이한테 먹을 것 좀 달라고 해봐. 내가 얘기해둘 테니까.”
“감사합니다, 선장님!”
흑피는 금세 활짝 웃는 얼굴로 군침을 뚝뚝 흘리며 소장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진양은 피식 웃으며 갑판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찐득한 검은색 점액이 있었다.
코를 뚫어버릴 듯한 강력한 악취를 풍기고 있는 물건이었다.
“최상급 용연향이군. 냄새나 시간으로 봐선 적어도 천 년 이상은 묵혀진 물건 같은데. 그야말로 최상급 재료가 따로 없군!”
진양은 삽을 꺼내 아직 굳어지지 않은 용연향을 모아 비어있는 선실에 널어두었다.
이대로 놓아두면 수분이 날아가며 용연향이 굳어지게 될 것이었다.
용연향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향료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였다.
영향(靈香), 훈향(熏香)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향에 사용할 수 있는 만능 재료와도 같았다.
특히 요왕 대시강두경이 스스로 뱉어낸 용연향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 극상품 중의 극상품으로 무궁무진한 용도로 쓰이게 될 것이었다.
일부 공법은 품질 등급이 높은 향의 도움을 받아야만 시전할 수 있다.
예전에 도문에서 제향사(製香師)라는 이름을 가진 극소수의 희귀한 수도사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향을 만드는 사람이란 뜻인데 다양한 힘을 가진 여러 종류의 향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예전에는 명등을 제작하는 수도사들과 같이 드물게 찾아볼 수라도 있는 존재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제향 비법은 귀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향이 유일했다.
사실 진양은 오래전 기능서에서 제향과 관련된 기술을 습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돈이 궁했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만 조금씩 구해 향을 제작한 것이 전부였다.
다른 재료로는 시도조차 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무엇보다 좋은 재료가 손에 들어온 이상 이대로 썩힐 수는 없었다.
고래 조련사를 놓친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신선한 용연향을 얻었으니 크게 손해는 아니었다.
‘나쁘진 않군. 다음에 저런 녀석들을 또 만나면 똑같이 협박해야겠어. 용연향을 내놓든지, 아니면 잡아먹히든지. 흐흐흐…….’
본격적으로 위기가 찾아오기도 전에 끝나버리자 유령호는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지금까지 까칠하게 굴던 승객들은 한바탕 위기를 넘기고 나자 완전히 달라졌다.
선장이 대시강두경을 잠시 노려본 것이 전부였다.
별다른 방법을 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대시강두경은 뇌물까지 바쳐가면서 혼이 빠져라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 못했으니 돈을 돌려달라며 선장에게 따질 생각이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승객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순간 사람들은 강호에 떠도는 선장에 대한 소문은 누군가 고의로 다른 이들을 한 방 먹이기 위해 퍼뜨린 거짓 소문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령호의 선장이 무능하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어쨌든 승객들은 이전과는 달리 매우 온순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이젠 순한 양처럼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적어도 눈치들은 있구만.’
등천조 밖으로 펼쳐진 허공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운무가 일어나며 왜곡된 느낌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한 층의 파도를 뛰어넘어 구름층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금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마침내 비경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