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357
357화 귀혼곡
여족은 신비로운 존재일수록 강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외부와의 교류가 잦은 자들은 사실상 그저 그런 수준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진양은 적당히 기회를 봐서 무함경을 익힌 여족 선조와도 악수를 나눌 예정이었다.
보물을 그냥 놔두고 가는 건 결코 예의가 아니었다.
확실하진 않아도 적어도 습득 능력 정도는 한번 써 봐야 하는 법!
그런데, 나무 인간과 다시 만난다면 헌일의 시신에 대해선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과연 해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진양의 기억을 들여다보고도 별말이 없었다.
오히려 나무 요괴가 죽음을 맞이할 때의 슬프고 처량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버렸다.
물론 진양은 이미 이 일에 대해 잊은 지 오래다.
아예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기억나는 건 나무 인간에게 흑여 중에 헌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물어볼 틈이 없었다.
제대로 얘기도 안 끝났는데 도망가버린 탓이었다.
일전에 얻은 정보를 토대로 진양은 여족 구지중 흑여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풍여(風黎)를 찾아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여족의 행방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통해야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양은 몰래 움직이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숨김없이 공개적으로 흑여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 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진양이 묵고 있는 객잔으로 푸른 두건을 쓴 남자 두 사람이 찾아왔다.
진양은 그들을 보자마자 삼생귀류를 꺼내 보였다.
“난 백여의 친구입니다. 흑여의 어느 대인의 부탁을 받고 만나러 온 것이니 길을 안내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양의 손에 들린 삼생귀류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완전히 연화되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황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두 손을 교차하여 가슴에 얹어 예를 표했다.
“누군가 흑여의 행방에 대해 캐내고 다닌다는 말만 듣고 불순한 목적을 가진 사람인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신물을 들고 계시는 걸 보니 저희가 오해했던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 중 비교적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다시 한 번 예를 갖추며 말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부족으로 돌아가서 장로님께 보고를 드려야 해서요.”
“뭐, 말 못 할 건 없죠.”
진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우연히 죽은 흑여 사제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전 그저 그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가려는 것뿐입니다. 다소 중대한 사정이 있는 만큼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물러갔다.
흑여의 사제라니.
거기에 눈앞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진양은 신해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설령 덤빈다고 하더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거기에 백여에서 가장 존귀하여 여겨지는 신물까지.
여기까지만 봐선 크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두 풍여인은 진양을 장로에게로 데려갔다.
여족에서 사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일상 업무를 관장하는 장로가 존재한다.
풍여의 실력은 구지중에서도 가장 약한 편에 속했다.
사제도 주맥(主脈)이 있는 곳에만 존재한다.
현재 진양이 있는 곳은 풍여의 작은 부족이었기 때문에 사제는 없었다.
장로와 만난 진양은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이 곧바로 풍여의 주맥이 있는 곳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풍여 사제와 만나게 되었다.
깡마른 체형, 맑게 빛나는 눈빛, 몸을 감싸고 있는 기운.
범상치 않은 모습의 사제였다.
“풍여 사제, 아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진양이라고 합니다.”
“전 한때 흑여에서 수련을 했던 사람입니다. 흑여로 가길 원하신다고 들었는데, 그전에 제가 먼저 모셔온 흑여 사제분을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대인께서 설령 백여의 손님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모셔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진양은 흔쾌히 헌일의 관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아포는 관을 향해 예를 갖춘 뒤, 조심스럽게 관 뚜껑을 열었다.
헌일의 시신을 보게 된 아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황급히 뚜껑을 닫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다시 몸을 일으킨 그의 표정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사고로 죽은 사제이겠거니 했는데, 흘누헌일 대인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수천 년 전에 실종되신 분께서 마침내 다시 돌아오게 되시다니. 자,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유명하신 분인가요?”
진양이 물었다.
“제가 이분을 처음 만났을 땐 이미 임종을 앞둔 상태라, 이름과 흑여의 사제라는 말 외에 다른 얘기는 듣지 못했거든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대인, 헌일 대인께서도 대인을 굽어살피실 겁니다.”
아포는 진양에게 극진히 예를 갖추었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경계심이 많이 허물어진 모습이었다.
“흘누헌일, 이 이름은 진정으로 큰 공로를 세우고 강한 실력을 갖춘 사제에게만 내려지는 이름입니다. 흘누헌일 대인께서는 수천 년 전 흑여의 전설로 남아있는 사제이십니다. 흑여 대사제의 직책을 이어받기로 되어있었는데, 이유 모르게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하더군요. 자, 그럼 일단 출발하시죠.”
길을 나선 두 사람은 깊은 산골짜기를 걷기 시작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독충과 맹수는 점점 더 많아졌고, 장기(瘴氣)와 독기(毒氣) 역시 점점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포와 함께 있으니 위험한 순간이 닥칠 때마다 어디선가 산바람이 불어오며 독충이나 맹수 따위를 날려버렸다.
신기한 건 독충과 맹수들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독기와 장기가 깔려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산바람이 불어오자 안전한 길목이 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에게는 상당히 골치 아픈 장소였으나, 아포는 마치 평지를 걷듯 편하게 그곳을 지났다.
한편 진양은 그 모습에 조용히 감탄했다.
소문에 따르면 여족 구지는 각 지파마다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풍여족은 풍이라는 이름답게 바람을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전설에 의하면 여족의 한 선조가 신명의 힘을 훔쳤다고 한다.
이 힘은 핏줄을 따라 계승되었고, 덕분에 이들은 요족처럼 태생적으로 어떠한 힘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신통력이나 공법과 같은 힘이 아니었다.
이건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본능이었다.
진양의 시선이 안개가 짙게 깔린 산맥으로 향했다.
그저 무사히 헌일의 장례를 마치고 무함경을 익힌 자의 무덤을 찾아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장정의가 도움이 될 거라곤 사실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다.
별로 믿을만한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 *
같은 시각, 풍여의 조지(祖地).
장정의는 무덤 위로 머리만 반쯤 내민 채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밖으로 나왔다.
그다음 재빨리 무덤에 파인 부분을 원상복구 시켜두었다.
“거렁뱅이 새끼들. 제대로 된 무덤 하나 없잖아. 그나마 난이도가 식은 죽 먹기 수준이라 다행이지. 그래도 삼 일 동안 한 바퀴를 돌며 꽤 익숙해졌다고.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여족 구지의 조상묘를 전부 살펴볼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흔쾌히 승낙할 걸 그랬네.”
깊은 산속이라 밤낮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안개 속을 걸었다.
진양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거대한 용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습의 산맥이었다.
그러나 길게 뻗은 큰 길이 아닌 작은 오솔길로만 걷고 있었다.
오솔길 옆은 흐릿하여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고, 발밑은 마치 구름을 밟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치 비경 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주위의 공간에선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새 지저귀는 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어색할 정도로 지독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아포가 말했다.
“곧 도착할 겁니다. 흑여에서도 흘누헌일 대인을 모시기 위해 마중 나온 듯합니다.”
짙은 안개 너머에서 희미하게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피리 소리는 산맥을 가득 채우며 주위의 분위기를 묵직하게 만들었다.
피리 소리를 듣고 있자니 슬픔이 느껴졌고, 심지어 머릿속에는 헌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건 공법이나 신통력이 아니었다.
피리가 가진 본연의 힘, 혹은 울려 퍼지는 곡조에 서려 있는 힘이다.
헌일은 진양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듯했다.
피리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짙은 안개는 점점 걷혀가기 시작했다.
앞쪽으로 뻗어진 협소한 오솔길은 길게 뻗어 멀리 보이는 허공과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두 줄로 간격을 맞춰 서 있었다.
손에는 푸른 등불을 들고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서 있는 그들은 전부 지면에서 세 뼘 정도 떠 있었다.
허공을 밟고 서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새까만 옷을 입고 있었고, 쇠뿔로 만든 장식을 머리에 달고 있었고, 얼굴엔 얇은 은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모습이었기에 틀로 찍어냈다고 해도 믿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다소 의외인 점도 있었다.
백여가 귀신을 부리는 데 능숙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는데, 흑여에 이토록 많은 귀신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게다가 전부 하나같이 여자 귀신이었다.
귀신들에게선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짙은 음기와 하늘을 찌를 듯한 귀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이러한 기운을 뿜어내지 않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 말은 여기에 서 있는 귀신들이 전부 족히 귀왕 정도 되는 경지에 오른 자들이라는 뜻이다.
대충 살펴보니 손에 푸른 등불을 든 귀왕이 서른여섯 명 정도가 있었다.
그 뒤로 차림새가 약간 다른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얼굴의 윗부분만 가면으로 가리고 뼈로 만든 피리를 불고 있는 자들이었다.
두 사람에게선 기괴한 기운이 느껴졌다.
상당히 짙은 생기가 느껴졌으나, 이상하게 귀기도 느껴졌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구분 안 갈 정도였다.
뼈 피리에서 구슬픈 곡조가 흘러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등불을 든 여자 귀신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구슬픈 곡조와 이곳 특유의 어조가 어우러지며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아닌 처량하고 황량한 분위기였다.
“음머!”
안개 속에서 우렁찬 황소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 장 정도 되는 거대한 검푸른 물소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와 대열의 뒤로 합류했다.
“귀혼곡이군요. 정말 오랜만에 듣습니다.”
무리가 다가오자 아포는 옆으로 비켜서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다가온 무리는 진양의 앞에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