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665
665화 날로 먹을 생각
심성낙이 먼저 와서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진양은 진천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장정의를 만나려는 목적은 간만에 인사를 나누기 위함도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최근에 얻은 좋은 물건을 선물로 주기 위함이다.
비록 아깝긴 했지만, 그냥 두면 어쨌든 썩어 없어질 물건이니 미련 없이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약간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으나 결코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심성낙의 얘기를 듣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배후 인물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고 백리칠까지 죽은 상황에서 화가 난 진양이 할 수 있는 일 중 판을 뒤엎는 것보다 적절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양은 마음속으로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입으로는 심성낙을 안심시켰다.
“심 대인,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형부에 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까요. 물론 진천고가 상당히 쓸 만한 건 맞습니다만, 함부로 울렸다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한을 살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여태껏 진천고를 울려서 좋은 결과를 본 사람도 몇 없지 않습니까?”
만약 다른 일이었다면 진천고를 울려도 형부 상서까지 함께 엮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신전에 대한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곧장 순천사와 연관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기 드문 무관 출신의 인물이 형부 상서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진천고를 울리며 난장판을 만들어버린다면 심성낙도 재수 없게 걸려 넘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아군인 심성낙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진양이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니 심성낙은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
진양과 마주한 횟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손쉽게 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제 수하 얘기 기억하십니까? 과거에 어느 한 거물급 인물에게 원한을 사서 낙인이 찍힌 그 친구 말입니다. 이번에 함께 왔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낙인을 지워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네.”
심성낙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파가 과거 어느 거물급 인물에게 원한을 샀는지도 묻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심 대인.”
진양은 곧바로 포권을 취하며 도파를 데리고 왔다.
이어서 가면을 벗자 인상을 한층 더 강렬하게 만들어주는 기다란 칼자국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마에는 신조의 낙인인 자배금인(刺配金印)이 찍혀있었다.
이 낙인에 찍히면 아무리 수련을 해도 경지를 돌파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혈맥 자체를 봉쇄당해 후대의 수련 길까지도 막혀버린다.
상당히 지독한 낙인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낙인이 찍힌 자들은 일생 동안 죽는 것만 못 한 삶을 살다가 한만 잔뜩 맺힌 채 최후를 맞이한다.
후대에도 저주와 같은 낙인이 이어지기 때문에 괴물 같은 재능을 지닌 자식이 태어나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건 꿈도 꿈 수가 없었다.
그만큼 유배는 사형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이었다.
심성낙은 자신의 도장을 꺼내 기운을 흘려보냈다.
이어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와 도파의 몸을 비추었다.
도파의 몸 앞으로 한 장의 텅 빈 죽간이 모습을 드러냈고, 허공에 둥둥 뜬 죽간 위로 도파에 관한 모든 정보가 적힌 문서가 떠올랐다.
몇 줄이면 끝나겠거니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문서의 내용은 끊임없이 아래로 이어졌으며, 빼곡한 내용의 문서는 무려 수십 장에 이르고 나서야 간신히 멈춰 섰다.
잠시 문서의 내용을 살펴본 심성낙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과거 헌국공의 사건에 휘말렸던 모양이군…….”
그나마 다행이었다.
현재 헌국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심성낙이 손을 뻗자 죽간이 스스로 접혔고, 도장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회수되며 도파의 얼굴에 찍혔던 낙인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낙인이 사라지며 오랜 시간 신해 최고봉에 머물러있던 도파의 몸에서 극렬한 영력의 파동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짓눌려있던 기운이 그대로 방출되며 그는 곧장 영태의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기운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상승했고, 영태 최고봉에 이르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는 오랜 시간 낙인에 발목을 붙잡혀있는 바람에 진급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기운이 쌓인 것이다.
그러다 발목을 붙잡던 낙인이 사라지자 한 번에 두 경지나 가깝게 진급을 이룬 것.
잠시 기운을 안정시킨 후, 도파는 눈을 뜨자마자 넙죽 엎드려 심성낙에게 절을 올렸다.
“소인 온우백, 심 대인께 입은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사옵니다.”
이어서 진양에게도 예를 갖추었다.
“선장님, 앞으로 더욱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낙인을 없애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진양이다.
어쩌면 심성낙도 진양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의 낙인을 지워준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진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탁했다면 심성낙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낙인을 함부로 지웠다간 스스로의 목에 칼이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만 일어나.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된 건 축하한 일이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경지가 불안정하니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거야. 당분간은 경지를 공고히 다지는 데 집중하고, 돌파는 몇 년 뒤에 하는 걸로 하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온우백은 순순히 진양의 말대로 전심 수련을 하러 선신로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아직은 경지가 상당히 불안정하기 때문에 당장은 써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온우백이 떠나고 나자 심성낙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불쌍한 친구로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허, 자네는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온우백이라는 이름조차 이제 알았는걸요. 그저 얼굴에 난 칼자국을 보고 도파(刀疤, 칼자국)이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게다가 유령호에서는 과거에 대해 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거든요.”
“그렇군.”
심성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온씨 가문은 한때 대영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꽤 큰 가문이었다네. 조정에도 꽤 많은 온씨 집안 사람들이 드나들 정도로 권력도 있었지. 허나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며 가문 전체가 휘청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자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하게 된 걸세.
낙인이 찍힌 채 유배를 당한 것으로 보아 온씨 가문의 직계 자손은 아닐 걸세. 게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온씨 가문의 사람도 아마 손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일 걸세.
뭐, 이걸 전부 얘기하자니 얘기가 길어질 것 같군. 이 정도는 자네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테니 이만 말은 아끼겠네. 사실 나도 방금 문서를 보고 안 내용이라 정확한 내막까지는 몰라서 말일세.”
“아닙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심 대인.”
진양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난 아직 처리해야 할 공무가 남아있어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네. 기회 닿는다면 또 만나도록 하지.”
심성낙은 꽤 흡족스러운 결과를 안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진양은 온우백의 과거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지금은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그가 찾아와 얘기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일단 이도로 급하게 갈 필요는 없으니 장정의부터 만나고 나서 생각하자.’
진양의 행적은 현재 모두에게 공개되어있는 상태이므로 누구든 어렵지 않게 진양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으면 장정의가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 * *
열흘 뒤.
비주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을 어슬렁거리던 장정의는 묵양에게 목덜미를 잡혀 비주로 끌려왔다.
‘그래도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장정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듯했다.
“사형, 잘 지내셨습니까? 그리워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장정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진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친놈!’
진양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발로 밀어냈다.
“날이 갈수록 입에 발린 말만 느는군. 오히려 피하려면 피했지, 네가 언제 한 번이라도 날 그리워했던 적이 있었냐?”
“사형,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전 단 한시도 사형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요.”
장정의는 진심이라는 듯 가슴까지 탕탕 두드렸다.
“그나저나 안색이 꽤 좋아 보이는데.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젊어졌어. 게다가 이렇게 빨리 나를 찾아올 줄이야. 보아하니 가만히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네.”
“먹고 살려면 열심히 움직여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일전에는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최 사백님께 빌붙게 된 거지만, 수련은 단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요. 게다가 무려 공짜로 황천마종의 조상 무덤을 여러 번 손봐주기도 했고요.
아, 물론 도굴을 했다는 건 아닙니다. 이래저래 허점이 많아서 짚어주고 보강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어서 장정의는 품속에서 옥으로 만든 호리병을 꺼냈다.
“이건 사백님께서 사형께 전하라고 하신 물건입니다. 걱정 마세요. 오는 길에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으니까요!”
호리병을 건네받아 뚜껑을 열기 무섭게 깊은 향이 흘러나왔다.
코로 향을 맡자마자 몸 안의 기혈들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
‘역시 난 멀었어. 사백님의 탕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가 일어나는데 말이야…….’
잠시 향을 음미하던 진양은 복잡한 심정으로 탕을 바라보았다.
효도하는 마음으로 스승께 바쳤던 응룡의 피의 상당량이 이곳에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응룡의 피가 섞인 탕은 한 입만 먹어도 괴수왕으로 만든 탕을 반 솥이나 마신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을 듯했다.
최양평이라면 응룡의 피로 무궁무진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만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명 연장은 물론이고 한 경지 더 높아지는 것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혈맥을 오염시키지 않고도 한두 개쯤 되는 신통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곳에 쓰라며 보낸 물건을 자신을 위해 다시 쓰다니.
진양은 호리병을 품속에 넣으며 앞으로도 좋은 물건을 구할 때마다 최양평에게 더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형…….”
장정의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분명 편지에서 제 저주와 관련해서 볼일이 있으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자, 여기.”
진양은 질질 끝 것 없이 곧바로 옥병 하나를 꺼내 장정의에게 건넸다.
“어떻게 써야 되는지는 네가 알아서 알아보도록 해. 네 몸이니까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사, 사형! 정말 감사합니다!”
옥병을 건네받은 장정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나 진양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정의야, 너 설마 이걸 날로 먹을 생각이었니?”
“어허, 날로 먹다뇨! 절 뭘로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장정의는 호리병을 품속에 집어넣은 뒤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사형,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칼날로 만들어진 산이든, 펄펄 끓는 기름 솥이든 사형이 말씀만 하신다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시끄러워. 기름 솥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