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96
896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끝났고, 세계가 환해로 바뀌기 시작하자 대장로와 윤제는 즉시 결단을 내렸다.
두 사람은 함께 죽음의 세계를 빠져나왔다.
윤제는 마음 같아선 이곳에 있는 모든 병력을 데리고 나가고 싶었으나 결국엔 혼자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환해를 통해 바깥세상으로 빠져나왔다.
윤제는 대장로 도움과 무덤에서 가져온 보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숨긴 채 수만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 땅을 밟게 되었다.
한때는 대윤 신조의 영토였던 곳.
그러나 지금은 대영 신조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신조의 힘의 반응을 완전히 가린 그는 여느 평범한 수도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때문에, 아무런 제약 없이 대영 신조의 땅에 발을 들일 수가 있었다.
거기에 대장로의 환술까지 더해져 아무런 제지 없이 대영 신조 곳곳을 누빌 수도 있었다.
그는 곧바로 진양의 저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름 뒤.
마침내 멀리 진양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장로는 윤제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형들의 반응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 * *
저택 내부.
돼지는 펄쩍 뛰며 지붕 위로 올라갔다.
고개를 쳐들고 밖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털이 삐쭉 서며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었다.
“큰일이구나! 그 말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돼지는 잔뜩 울상이 되었다.
진양이 피난을 간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그게 진짜일 줄은 몰랐다.
정말로 제군법신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로 이곳에 말이다.
이 정도라면 아마 꽤 큰 희생을 감내하고 달려온 게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절대로 그냥 돌아갈 리는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강력한 환술을 펼칠 수 있는 환술의 고수도 함께 데려온 것이다.
돼지는 황급히 대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상대가 방어를 뚫고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대장로와 윤제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돼지는 바닥에 바싹 엎드리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대인, 전 아무 관련 없는 사람입니다. 진양을 찾으러 오셨죠? 진양은 여기 없습니다. 이미 이도로 도망갔거든요.”
윤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돼지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찌푸려졌다.
돼지의 몸에 겹겹이 새겨진 봉인이 보였다.
상당히 보기 드문 봉인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본래 상당히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던 존재라는 건 한눈에 알아보았다.
다만, 겹겹이 쌓여있는 봉인 때문에 지금은 기껏해야 잡요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았을 뿐.
“이 봉인은 누가 새긴 거지? 진양인가?”
윤제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새긴 거라 저도 잘 기억은 안 납니다. 게다가 대부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대인, 진양은 이미 이도로 도망쳤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절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윤제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돼지는 순순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걸로는 부족했는지 계속해서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대인, 전 진양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놈은 저를 탕으로 끓여서 잡아먹으려고 했던 놈입니다. 대인,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윤제는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힘을 방출하여 구멍을 뚫으며 일부러 금제를 발동시켰다.
사방에서 빛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계속해서 시끄럽게 재잘거리던 돼지를 그곳에 던져버렸다.
진양은 잔뜩 겁을 먹은 듯했다.
그는 극북빙원에서 일이 벌어지기 무섭게 이도로 숨어버렸다.
게다가 돼지의 말을 들어보니 진양은 이미 그가 대영까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던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진양은 돼지를 이곳에 놓아둔 채 혼자 도망쳐버렸다.
애초에 돼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돼지의 말대로 그는 식량에 불과한 존재가 확실할지도 모른다.
겉보기엔 하찮게 보이는 돼지였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최소 법상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던 녀석이 분명하다.
놈의 몸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층의 봉인이 겹겹이 새겨져 있다.
법상 수준의 요괴를 일개 잡요괴 수준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이나 기반에는 아무런 피해조차 입히지 않았다.
상당히 강한 실력을 가진 누군가, 혹은 여럿이 실험 삼아 돼지의 몸에 봉인을 새긴 듯한 모습이었다.
사본이 현재 대세계의 틀 안을 벗어났을 가능성을 현저히 낮다.
진양은 자신의 무덤에 다녀간 적이 있다.
그리고 현재 눈앞에 펼쳐진 무시무시한 봉인까지.
모든 조각이 모이며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사본은 강한 봉인에 의해 봉인된 게 분명했다.
원본조차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봉인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분명 진양과도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진양이 사본을 가져간 게 아니라고 해도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건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실력만으로 판단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진양을 자신의 휘하에 둘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이도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은 굴뚝 같았으나, 윤제는 애써 화를 눌러 참았다.
비록 보물의 힘과 대장로의 도움을 함께 받고 있긴 했지만, 이대로 이도로 들어가 조금이라도 손을 쓰는 순간 모든 게 발각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영제가 버티고 있는 한 이도로 들어가는 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간신히 화를 누그러뜨린 윤제는 대장로에게 말했다.
“천천히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합세.”
두 사람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윤제는 우선 사람을 보내 이도의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사람을 보낸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진양의 행방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진양은 최근 며칠 동안 계속해서 정천사에 머물며 단 한 순간도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윤제가 보낸 자들은 정천사 안쪽까지는 살펴볼 수가 없었다.
이들이 확인한 건 안으로 들어간 진양이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뿐.
사실 진양이 정천사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은 정천사의 사람들이 밖으로 퍼뜨린 것이다.
위흥조는 상당한 불만을 품으며 진양을 쫓아내고 싶어 하지만 그를 쫓아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정보를 입수한 윤제는 왠지 모르게 함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었다.
일전에 정천사를 극북빙원으로 보내 한바탕 수색을 벌였던 것처럼 말이다.
진양은 신분을 완전히 세탁했다.
뭐가 진짜 목적인지, 또 어떤 식으로 대영을 상대하라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대영과 공통된 적을 두고 있었다.
도문의 전도인으로서 전조와 대영 모두에게 원한을 지고 있으니, 상황에 따라 밀고 당기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게다가 현재 진양의 모습으로 보아하니 대영과 함께 손을 잡고 전조를 영원한 나락으로 보내버리려는 건 확실했다.
윤제는 조용히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대충 감이 잡혀가는 느낌이었다.
대장로가 무슨 수작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다.
환해는 윤제보다 훨씬 더 사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사본을 찾는 일이라면 대장로는 아마 윤제보다 훨씬 더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이다.
대장로는 전면전에서는 동급 수도사에 비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때로는 제군법신조차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도로 잠입을 한다든지 말이다.
“대장로, 진양의 행방을 찾았네. 다만, 녀석은 숨어서 꼼짝도 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군.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이도로 들어가서 놈을 끌고 나오는 것이네. 허나 난 그런 쪽으로는 능숙하지 않아서 말일세. 그래서 말인데, 부탁을 좀 해도 괜찮겠나?”
대장로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스스로 환술의 정점에 올랐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놓고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대장로는 성큼성큼 성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성문 안으로 들어설 때, 때마침 또 다른 수도사도 함께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성문 위에 매달린 법보가 번쩍이며 빛을 뿜어낼 때.
대장로는 이미 성안으로 완전히 들어서고 난 뒤였다.
하지만 바로 뒤따라오던 수도사는 경비병들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다시 검사를 해 본 결과 그는 몸속에 영수를 숨기고 있었다.
대장로는 곧장 정천사 관아로 향했다.
그 누구도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문 손잡이 위로 환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날카롭게 환술의 흔적을 찾아냈다.
하지만 상대가 환해 대장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환해 일족의 장로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순간 대장로가 환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로님, 규칙은 잘 아실 테니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당당히 정체를 밝히고 오셨다면 상관없었겠지만, 몰래 나타나신 이상 결코 안으로 들여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규칙은 나도 안다. 하지만 난 그저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일 뿐. 결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들여보내 주지 않겠다고? 넌 날 막을 수 없다. 막는 건 고사하고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조차 불가능할 게다.”
환수는 난처하다는 듯 신음을 내뱉으며 곁에 있는 문지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대장로께서 어떤 수단을 쓰시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과거의 맹약에 따라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건 나도 안다. 만약 정천사에서 함부로 손을 쓴다면 그건 죽음을 스스로 자처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지.”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환해의 치명적인 단점조차 보완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천사에서 사고를 쳤다간 내일 당장 영제가 환해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윤제가 무슨 꿍꿍이로 자신을 보냈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알면서도 이곳까지 왔다.
그는 처음부터 강행 돌파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부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과거 영제가 환해 일족을 살려두었던 건 단순히 환해 일족이 주제를 알고 꼬리를 내렸기 때문이 아니다.
환수가 버티고 있는 한 아무리 환해 일족이라도 마음대로 이도 곳곳을 드나드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과거 맺었던 계약은 환수를 이용하여 이도 곳곳을 지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환해 일족을 대비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들어가는 건 자유지만 그 누구와도 싸움을 벌여선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계약의 가장 큰 맹점.
싸움을 벌이는 건 곧 계약을 위반하는 행위다.
때문에, 환수는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침입자를 경고하고, 때로는 온갖 수단을 통해 막아야 한다.
만약 발각된다면 문제가 커진다.
게다가 정천사와 같이 민감한 곳에서 발각된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어쩌면 영제가 직접 나서서 환해를 토벌하려고 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