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97
897화 인격과 존엄을 무시당한 진양
대장로는 정천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모두들 그를 못 본 척하며 지나쳤다.
물론 대장로는 너무 깊은 곳까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은거울이 높이 매달려 아래를 비추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가 환술의 고수라도 정천사의 전승 법보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뒤.
진양이 한 건물에서 밖으로 나와 정자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정자에 앉아 바람을 쐬며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장로는 정자로 다가가 진양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진양은 크게 놀라며 온몸의 기혈과 진원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기운을 잠재웠다.
진양은 미소와 함께 찻잔을 하나 더 꺼내 대장로에게 권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랜만이오.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오. 잠시 나눌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소.”
대장로는 미소를 머금은 채 진양이 건넨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감탄하며 한마디 했다.
“남해의 신유차군. 꽤 오래전에 맛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여전히 훌륭하오.”
멀리 몇 명의 외후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힐끔 진양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쳤다.
대장로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대장로님,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일전에 알려주었던 동해 해저 구멍 너머에 있던 지름길 말이오. 그곳에 함정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
대장로는 함정에 대한 얘기를 전부 해 주었다.
그리곤 진양의 눈을 빤히 살펴보며 물었다.
“진 선장은 그때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갔던 것이오?”
“그냥 강 안으로 뛰어들어 물 흐르는 대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것 밖에 달리 방도가 더 있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함정이요? 게다가 그 강이 전설로만 전해 듣던 장신하라니. 장로님, 농이 과하십니다. 장신하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그렇게 단순할 리 있겠습니까?”
진양은 그런 얘기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사실 지난번 대장로가 진양을 찾아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언젠간 그가 자신을 또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함정에 대한 기억은 따로 잘라서 보관해두었다.
심지어 장신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함께 잘라냈었다.
대장로의 말을 듣고 잘라낸 기억을 다시 살펴보니, 그제서야 그때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진양의 반응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그러나 진양의 대답은 그를 놀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장신하로 뛰어들다니.
그게 어떤 강인데 마음대로 뛰어든단 말인가?
“어쩐지. 그래서 처음 봤을 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강이었던 것처럼 느껴졌었던 거군요. 무슨 놈의 강에 귀신이 우글거리나 했더니. 심지어 제힘까지 속박하더군요. 이제 보니 그게 바로 장신하였군요.”
진양은 그제서야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손을 뻗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수신 상태로 만들었다.
수신 상태가 된 손에선 장신하의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대장로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진양이 정말로 장신하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수신법은 연체 수도사들이 익히는 수많은 신통력 중 하나로, 사실 특별한 신통력은 아니다.
심지어 거의 외면 받는 신통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수신법을 이 정도 수준으로 연마하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진 단 한 번도 누군가 수신 상태로 장신하에 녹아들며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진양은 그것이 장신하인 줄 모르고 수신 상태로 뛰어든 것뿐이다.
그저 귀신이 이상할 정도로 우글거리는 기괴한 강으로만 여긴 듯했다.
이렇게 되면 진양이 무사히 함정을 피해 죽음의 세계까지 도달했다는 것도 사실인 듯했다.
이전에 얘기했던 것과도 전부 맞아떨어졌기에 크게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장로의 죽음은 단순히 사고였단 말인가?’
여전히 의심이 가긴 했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직 더 물어봐야 할 것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진양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양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장로님, 설마 제가 이장로님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말 너무하시군요. 제가 그런 졸렬한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전 대영 신조의 예부 우시랑으로서 정천사 수존 대인인 위 대인과도 가까운 사이이고, 뿐만 아니라 폐하의 총애까지 받고 있는 몸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만 먹는다면 손쉽게 환해 일족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죠.
전 분명 그곳에서 수많은 병마용들을 두 눈으로 목격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둘러싸인 강자들과 전조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도 보았었고요. 그곳이 전조와 관련된 곳이라는 사실을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 어쩌면 그곳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전조 대제의 무덤일지도 모르는 일이죠.
지금 조정의 분위기가 얼마나 흉흉한지는 잘 아실 겁니다. 전조와 관련된 부분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조차도 금기시되는 분위기죠. 허나 저는 장로님과 약속했었습니다. 죽음의 세계와 통로에 대한 일은 비밀로 하는 것으로 말이죠.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저는 폐하께 큰 벌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위험까지 무릅쓰며 약속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의심하다니.
환해 일족의 그릇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됐던 겁니까?”
진양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좋습니다. 제가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다면 제 목을 치십시오. 다만, 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되실 겁니다.
대장로님쯤 되시는 분이라면 정천사 대문에 달린 환수쯤이야 가볍게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절 치시는 순간, 내일 아침이 밝기 무섭게 정천사 외후들이 환해로 몰려들 겁니다.
환해는 앞으로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평범한 비경으로 전락하겠죠. 통로에 함정이 있다는 사실도 온 천하에 전부 소문내도록 하겠습니다!”
“진 선장, 제발 진정하시오.”
대장로는 황급히 진양을 진정시켰다.
이는 대장로가 가장 걱정해오던 일이다.
만약 환해의 약점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면 환해는 더 이상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환해 일족의 지위도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진양을 의심했던 건 단순히 의문을 가졌던 것뿐이지 확신을 했던 건 아니다.
사실은 이 일이 진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찾아왔던 것도 단순히 정보를 캐내기 위해 찾아왔던 것뿐이다.
진양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환해로 통하는 지름길과 죽음의 세계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누설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만약 그가 이 사실을 누설했다면 아마 지금쯤이면 누군가 환해로 들어왔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윤제에게 함정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니 다시 의심이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통로를 통과하고도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은 진양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진양을 만나보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진양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쯤 되니 대장로도 이장로의 죽음을 그저 하나의 사고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모든 것이 처음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면 진양도 원본과 사본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심지어 산하도의 존재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만약 사본의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간 사람이 진양이라면 일출 후 다시 환해에 나타났어야만 한다.
당시 그는 환해 일족의 사람들과 함께 죽음의 세계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환해 일족의 사람들과 함께 환해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야 환해를 떠났다.
윤제와 함께 무덤에 들어갔을 때 확실히 느꼈다.
진양의 실력으로 무덤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령 어떻게 들어온다고 해도 그곳에 있는 강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윤제는 출구에서 한때 그곳을 지키던 강자가 있었는데 사라졌다는 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누군가 단숨에 무덤 입구까지 달려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들을 모두 베어버리고, 최대한 빠르게 문을 지키고 있던 자를 쓰러뜨린 후 입구를 통해 나갔다는 것.
온 천하를 통틀어 이 정도 실력을 가진 강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다.
사본이 봉인된 것으로 보아 사본의 본체 자체를 누군가 손에 넣은 듯했다.
그는 사본을 통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강자와 싸움을 벌여 쓰러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일말의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현재로서 가장 현실적인 추측은 이것뿐이다.
대장로는 진양을 달래면서도 곰곰이 셈을 해 보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식으로 진양을 대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서로의 약속이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환해가 산하도 안에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아는 사람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극소수인 것도 아니다.
이건 누군가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환해 일족 자신들조차 완전히 화사의 산하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내부에 형성된 특별한 비경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산하도에 사본이 있다는 사실은 온 천하를 통틀어도 아는 사람이 몇 없는 비밀 중의 비밀이다.
이 비밀에 환해 일족의 존망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굳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이 사실은 결코 진양 앞에서 언급해선 안 된다.
이건 진양이 지키기로 한 비밀의 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인격과 존엄을 무시당한 진양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산하도와 사본에 대한 일은 더더욱 언급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손을 쓸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했다간 곧바로 탄로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천사 관아 한가운데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진양을 일격에 죽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뿐만 아니라 진양이 이 비밀을 아무도 모르게 기록으로 남겨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함부로 손을 쓸 수도 없었고, 함부로 언급을 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언급했다간 진양에게 더 많은 비밀을 알려주는 꼴이 된다.
진양이 환해 일족과 척을 질 생각으로 비밀들을 천하에 공개하는 순간, 환해 일족은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이다.
대장로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그는 오늘 두 가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첫 번째 질문에선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두 번째 질문은 아직 남아있긴 하나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장로는 한참 동안 어쩔 줄 몰라 하며 진양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