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56
956화 누가 봐도 수상하다
시간은 계속해서 지났다.
징표에 숨어있는 백리칠도 조금씩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양을 따라온 건 결코 진양이 멍하게 앉아있는 걸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양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무렵.
검둥이의 힘이 느껴졌다.
마침내 검둥이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줘. 할 말이 있어.”
“…….”
검둥이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해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자니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리칠이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려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진양에게 발각될 수도 있었지만 백리칠의 안부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뒷일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에 비해 닭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듯 조용히 해안에 처박혀있었다.
‘망할 녀석. 끝까지 모른척하겠다 이거지?’
그때,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진양이 검둥이의 기척을 느끼곤 물었다.
“뭐야? 언제 나왔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조금 이따 얘기해 줄게. 잠깐만.”
이때, 백리칠이 검둥이에게 말했다.
“진양 아저씨한테 왼쪽으로 가라고 전해줘.”
검둥이는 백리칠이 시키는 대로 했고, 진양은 의아하긴 했으나 일단은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진양은 검둥이가 시킨 대로 한 나무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백리칠이 검둥이에게 말했다.
“바로 이 문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향계를 찾는다며? 그럼 분명 향긋한 냄새가 나는 곳 아니겠어? 유일하게 이 문에서만 향긋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거든.”
“…….”
검둥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걸 도대체 진양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검둥이는 냄새를 느낄 수 없는 존재 아니던가!
“못 믿는 눈치다? 싫으면 마. 내가 직접 아저씨한테 얘기할 테니까. 내 얘기라면 진양 아저씨도 분명 믿어줄 거야.”
백리칠은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아, 아니야. 그냥 내가 얘기할 테니까 넌 여기서 가만히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진양, 바로 여기가 향계로 통하는 입구다.”
그러나 차마 향기가 나기 때문에 이곳이 향계의 입구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마. 어차피 얘기해 줘도 이해 못 할 테니까. 어쨌든 네가 찾는 향계의 입구는 여기야.”
진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유를 물어볼 틈도 없이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것도 수상했다.
‘수상한데. 저 멍청한 녀석이 갑자기 무슨 촉이 왔길래…….’
그런데, 문득 머릿속에 번쩍였다.
‘그래!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수많은 계산을 통해 하나의 결과를 찾는 건 생각했으면서, 반대로 답을 찾고 나서 계산을 해 보는 방법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천팔백 개나 되는 힘을 오행에 따라 분류하여 또다시 조합을 한다면 천문학적인 수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문은 이천팔백 개가 전부다.
즉, 답을 찾을 확률은 이천팔백 중 하나라는 뜻이다.
우선 답이 있다고 가정하고 계산을 한다면 작업량도 이전에 비해 크게 줄게 될 것이다.
“검둥아,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 이제 보니까 너 정말 천재구나!”
진양은 큰소리로 웃더니, 눈앞에 있는 문을 답이라고 가정하며 계산을 시작했다.
* * *
하루 뒤.
진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믿기질 않는군. 그럼 정말 이 문이 맞단 말인가?’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검둥이 녀석의 촉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문을 하나 골라 역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그리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 문은 향계의 입구가 아니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야, 이걸로는 부족해.’
진양은 그 뒤로도 며칠 동안이나 여러 문을 돌아보며 역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하지만 답은 마치 정해진 것처럼 한결같았다.
이쯤 되니 검둥이의 촉에 대해서도 확신이 들었다.
이유 없이 검둥이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니 다소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검둥이 녀석에게도 말 못 할 방법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괜한 의심을 했군.’
“검둥아, 사실 난 처음부터 네가 맞다고 생각했어. 다만, 혹시나 몰라서 조금 더 확인을 해 본 것뿐이야. 어차피 급할 것도 없잖아.”
진양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검둥이를 칭찬한 뒤, 계속해서 계산에 몰두했다.
정말 간만에 칭찬을 듣긴 했으나 검둥이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때, 백리칠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걸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마 아저씨한테 내가 가르쳐줬다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혹여나 검둥이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백리칠은 곧바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몰래 진양을 따라오기 위해 꽤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만약 여기서 진양에게 모든 것을 들키게 된다면 앞으로 진양을 따라다니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게 될 것이다.
“거, 걱정 마! 절대 진양에겐 얘기하지 않을 테니. 어쨌든 난 네 편이라고. 게다가 그 가신 징표는 내가 가르쳐준 거잖아.
혹시 뭐 더 배우고 싶은 거 없어? 진양에게 들키지 않고도 따라다닐 수 있는 공법은 아직 많이 남아있거든.”
검둥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냥하게 대답했다.
“정말?”
백리칠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럼 정말이지! 내가 뭐하러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검둥이의 목소리는 매우 진지했다.
해안에 숨겨진 마수 위로 나타난 검둥이의 얼굴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호양보종에 조용히 숨어있던 닭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검둥이의 수상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호양보종 안으로 꽁꽁 숨어 버렸다.
진양이 한창 문에 달라붙어 계산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연나 가주와 나송, 그리고 연나 일족의 한 여인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세 사람은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나 그것이 진양인 것을 확인한 나송은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 선생, 우리보다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참 동안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군요.”
“뭐, 어쩌다 보니 먼저 오게 됐네요. 두 번째 부유섬 다음부터는 서로 길이 갈라진 건지 아무리 찾아도 여러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저 혼자 다른 길로 온 것 같아요.”
나주는 진양이 입고 있는 갑옷을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다소 부러운 듯한 눈빛이었다.
“이제 보니 갑옷을 챙겨서 나오셨군요. 진 선생과 만나지 못했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섬에 있던 법의들은 전부 최상급입니다. 전부 다 수낭이 직접 만든 건 아니겠지만, 그중에 가장 낮은 등급의 법의조차 진 선생의 경매에 부치면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을 정도지요. 아쉽게도 우리 연나 일족 중에 법의에게 동행을 허락받은 건 전임 가주가 유일합니다.”
진양은 별것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긴, 지금은 법의에게 끌려다니는 신세이니 어쩔 수 없겠지.’
한참 대화를 나누던 진양은 두 사람과 함께 온 여인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양이 두려웠는지 문을 빠져나온 이후로 계속해서 가주의 뒤에 숨어있었다.
진양의 시선을 느낀 가주는 그제서야 웃으며 그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저희 연나 일족의 젊은 인재 나기라고 합니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거두었고, 또 직접 향계까지 가보고 싶다고 하여 이렇게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가주는 엄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나기, 손윗사람을 봤으면 어서 예를 갖춰야지 멍하게 서서 뭐 하는 게냐?”
잔뜩 쫄아 있던 소녀는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앞으로 한 걸음 나와 진양에게 예를 갖추었다.
“소녀 나기, 진 선생을 뵙습니다.”
진양은 씁쓸하게 웃었다.
‘손윗사람이라니. 내가 벌써 그 정도로 늙었단 말인가…….’
진양의 표정에 나송은 흠칫 놀랐다.
혹여나 진양이 오해라도 할까 봐 겁이 났는지, 대신 전음으로 해명했다.
“진 선생,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이는 저희 연나 일족의 적녀(嫡女)입니다.
환해 일족과 혼사를 맺었던 것 기억하시죠? 이 아이도 후보자 명단에 있었던 아이입니다. 하지만 본인은 별로 원하지 않는 듯하더군요. 게다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바로 제 큰 형님이십니다.
아마 대략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아, 그렇군요.”
어째서 소녀가 자신을 이토록 무서워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연나 일족은 진양의 권고로 환해 일족과의 혼사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녀를 고른 것도 어쩌면 진양의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지금은 환해가 멸망하며 혼사는 없던 일이 되었지만.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나 가주가 잘못된 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설마 여러 번이나 왔다 갔다고 했으면서 아직 향계 입구조차 못 찾은 거였어?’
단순히 운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씩 들어가 보려 하다니.
게다가 분명 이곳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이게 무의미하게 목숨을 갖다 바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연나 일족은 진양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연나 일족 중에서도 가장 친한 나송이 이곳에 있지 않은가?
때문에,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진양이 한숨을 푹 쉬며 그들을 막아섰다.
“아쉽지만 그 문은 향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닙니다. 들어가봤자 분명 위험천만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고요. 저를 따라오세요. 향계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미 찾아뒀습니다.”
진짜 입구 앞에 선 진양은 준비해온 둔세향을 피웠다.
향이 피어오르며 연기가 진양을 감싸기 시작했다.
“진짜 입구는 여깁니다. 뭐, 믿을지 말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달렸겠지만요.”
진양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이제 남은 건 그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진 선생, 정말……. 이곳이 입구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나송은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진양이 입구를 찾았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귀한 둔세향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을 붙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저 가볍게 살펴보다가 알게 된 것뿐입니다.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단서들이 있더라고요. 어려울 것도 없죠.”
말을 마치기 무섭게 진양은 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 * *
문을 지나자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의 바다가 나타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은 이미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잠깐을 기다렸으나 연나 일족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진양은 피식 웃었다.
“뭐야. 쫄은 건가?”
진양은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작은 책자에 적어두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나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남아있는 기억이 없었다.
연나 일족의 여자 수도사들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봤자 처음 입구에서 보았을 때가 전부다.
그것도 남자 수도사보다 여자 수도사들을 더 많이 데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무심결에 한 번쯤은 봤을 수도 있지만, 일부러 공법을 사용하여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보지 않는 이상 그녀에 대한 기억은 찾을 수가 없다.
아무 기억이 없다는 건 처음 들어올 때부터 크게 눈에 띄는 구석이 없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이 갑자기 한참이 지나서야 두각을 드러낸다?
게다가 목숨까지 걸고 향계로 향하는 입구를 찾으려 한다?
누가 봐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