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01
성녀는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더 이상 이곳에 올 필요 없어요.”
하지만 밤늦은 시각, 그는 카를이 부른다는 말에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를과 성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알릭은 뒤늦게 성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대신전 밖으로 나가 볼래요?’라고 물은 그날 그가 그러자는 대답을 했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었을까.
적어도 그날 밤, 성녀는 울지 않았으리라.
***
알릭은 고개를 들었다. 라트반과 성녀는 이미 벽의 통로를 이용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 멀리 후원의 입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델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리라.
알릭은 후원의 입구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미친 듯이 주변을 뒤지며 다가오는 신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카를을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던 자들이었다.
알릭은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소리를 질렀다.
“가짜 성녀를 보았습니다!”
성녀는 저에게 대신전을 떠나라 했다. 그 말에 알릭은 울고 싶었다. 그녀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진심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관들이 그를 바라보자 알릭은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제가 부르자 저쪽 길로 급하게 달려 도망갔습니다. 아마도 창고가 있는 쪽으로 숨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알릭은 두 사람이 사라진 곳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앞장서겠다는 듯이 달렸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실은,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괴로워하는 성녀를 보고서도 카를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은 마지막까지 그를 위해 말했다. 대신전을 떠나라. 그 말은 어서 카를을 피해 달아나라는 뜻이었다. 어서 도망가서 살아남으라고.
알릭은 사라지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달렸다.
그가 달린 만큼 두 사람은 더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죽겠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알릭의 얼굴은 평온했다.
나와 라트반은 조심스럽게 비밀 통로가 시작되는 방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그사이에 시델의 시체가 발각되지는 않았는지 내 처소는 아직 조용한 상태였다.
“이쪽이 대신전 입구로 가는 통로예요.”
내가 옷장을 가리키자 라트반이 재빨리 그것을 열고 안쪽의 벽에 손을 대었다. 다행히 라트반의 성력으로 비밀 통로의 문이 열렸다. 라트반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나는 그를 붙잡았다.
“잠시만, 라트반. 이대로 나갈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한 다음 나는 내 방으로 뛰었다. 그러고는 천으로 된 주머니와 가방을 챙겨 재빨리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금화와 보석들을 쓸어 넣었다.
“라트반, 그쪽 서랍에 있는 것을 챙겨요.”
내 말에 라트반은 빠르게 성호를 한 번 그리더니 망설임 없이 서랍을 열었다. 그가 연 서랍에는 예전에 대신전 밖으로 나가 찾아왔던 카일레스의 단검을 시작으로 다양한 신전의 보물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라트반이 들고 있는 주머니 안에 담겼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빨리 대신전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작정 나와 라트반의 다리만 믿을 순 없다. 달릴 말을 구해야 하고 먹을 것도, 잘 곳도 필요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한 번이라도 밖에 나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전 밖의 마을에서 마차와 말들이 모여 있는 곳들을 떠올리며 나는 라트반과 함께 다시 비밀 통로가 시작되는 방으로 돌아갔다. 라트반이 먼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들어가려 하던 나는 고개를 돌려 처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대신전. 성녀를 위해 만들어진 곳.
그래서일까. 성녀가 아닌 나는 단 한 번도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껴 보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기도 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날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
“…성녀님.”
라트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떠나는 것을 망설인다고 생각한 것일까. 라트반은 조심스럽게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고민했던 질문이다. 언젠가 이 대신전을 벗어나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할까.
처음에는 그저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예전의 삶에서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면서, 내가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대신전은 물론 라트반과 레온, 아슬란으로부터 아주 멀리. 그리고 이리스에게서 아주 멀리 떠나려 했었다.
그것이 내 목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내게 내밀어진 상처 입고 검게 물든 손을 바라보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날카로운 검의 날을 잡았던 손. 원래대로라면 라트반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트반뿐만이 아니다. 레온도, 아슬란도. 모두가 나를 위해 움직였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나는 라트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트리온으로.”
트리온. 그곳에 이리스가 있다.
지하에서 일렁이다 사라진 성력이 생각났다. 그것에 손을 대었을 때, 성력은 제가 있을 곳을 찾았다는 듯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이리스에게 간 성력도 다시 가져올 수 있을 거야.’
그녀에게서 이벨리나의 성력을 되찾아야 한다.
나는 라트반의 손을 잡은 채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
“어서 찾아!”
신관들이 거칠게 성녀의 방의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는 방 앞을 지키는 여신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짜 성녀와 전 기사단장 라트반을 찾아야 한다! 서둘러!”
먼저 방으로 들어선 신관들이 안쪽에 열려 있는 서랍을 보고 소리쳤다.
“이곳에 들른 흔적이 있습니다!”
“신전의 물건들을 가져간 모양입니다!”
신관들은 빠르게 방을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녀와 라트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떠오를 때 절뚝이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카를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신관들은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카를을 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경외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 정체를 들키는 것을 두려워해 가짜 성녀가 지하 감옥에 집어넣은 신관. 그는 지하 감옥에서도 신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죄수들을 돌보았다. 그런 그가 어쩐지 걱정스럽다며 시델이 평안히 신의 곁으로 갔는지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면 시델의 시체를 발견하는 데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시델의 시체가 발견되고 나서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카를은 지하 감옥을 나왔다. 아무도 그에게 죄인이라 하지 않았다. 그가 그곳을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카를은 약자였다. 그러니 피해자일 것이었다.
잠시 카를에 대해 의심을 품더라도 절룩이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마음속에 생기는 동정심이 의심을 지워 버렸다.
방으로 들어선 카를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망설이고 있는 신전 기사단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최대한 빨리 새로운 자들로 갈아 치워야겠군.’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라트반과 함께 지내 왔던 기사들이다. 아무리 손을 쓴다 하더라도 저들은 쉽사리 라트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카를은 어떻게 해야 신전 기사단을 문제없이 빠르게 갈아 치울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답은 쉽게 나왔다.
‘트리온에 마수가 나타났지.’
헥사는 그가 기억하기로는 무척이나 강대한 마수다. 아마도 그것을 퇴치하려면 많은 기사들의 희생이 필요할 것이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그는 라트반을 믿는 기사들을 처리할 수 있고, 기사들은 그토록 자신들이 원하는 신의 곁으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혹시 살아남은 자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성녀의 성력을 보면 제 믿음이 흔들릴 것이다.
성녀의 처소를 뒤지는 신관들을 바라보면서 카를은 창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신관들이 흰 천에 덮인 시체 한 구를 옮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릭의 시체였다.
성녀와 라트반을 찾는 신관들을 이끌고 대신전의 끝까지 달려간 알릭이었다. 그는 눈속임이었을 알고 분노한 신관들에게 둘러싸이자 소리치기 시작했다.
“모두 카를에게 속고 있습니다. 저자는…!”
카를은 알릭이 진실을 내뱉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자 역시 가짜 성녀와 결탁하여 대신전을 어지럽히려 하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동안 대신전을 흔들었던 불안은 터질 곳을 찾고 있었고 카를은 그 길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신관들이 알릭에게 달려들었다. 진정하라는 카를의 목소리는 오히려 신관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소리친 것이었다.
일은 너무도 손쉽게 끝났다. 신관들의 흥분은 알릭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엉망이 된 꼴로 숨을 헐떡이는 알릭을 보면서 카를은 제가 손을 쓰지 않아도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멍청한 놈.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지.’
물론 그렇다 해도 살려 둘 생각은 없었지만.
알릭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보았다. 분명 성력을 잔뜩 썼을 것이다. 그가 어디에 성력을 그리 쏟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델은 목에 치명상을 입고 죽어 있었고 그 곁에서 피범벅이 된 칼이 함께 발견되었다. 기사가 아니더라도 그 상처를 성녀가 내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라트반을 치료해 주었나.’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봤자 알릭은 평신관이었다. 그 미약한 성력으로는 절대로 그 독을 다 치료할 수는 없다.
‘게다가 알릭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는 말이지.’
그도 그럴 것이 단검에 발라져 있던 것은 마수의 독이다. 상급 신관이 들러붙어도 그것을 완벽히 치료하기란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모든 신전에는 성녀와 라트반의 수배령이 내려질 것이다. 그들은 그 어떤 신전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없다.
‘어떻게 하려나.’
카를은 잠시 성녀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곳에서 제게 당했던 일을 떠올린다면 그저 멀리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이제는 성력도 없으며 살아 있는 한 앞으로 계속 대신전의 추격이 뒤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신전조차 없는 험한 오지로 숨어드는 것이 제일 안전하겠지.
‘하지만….’
카를은 새롭게 나타난 성녀를 떠올렸다. 이리스.
‘성력을 되찾으려 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