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18
레온은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하….”
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상자 안에는 황태자비를 위한 관, 예복, 장신구가 곱게 담겨 있었다. 레온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황궁에 앉아서도 황제는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에 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황제가 성녀를 황태자비로 인정 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아직 리나를 섬기는 데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한 자들의 머리를 숙이게 할 것이며 제국령 내에서 그녀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황제를 해하려 하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상자 안을 바라보던 레온은 곱게 접힌 천 한 장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황태자비와 조금도 관계가 없을 이질적인 물건에 그는 접힌 천을 펼쳐보았다.
“…정말 대단하시다니까.”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레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국기였다. 대신전의 상징과 제국의 국기가 섞인 새로운 아펠리우스의 국기. 아직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지만 결국 언젠가는 대륙 전체를 덮을 국기이기도 했다.
레온은 그제야 황제가 이것들을 보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를 죽이라는 거군.’
이 기가 세상에 걸리기 위해서는 황태자와 성녀의 국혼이 무사히 성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가 결혼을 한 상대는 세상으로부터 가짜 성녀라 손가락질을 받는 자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를 다시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 성녀로 섬기게 할 것인가.
레온은 한숨을 쉬며 카를과 신전 기사단이 있는 주둔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다 죽여 버려야겠네.”
물론 이리스라는 그 여자까지.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카를 측에 심어 둔 정보원이 전하길, 카를은 라트반을 추격하는 것을 제국 기사단이 막을 것을 알고는 제국 기사단의 병력을 이리스를 찾는 데 돌렸다고 했다. 확실히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지금 카를에게는 수배자를 잡는 것보다 성녀를 찾는 것이 그의 권력 유지를 위해 도움이 될 터이니.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새로운 성녀라는 이리스가 제가 살던 마을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마수의 습격을 받아 쑥대밭이 된 마을의 생존자들은 그들이 본 것을 전했다. 마수 헥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나타나 헥사를 제압하더니 이리스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온은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슬란이군.’
그렇다면 아슬란이 이리스를 데리고 바로 리나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리스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굳이 데려간 것을 보니 어쩌면….’
레온은 대신전에서 자세하게는 듣지 못했던 성녀와 아슬란의 계약을 떠올렸다. 도대체 뭘 걸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슬란은 성녀의 성력을 필요로 하기에 그 계약을 맺었다 들었다.
‘그러면….’
라트반도 문제지만 아슬란은 그보다 더 큰 장애물이다.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그가 강대한 마수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 자가 리나를 원하면 그를 막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멀리 있는 산맥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성력이 필요한 거라면 그 새로운 성녀로 만족하면 되는 거 아니야?”
***
이리스는 물끄러미 누워 있는 아슬란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물론 죽지 않았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잠든 순간부터 머리카락 한 올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가끔 그런 착각을 불렀다.
“읏차….”
한참이나 그를 보고 있던 이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옆에는 큰 나뭇잎 위에 올려 둔 나무 열매가 있었다.
“오늘 먹을 걸 찾아야지.”
아슬란이 만들어 준 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먹어 버렸다. 아껴 먹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놔두면 상할 것이 분명했을뿐더러 모든 음식들은 이리스가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 본 적 없는 맛있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리스는 아끼기는커녕 부스러기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먹어 버리고 말았다.
혹시나 다 먹으면 아슬란이 일어나 다시 만들어 주지 않을까,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잠든 상태였다.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입구로 다가갔다. 그사이 이리스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헥사가 떠난 이후로 이곳에는 더 이상 마수가 오지 않는다는 점.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산짐승은 절대로 이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 등을 말이다.
동굴의 입구에서 고개를 내민 이리스는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해가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위험한 짐승들은 이제 모두 제 보금자리로 돌아갔을 터였다. 물론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밖에 나가 식량을 구하려면 지금이 제일 좋은 때였다.
‘목도 마르고….’
다행히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작은 계곡이 있다. 그곳에서 목을 축인 다음 어제 발견한 나무 열매들을 따서 돌아오면 될 것이다.
“후아…!”
이리스는 계곡의 물로 얼굴을 씻은 다음, 치마를 찢은 천을 물에 적셔 몸을 닦았다. 시원한 물에 찝찝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 보자….”
계곡 근처에서 전날 봐 두었던 열매를 딴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한쪽 주머니를 가득 채운 그녀는 곧이어 반대편 주머니에도 열매들을 차곡차곡 넣어 채웠다. 처음 주머니에 넣었던 것들보다 더 크고 잘 익은 열매들이었다.
‘먹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리스는 매일 제가 먹을 것을 구하면서 아슬란의 것도 함께 구했다. 그러고는 잠든 그 옆에 그것들을 놔두었다. 마법으로 음식들을 쉽게 만들어 내는 데다가 헥사도 물리칠 정도로 강한 자가 이런 것을 먹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이제 이리스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아슬란이 곁에 있나부터 살폈다. 오래전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이후로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이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정작 아슬란은 저를 귀찮은 물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강하면 무서운 게 없겠지.’
마을이 박살 났던 날 보았던 아슬란의 힘을 생각하자 이리스는 그가 부러워졌다. 자신도 그런 힘을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이리스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이상한 소리에 이리스는 숨을 멈췄다.
‘착각인가?’
이곳으로 온 후로 들려오는 소리는 새소리와 곤충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가끔 짐승이 우는 소리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뭔가 다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리스는 몸을 숙인 다음 다시 귀를 기울였다.
“…해!”
“……!”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이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누구지?’
이런 길도 없는 깊은 산 속에 누가 들어온단 말인가. 자신처럼 약초를 캐어 파는 이들도 쉽게 들어오기 힘든 숲인 데다 가볍게 놀러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차피 이 일대에 그런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없을 테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건만 이리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험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려 한다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리스가 망설이는 사이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리스는 곧 다가오는 사람들이 기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가까워진 그들이 말하는 소리가 이리스의 귀에 들려왔다.
“라트반 단장님의 상태는 좀 어때?”
‘라트반 단장님?’
들려오는 말에 이리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기사들 중에서도 높은 사람이 여기까지 온 것일까. 게다가 상태를 묻는 것을 보니 어딘가 다치기라도 한 모양이다.
이리스는 숨을 아주 느리게 쉬며 바닥에 엎드린 채, 나뭇잎 사이로 멀리 보이는 자들을 살폈다. 곧 수풀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기사들 몇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
피와 흙으로 엉망이 된 꼴이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신전 기사단이야!’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이리스는 숨을 멈추고는 바닥에 딱 달라붙은 채 눈동자를 굴렸다.
아주 오래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 이리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전의 사람들과 얽히면 안 된단다. 곁에 얼씬도 하면 안 돼. 최대한 피하고 살아야 해.”
그렇게 말하는 부모님의 얼굴에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했던 것을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부모님 때문에 이리스는 어쩌다 신관들을 만나도 축복을 내려 달라 하기는커녕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지나가야 했다.
‘우리 부모님은 이교도인 걸까?’
하지만 정작 부모님은 매일 아침과 잠들기 전에는 신을 향해 열심히 기도를 했다.
“우리 아이들을 지켜 주세요.”
침대 속에서 부모님의 기도를 들으면서 이리스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두 분 사이에 자식이라고는 저밖에 없는데 우리 아이들이라니? 언젠가 그것을 물어보자 부모님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다 두 분이 눈물짓는 것을 보고 이리스는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
부모는 이리스를 데리고 대륙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신전도 신관도 없는 곳에 다다라서야 부모는 겨우 짐을 내리고 떠돌이 생활을 멈췄다.
좀 더 크면 부모님이 숨기고 있는 사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마수에 의해, 어머니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리스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 손을 잡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대신전… 네 언니가….”
그것이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때 이리스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언니는 대신전에 있는 걸까?’
신관이 된 사람들이 속세의 연을 끊는다고는 해도 가족을 완전히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제 먼 친척이 대신전의 신관이라며, 만나러 가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는 필사적으로 대신전을 피했다.
‘도대체 왜?’
이제 두 분은 세상을 떠났기에 이리스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이리스가 잠시 오래전 일을 떠올리는 사이 기사들은 그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을 보더니 소리쳤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단장이….”
“지금은 우리 성력으로 계속 상처와 독을 눌러 둘 수밖에 없어. 그러니 일단은 우리도 좀 쉬면서 성력을 회복해야지. 밤새 산을 넘었잖아. 식사도 이틀째 하지 못했으니 하루 정도는 여기에 머물면서 회복을 하도록 하지. 일단 머물 곳을 확보하고 사냥을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