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19
그 말에 여기저기서 찬성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하지.’
그들이 멀어지면 벗어날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도망갈 수가 없다. 이리스는 동굴에 남아 있는 아슬란을 생각했다. 그가 제가 없는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러면 혹시 저를 찾으러 오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이리스는 눈을 감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이건 마수에게서 벗어나 인간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상대가 하필이면 신전 기사단이라서 문제지.
‘어쩌지….’
이리스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사이 기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리스의 눈이 그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곧 뒤에서 한 기사가 제 등에 업은 남자를 근처의 부드러운 풀이 있는 곳에 눕히는 것이 보였다.
“……!”
무척이나 큰 남자였다. 볕에 그을린 피부에 검은색의 머리카락.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두꺼운 팔과 근육이 그 역시 기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를 살피던 이리스의 눈이 커졌다.
‘손이….’
한쪽 손을 붕대로 감고 있지만 이미 그것은 피에 젖어 있었다. 게다가 붕대 위쪽으로 보이는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마치 팔이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독이야.’
이쪽 지역에서는 마수에 당한 사람들에게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될 때까지 버티고 있는 거지?’
독에 당한 범위가 손바닥을 넘어갈 정도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고 만다. 마을에서 가장 크고 건강했던 남자도 몇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숨이 넘어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누워 있는 남자는 팔 하나가 시커멓게 변했음에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일단 단장을 조심히 눕혀 두고 이쪽 좀 도와줘!”
기사들의 대화에 이리스는 누워 있는 남자가 그들이 말하던 라트반 단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곧 기사들은 개울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더니 주변의 풀들을 정리하고 나뭇가지를 꺾으며 자신들이 쉴 곳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야.’
기사들이 있는 곳에서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저기 누워 있는 자는 의식이 없으니 저를 보지도 못할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며 이리스는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때였다.
“쿨럭!”
죽은 듯이 있던 남자가 갑자기 기침을 했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리스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리스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그의 기침 소리를 듣고 와 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날아가는 새 떼의 울음소리와 그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소리 때문에 남자의 기침 소리는 기사들에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달려가 동료가 죽어 간다고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리스가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기침을 하던 남자의 입에서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리나.”
“……!”
리나?
이리스는 아슬란이 저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말했던 이름을 떠올렸다. 그도 분명 리나라고 했었는데.
물론 리나라는 이름은 널리고 널린 이름이다. 이리스가 살던 작은 마을에도 두 명이나 그 이름을 갖고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리스는 저 리나가 어쩐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더 고민하던 이리스는 조심스럽게 남자를 향해 기어갔다. 다행히 멀리 있는 기사들은 그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한 번만 해 보자.’
마을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이리스는 성력을 쓰려 시도한 적이 없었다. 아슬란의 협박도 있긴 했지만 쓰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부모님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힘은 그녀가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힘을 쓸 때마다 이리스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제 것이 아닌 옷을 입은 것처럼. 그래서 더 이상 쓰려 하지 않았는데.
‘만약 힘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곧바로 도망가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이리스는 남자의 손끝에 제 손을 대었다. 지금 제 상황이 다른 사람을 챙길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촌장의 아들과는 다르게 이 사람은 어쩐지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이리스는 남자가 살아나길 바라며 정신을 집중했다.
“……!”
그 순간 이리스의 손끝으로 빠르게 푸른 성력이 모여들었다. 모인 성력은 이리스가 놀랄 새도 없이 곧바로 라트반의 몸을 휘감았다.
시커멓던 팔은 빠르게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갔다. 뚝뚝 흐르던 피 역시 어느새 멈추었다. 그때 이변을 눈치챈 모양인지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그 목소리에 이리스는 황급히 손을 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슬란이 있는 동굴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달린다 해도 그녀가 기사보다 빨리 산길을 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곧 바위를 기어 올라가려는 이리스의 뒷덜미를 기사 한 명이 잡아챘다.
“살려 주세요!”
이리스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메아리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여자는 뭐야?”
“설마 단장에게 무슨 짓을…!”
뒤따라온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찔러 죽일 것 같은 흉흉한 눈빛으로 동료의 손에 잡혀 대롱거리는 이리스를 노려보았다. 성질이 급한 자는 이미 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사, 살려….”
살려 달라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살기가 그녀를 향하고 있을 때, 라트반의 곁으로 갔던 기사가 소리쳤다.
“잠깐! 단장의 독이 사라졌어!”
“뭐?”
분명 라트반을 해하려 온 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라트반이 괜찮아졌다는 말에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자신들의 성력을 부어 넣어도 잠시 눌러 두는 것조차 힘든 독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졌다니. 이 정도의 성력을 가진 사람은 한 명뿐이다. 이리스를 붙잡은 기사가 중얼거렸다.
“설마 새로운… 성녀님?”
***
“으응… 레온, 제발 그만….”
나는 가슴을 주무르는 레온의 손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레온은 며칠간, 정말로 쉬지 않고 틈이 날 때마다 나를 안았다. 그러다 결국 내가 까무룩 정신을 한 번 잃고 나서야 겨우 안는 것을 멈췄다. 하지만 결코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린 후에는 재빨리 천막으로 돌아온 다음 침대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지금처럼 모든 피부가 붉어질 때까지 연신 나를 주무르고 빨아 대었다.
“많이 힘들어요?”
“그걸 몰라서 물… 아흣!”
그가 손가락으로 곤두선 유두를 붙잡고 흔들자 다시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대로라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레온, 나 정말 힘들어요…. 제발….”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울먹거리며 애원하자 레온은 무척이나 아쉽다는 얼굴로 손을 내렸다. 대신 내 뺨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그 아쉬움을 달래는 것 같았다.
“…당신 체면도 생각하는 게 어때요?”
이곳은 천막 안이다. 아무리 두꺼운 천이라 하더라도 소리를 완전히 막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꼭 소리 때문이 아니더라도 틈만 나면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이제 막 결혼한 신랑이 제 신부를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 건 당연한 일이에요. 오히려 다들 제국의 미래가 든든하다고 여길 겁니다.”
부끄러움 따위는 조금도 못 느끼는 당당한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다행히 이제 정말로 좀 쉬게 해 줄 생각인 건지 그는 얌전히 나를 끌어안기만 한 채 말했다.
“아직 아슬란과 이리스는 찾지 못했습니다. 신전 기사단이 라트반 경을 발견했다는 소식 역시 없어요.”
처음에 나는 레온이 이런 정보를 나에게 숨기려 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한 게 무색할 정도로 레온은 모든 것을 나에게 말했다. 그런 점이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를 가둬 둔 다음 모든 것을 마음대로 통제하려 했다면 마음껏 그를 원망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곳에서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었고 레온은 모든 것을 나와 공유했다.
게다가 매일같이 대신전에서 견뎌야 했던 나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은 이곳에 없었다. 레온이 건네준 황태자비의 예복을 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 그곳에는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복종의 시선들이 있을 뿐이었다.
“아슬란이… 이리스를….”
내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레온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금방 돌아올게요.”
“…늦게 와도 돼요.”
내 말에 레온은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상처 입는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레온은 천막을 나섰다. 다시 조용해진 천막을 보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침대 위에 쓰러졌던 몸이 눈을 떴다.
“아슬란이 이리스를 데려갔다고….”
중얼거리는 것은 이벨리나였다.
“안 될 일이지. 강대한 마수여.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새끼를 밸 것이고….”
이벨리나의 눈이 강렬한 증오와 의지로 번뜩였다.
“너는 내 소원을 들어주어야 해.”
“젠장….”
무심코 속내를 내뱉던 카를은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의 천막 안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카를은 손등으로 제 입을 쓸었다. 점점 더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처음 이리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모든 일이 쉽게 끝나리라 생각했다. 트리온에 가면 제가 새로운 성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들뜬 시골 계집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그 전에 이벨리나와 라트반을 생포하여 좋은 유희 거리로 삼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상황은 무엇 하나 그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이리스라는 계집은 마법사인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 하고 라트반의 추적은 제국 기사단이 막고 있으며 이벨리나는 아예 황태자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그의 손이 닿지 않는다.
신음 소리를 흘리던 카를은 제가 원하던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모든 것을 정리한 다음 이리스를 데리고 대신전으로 돌아간 후의 미래를.
새로운 성녀는 더욱 다루기 쉬울 것이다. 이벨리나의 실패를 발판 삼아 더더욱 고립시키고 세뇌할 생각이니까. 이벨리나가 그랬던 것처럼 이리스 역시 매일 자신을 위해 성력을 바쳐야 할 것이다.
카를은 잠시 이리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자국은 원래 그에게 성력을 부어 넣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력은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여자에게로 넘어갔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