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p to Martial Arts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낙양의 소소한 일상(4)
“그럼 청루단 본부로 들어가는 건가요?”
작약만향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청루단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어디로? 작약만향의 거취가 궁금해진다.
“아뇨. 청루단 자체를 떠나요.”
“청루단 자체를 떠난다고요?”
– 스르륵─
작약만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찻상을 들고 내 곁으로 온다.
화로에 데워진 찻잔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미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 쪼로록─
작약만향이 차를 따라주더니 내 앞으로 민다.
– 호로록─
서로 말 없이 차를 한 잔 마시는 가운데 적막감이 감돈다.
“초란이가 현 소협에게 소식을 보낸 후에 내게도 한 통의 서신을 보냈어요. 같이 여행을 해보지 않겠냐고요.”
“초란이, 산 소저가요?”
“네, 그래서 그러기로 했어요. 사실 초란이가 부러웠어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천하를 여행하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초란이가 부러웠죠. 반면 나는 과거에 갇혀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과거에 갇혀서 산다고 생각이 들었나요?”
“생각이 든 것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죠. 사실 내가 낙양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한 사내와의 추억 때문이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행동이었던 것 같아요. 그 사내는 이미 죽고 없는데. 나는 왜 과거에 집착해 이 낙양을 떠나지 못했는지. 물론 그와의 추억이 담겨 있는 낙양에서 지내는 것이 나빴던 것은 아니에요. 좋았죠.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겠네요. 이곳에 있으니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을 거 같아요.”
“그래서 떠나려고요. 이제 과거의 인연을 끊고 남은 생은 나만의 삶으로 새로 시작해 보려고요. 천하를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려고요.”
– 호로록─
차를 마시는 작약만향의 붉은 입술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아름다운 입술이다.
새삼 작약만향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지. 지금이라도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충분히 새로운 시작해도 되는 나이고.’
작약만향이 과거의 수라검신에 갇혀서 낙양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를 잊지 않았다는 기쁨보다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이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라도 그녀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한다고 하니 응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작약만향은 아름다운 여자다. 외모도 성격도.
과거에 죽은 한 남자에 갇혀 지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여자다.
그러니 떠나야 한다.
“작약만향이 그리워하는 그 사내가 저승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적극 응원했을 겁니다. 이미 죽은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여자가 과거에 갇혀 사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니까요.”
나는 현무비의 입을 통해 수라검신의 솔직한 심정을 전달했다.
그 진심이 전달된 것일까?
– 호로록─
차를 마시던 작약만향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사람이라면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살기를 바랄 것 같아요. 그도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떠나려고요.”
“떠나세요. 그리고 자신의 삶을 새로 시작하세요.”
작약만향이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상해요. 왜 현 소협이 말하는 것은 꼭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그야, 내가 수라검신이니까.
“고마워요. 언제 다시 볼지는 모르겠네요.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 소협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현 소협을 만난 덕에 후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내딛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저 또한 그동안 저를 도와준 작약만향이 고맙습니다. 여행 잘하세요. 산 소저에게도 안부 전해주고요.”
“그럴게요. 잠시만요.”
작약만향은 한 구석으로 가더니 뭔가를 꺼내온다.
– 탁─ 스윽─
작약만향이 물건을 내 쪽으로 민다.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데요?”
“제가 드리는 선물이요.”
“선물이요?”
“펴 보세요.”
작은 주머니였다.
주머니 안을 열고 안을 보니 물건들이 보인다.
– 툭─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자 나오는 첫 번째 물건.
청루패다.
“이건 청루패?”
“제 몫으로 받은 청루패인데, 이제 제게는 필요 없으니까요. 알다시피 청루단 소속 조직원은 자신의 몫을 자신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어요. 저는 현 소협에게 주려고요. 초란이도 현 소협에게 청루패를 줬다면서요. 지난번의 의뢰도 초란이가 준 청루패로 의뢰한 거잖아요. 저도 현 소협에게 드리고 싶어요.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청루패라.’
상당히 귀한 물건이다.
청루단에 한 가지 일을 의뢰할 수 있는 귀한 물건.
산초영처럼 작약만향도 자신의 몫을 준 것이다.
앞으로는 이 물건을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아니, 청루패를 쓸 일이 없으면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작약만향이 작별의 인사로 주는 것이니 말없이 받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물건이 주머니에서 떨어진다.
– 툭─
손바닥에 떨어지는 물건을 보면서 조금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이것은 자수잖아요.”
화려한 검이 그려진 작은 자수였다.
금사와 은사에 색색의 실로 아름답게 수놓은 자수다.
“맞아요. 제가 직접 꽤 정성을 들여 만든 자수예요. 원래는 제가 좋아했던 사내에게 주려고 만들었던 자수였어요. 소맷자락에 붙이면 꽤 멋있을 것 같아서 만들었죠.”
수라검신에게 주려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이걸 왜 내게?”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잖아요. 하지만 현 소협은 내 앞에 있고요. 제 정성이 들어간 자수라 아무에게나 주긴 싫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대신 현 소협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만든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처음이고, 이 선물을 받는 남자도 현 소협이 처음이니, 제 성의를 생각해서 받아주셨으면 해요.”
작약만향이 처음으로 하는 선물이라.
작약만향이 원래 주려고 했던 사람은 수라검신.
그리고 그 선물을 결국 받는 사람도 수라검신이 되었다.
“감사하게 받을게요.”
묘한 감정 속에서 작약만향이 건넨 자수를 손에 꼭 쥔다.
‘수라검신으로는 처음 받는 선물이네.’
수라검신에게 주려고 만든 선물이라고 했다.
결국은 오랜 세월 후에 내게 전달된 선물.
수라검신 시절에는 누군가 진심을 담은 선물을 내게 한 적이 없다.
‘매화신투가 그랬지. 내가 선물한 은팔찌가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라고. 그래서 기뻤다고. 선물을 받은 날에 잠을 이루지 못 할 정도로.’
매화신투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돈과 죽음만 생각하고 살았던 수라검신 시절에 누군가 진심으로 나를 위해 선물을 한 사람이 없었는데, 죽고 나서야 이들이 진심으로 내게 주려고 한 선물을 받으니 가슴이 격해질 정도로 기쁘다.
‘수라검신의 삶이 아주 나쁜 삶은 아니었네. 그래도 내 여인들은 나를 좋아하고 내게 진심을 담아 선물을 할 정도니까.’
세 여인이 모두 나를 좋아하고, 그것이 진심이었다는 사실에 가슴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온다.
그 격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조용히 차를 넘기며 꿈틀거리는 목청의 움직임을 감춘다.
– 호로록─
홍청루 후원의 작은 방에서 차향이 퍼져 간다.
그 차향을 음미하면서 한 여인이 새로운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그 걸음이 행복으로 가는 걸음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한 사내는 조용히 차를 마실 뿐이다.
예소향을 만나고 심란해진 감정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홍청루.
그러나 또 한 번의 심란한 감정을 담고 돌아와야 했다.
한 여인은 새로 만났고, 한 여인은 떠난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 이루어진 날이다.
“그러고 보니 현무비로서 작약만향과 인연도 꽤 깊은 셈이네.”
수라검신이 아닌 현무비로 그녀와 함께 한 시간도 일 년이 되어간다.
그 사이에 알게 모르게 서로 많이 가까워졌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신분 때문에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나이를 떠나 내게 호감을 느꼈고, 나 역시 당비취가 아니었다면 다시 그녀에게 감정을 느꼈을지 모른다.
다행히 현무비라는 신분과 당비취 덕에 우리 둘은 과거의 인연으로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비취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내가 수라검신이요 하고 그녀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작약만향은 나이가 들었지만 충분히 내 짝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니까.
“어쨌든 과거의 여인들이 다 잘 사는 모습을 보니 반갑고 홀가분하네. 나도 현무비로서 잘 살아가야지. 영차!”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 현무전장의 일에 집중한다.
나도 현무비로서 삶에 충실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 * *
다음 날.
점심때가 되자 현무기성복점이 시끄러워진다.
수십 명이 여자아이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앗 잘 생긴 오빠!”
“오, 소청이하고 연청이구나.”
귀엽고 예쁜 두 자매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와 꾸벅 인사를 한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냈지. 너희들도 잘 지냈지?”
“네. 이곳에서 일거리를 준다고 해서 왔어요.”
“그래 잘 왔다.”
아이들이 줄을 지어 정렬하자 설소영이 아이들을 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오빠, 이 아이들이야?”
“응, 쓸 만한 아이들은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침선장으로 교육시켜서 종업원으로 채용하도록 하고.”
“알았어. 오빠가 말한 대로 할게.”
설소영은 아이들 앞으로 나서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나는 현무기성복점을 운영하는 설소영이라고 해요. 오늘부터 여러분은 이곳에서 일감을 받아 일을 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성실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은 종업원으로 채용이 되어 더 많은 보수를 받게 될 거고요. 그러니 열심히 일하도록 하세요.”
“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언니!”
수십 명의 여자아이들이 내는 대답이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일감을 준다 하니 모두 신이 난 것이다.
‘어린 나이지만 세상을 너무 일찍 안 아이들이지. 돈의 소중함을 알고 배고픔의 고통도 잘 알고.’
내가 처음 무림에 떨어졌을 때가 떠오른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겪으면서 악착 같이 살아남으려고 했던 바로 그 시절.
이 아이들을 보면 바로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일감을 주려고 하는 이유도 이 아이들이 내 모습을 닮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설소영은 아이들을 데리고 현무기성복점의 곳곳을 안내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여기가 그곳이야? 가서 주인 나오라고 그래.”
설소영이 아이들과 함께 점포 안을 돌고 있을 때 들리는 목소리.
건장한 사내 십여 명이 점포 안으로 우르르 들어온다.
“저기 저 여자가 주인입니다.”
그중 한 사내가 소영이를 향해 손가락질하자 소영이의 안색이 굳어간다.
“오빠, 저 사람이야. 지난번에 내게 행패를 부렸던 사람.”
옆에 있던 사중찬의 안색도 굳는다.
딱 보니 그놈이 윗사람을 데려온 모양이다.
“네가 이곳의 점주냐? 호오, 상당히 예쁘게 생겼잖아.”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의 말에 설소영의 표정이 굳는다.
옆의 사중찬은 미간이 꿈틀거린다.
“제가 점주인데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이 가게의 고객이지. 지난번에 제품에 대해 항의하던 내 수하들을 팼다면서? 고객을 패다니, 제 정신인 거야? 내가 오늘 이 가게를 엎으려고 왔지만 점주가 예쁘니 특별히 봐주지. 내게 술이나 대접하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
우두머리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는 설소영.
“지금 이곳이 기루인 줄 알아요? 옷값이나 내놓아요. 옷을 납품했는데 옷값을 아직 지불하지 않고 있잖아요.”
“뭐야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거야? 죽고 싶어?”
딱 보니 더 이상 들어줄 가치가 없다.
저놈들은 교육이 필요한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