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05)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05화 >
“일선아, 기름칠은 잘하고 있느냐?”
왕회장의 물음에 손일선이 곧장 기립해보였다.
“예, 아버지.”
톱니바퀴가 원활히 굴러가기 위해서는 아귀도 맞아야 될 테지만 윤활유도 중요했다.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가게 하는 역할은 바로 손일선의 몫이었다. 제일생명과 재단에서 나온 자금줄을 계속해서 융통하여 샘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는 것.
“이럴 때일수록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 내 집안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다른 집안도 살펴 보거라. 예컨대 대한이나 대성그룹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들을 도와주라는 말이 아니라 바로 알짜가 될 만한 기업들을 눈여겨보라는 소리. 그렇게 말하는 왕회장의 걸음걸이가 나이에 맞지 않게 정정하다. 아무렴, 퍼팅하는 자세조차도 웬만한 프로 뺨치지 않는가.
“영감들을 만나고 온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
“골고루 떡값을 뿌리고 왔습니다. 헌데 비상시국에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굳이 야권 쪽에까지 말입니다. 지금 본인들 고름 막기에도 급급한 시기 아닙니까?”
일순 왕회장이 골프채를 내려놓은 채 고개를 돌려 손일선을 바라봤다. 그 안광이 어찌나 형형하던지 손일선이 곧장 긴장을 머금었다. 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호랑이를 닮은 저 눈빛.
“양놈들이 밀려들어오고 있다. 곧 있으면 국내 기업들을 싸그리 말려 먹으려 들 게야. 지금당장 금융 쪽 숨통을 막는다면 과연 국내에서 몇 곳이나 성할 듯 싶으냐. 내 장담컨대 한 곳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넌 하던 대로 떡값이나 계속해서 뿌리거라. 그 영감들 섭섭지 않게 말이다. 비상시국이라고 할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게 이 나라 정치판이니.”
왕회장의 머릿속에 불현 듯 강현이 떠올랐다. 항상 바둑을 두며 문답을 주고받고는 하였으니. 처음에는 경제를 가르치고 시야를 넓히고자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깨닫게 되었다. 이 아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혜안을 지녔다고. 어찌 보면 눈앞의 손일선보다 강현이 시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 오늘 유하도 같이 가평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왕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괜찮다. 할애비와는 언제든 같이 있을 수 있지만 흘러간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그 순간 골프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홀컵을 향해 날아갔다.
*
“어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화기애애한 모습이 어째 영락없는 모녀 사이처럼 보일 정도다. 손유하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어머니를 도와 늦은 아침식사를 차리는데 웬걸 눈빛이 심상찮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잘못한 것만 같달까.
“뭐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웬걸, 이제는 추궁까지 하는 것이었으니. 백정훈이 국을 먹다 말고 급히 물잔을 찾았다. 물을 급하게 들이키는 걸 보니 사레라도 들린 모양이다.
“난 오빠랑 밥 한 번 같이 먹겠다고 아침 일찍부터 달려왔는데…”
투정을 하듯 말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이제야 임혜라 이사장의 묘한 표정이 이해가 되는 것이었으니.
“유하야, 그런데 갑자기 한국에는 웬일이야?”
“미국은 지금 봄방학이거든, 그리고 웬일이냐니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볼에 바람을 가득 넣은 채 고개를 토라지게 돌리는 것이 아닌가. 몸은 커졌어도 어렸을 적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밥을 먹는 와중에 계속해서 내 쪽으로 음식을 챙겨주는 것이었으니. 어머니가 계속해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식사를 끝마치고 백정훈을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있자니 손유하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이제 제 소개도 해 달라는 뜻이다.
“음, 이쪽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연회에서 봤던 재벌3세들처럼 이름 앞에 호처럼 기업이름을 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때 손유하가 내 팔짱을 잡으며 대신 말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현이 오빠의 영원한 단짝 손유하입니다.”
영원한 단짝?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백정훈이 예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현아, 난 네가 음악과 사랑에 빠진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알콩달콩하게 연애를 하고 있을 줄이야. 형보다 나은 아우가 여기 있구나.”
마치 장성한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감격에 찬 표정이었으니. 해명할 틈도 없었다. 손유하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연거푸 끄덕여댔기 때문에. 백정훈은 식사를 끝마치고는 곧장 ‘나도 눈치가 있지, 어떻게 더 방해를 하겠어.’하면서 이촌동을 나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빠, 나 남산타워 가보고 싶어.”
아무렴, 외국에서 한국까지 날아온 손유하이지 않은가. 까짓 거 못 들어 줄 이유도 없었다. 더욱이 주머니도 든든했다. 어머니가 쌈짓돈을 챙겨주신 것도 모자라 할아버지까지 은근슬쩍 내게 용돈을 쥐어 주시는 게 아닌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유하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아직 벚꽃이 안 피었네.”
남산타워 전망대까지 걸어서 올라가자고 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아직 피려면 보름은 더 있어야 할 걸?”
“그래도 괜찮아, 오빠랑 함께니까.”
외모는 영락없는 도도한 고양이였지만 내 앞에서는 순하디 순한 강아지이지 같은 모습이다. 그나저나 지난 삶에서도 찾은 적 없던 남산타워를 손유하와 함께 오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벚꽃대신 흩날리는 봄내음을 맡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지?”
“뭘 찾는 건데, 유하야.”
내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손유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잰걸음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바로 자물쇠를 파는 곳. 이제야 손유하가 남산타워를 오자고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맘때쯤부터였나, 남산타워에 사랑의 자물쇠를 걸기 시작한 것이. 그때 손유하가 손에 자물쇠를 들고는 내게 달려왔다. 어째 트레비 분수부터 시작해서 각국 사랑의 미신에 참여하는 기분이었으니.
“오빠아, 빨리 와 같이 자물쇠 걸자!”
뭐가 됐든 유하만 좋으면 되었다.
“유하야, 입맛에는 맞아?”
“응, 진짜 맛있는데―!”
남산타워에서 내려오니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저녁밥은 먹여 보내야할 것 같아서 찾은 남대문 시장. 지난 삶 찾은 적 있던 백반집이었다. 갈치조림이 끝내주는 집이다. 조심스럽게 갈치 뼈를 발라 속살을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아이고. 너무 이쁜 학상들이 밥을 먹으러 왔네, 아줌마가 서비스로 계란후라이 하나씩 주꾸마!”
기억속보다 젊은 이모가 구수한 사투리를 쓰며 나와 유하의 밥그릇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계란프라이를 놓아주었다. 손유하가 예의바르게 이모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생김새는 얼음여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 누구보다 따뜻했다.
“오빠, 나 내일도 집에 있는데 같이 놀아주면 안 돼?”
“어디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손유하가 밥을 먹다 말고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난 오빠랑 있으면 어디든지 좋아.”
* * *
“벌써부터 예매문의가 빗발친다고요?”
임혜라 이사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강현의 독주회가 결정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시일이 꽤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미현 씨, 어디서 연락이 왔죠?”
“일본과 영국에서 왔습니다. 어제는 미국에서 문의가 왔었고요.”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의 인터뷰가 파급효과가 클 줄은 알았다만 이정도일 줄이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연락을 해오는 것이 아닌가. 특히 일본에서는 아직도 강현의 클래식음반을 발매하자고 연일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작가님, 그리고 이것 좀 보시겠어요.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지인데 현의 이야기가 실려 있거든요.”
일본 클래식계에서 꽤나 명성이 높은 곳에서 발매된 음반지였다. 낱장을 넘겨보자 첫 페이지부터 강현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었으니. 인터뷰의 당사자는 다름 아닌 현의 여왕 히로세였다.
‘그 아이를 처음만난 순간부터 난 그의 연주를 기다렸다. 환희와 함께 태어난 환상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그 순간 세상은 한 명의 비르투오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극찬이 아닌가. 일본 클래식계에서 대모라고 알려진 히로세가 보내는 아낌없는 찬사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임혜라는 새삼스럽게 강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영향력을 미친 것일까.
“독주회 규모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로 하기로 했다고 알리세요. 이미 현이와 이야기를 끝마친 부분이니까 이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을 거예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수백 석도 아니고 이천 석이 훌쩍 넘는 객석을 가지고 있다. 웬만한 연주자는 감당하지 못할만한 숫자였으니. 하지만 강현은 오히려 좋아했다. 자신이 생각한 연주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장소라며.
“어떤 레퍼토리로 연주를 할지 묻는 문의도 많은데 어떻게 할까요?”
“아직은 노코멘트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임혜라 이사장 본인 또한 강현이 독주회에서 어떤 레퍼토리를 사용할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태리에서 봤던 강현의 자작곡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기에. 허나 지금 이 순간 강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청춘사업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니 말이다.
*
“여기가 오빠가 음악 만드는 곳이구나?”
어째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내 작업실이었을 줄이야. 손유하가 신기한 듯 작업실 내부를 살폈다. 때때로 내가 베개 대신 사용하는 신디사이저와 이불대신 덮었던 악기들까지도 손유하의 눈에는 하나같이 신기한 물건들의 연속이리라.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악보를 써내려간 거야?”
백정훈이 그랬듯 손유하 또한 악보들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녀 또한 사교의 영역이었지만 음악을 배우지 않았던가. 작곡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수많은 악보를 보고 놀랄 수밖에.
“오빠, 조금 있으면 독주회 연다며? 난 괜찮으니까 마음대로 연습했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실력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되니까.”
사실 아직 독주회를 열기까지는 시일이 많이 남아있어 오늘 하루쯤은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게 폐를 끼치고 싶지않다는 말과는 달리 어느새 소파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는 유하를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그럼 오늘은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서 연주해야겠네.”
단 한명의 청중이라는 말에 손유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난 조심스럽게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과르네리를 집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선율을 울부짖겠다는 듯이 현을 번들거리지 않는가. 어깨위에 과르네리를 올리자 자연스레 자세가 취해졌다.
“오빠, 나 그 곡 연주해줄 수 있어? 이탈리아에서 연주했던 곡.”
난 짧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활과 현이 맞닿는 그 순간 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칸타빌레, 천천히 현과 맞닿은 활이 유려한 선율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현을 짚은 손가락은 그녀의 잰걸음을 표현하듯 트릴을 울렸다. 점차 보잉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떨리는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듯 활이 강하게 현을 가로지를 때였다.
지잉―!
피오레의 선율이 마치 봉우리를 터뜨리듯 울려퍼지는 것이었으니. 두근 거리는 고동소리처럼 왼손이 피치카토를 펼쳤고 활을 쥔 오른 손과 함께 화려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손유하를 떠올리며 써내려간 음표였다. 처음 내 옷소매를 잡아 끌었을 때부터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나날들이 악상이 되어 울려 퍼졌다.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니.
연주를 할때는 무아지경이 되곤한다. 마치 주변의 사물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시간이 흘렀음에도 선율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몇 곡을 연주했는지도 모르겠다. 손유하는 이미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입가에 가득 핀 미소가 분명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리라.
“편하게 자.”
난 손유하를 소파위에 눕히고는 담요로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 앞에 기대어 앉았다.
끼리릭―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작업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어머머, 얘들 보게.”
임혜라 이사장의 입가에 떠날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카메라를 들고 와 사진을 찍고 싶은 심정이다. 소파 위에는 유하가 두 눈을 꼭 감고 있고 그 밑에는 강현이 쪼그린 채 잠들어 있지 않은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을 꼭 마주잡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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