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0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04화 >
“강현 학생, 아침 먹어요.”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일층으로 내려가니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티호노프 박사의 모습도 보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앞치마를 두른 모습.
“보스, 오늘 아침은 러시아 가정식입니다. 제가 붙인 이름은 블라디보스톡의 여명이지요.”
연어와 가자미를 이용해 만든 수프와 크림치즈를 곁들인 크레페, 달콤한 쌉싸름한 석류 주스까지. 어느새 식탁위로 러시아가 펼쳐져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티호노프 박사는 요리를 만들어 직접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다. 말려도 봤지만 어쩌겠는가 저리도 고집이 완강한 것을.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고마운 이들에게 정성어린 요리를 해준다고 한다.
“매번 이렇게 음식을 대접해주니 고맙군요, 박사.”
아침 식사가 끝나갈 즈음 티호노프 박사가 문득 나를 바라봤다.
“현, 키가 조금 큰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으니. 관찰력이 뛰어난 티호노프 박사였다. 그렇잖아도 바이올린을 켤 때 면 손가락이 길어진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과거 카프리스를 연주할 적 손가락이 짧아 피가 났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오늘 따라 유독 아침밥이 맛있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 왔어요. 강현 학생.”
새 학기가 시작되는 하루였다. 김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제일고등학교는 제일중학교와 비슷했다. 아무렴, 같은 제일재단 산하이니 당연한 것이겠지. 교실로 들어서자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모른척하며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현아.”
그때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오는 낯익은 인물이 있었는데 지난 졸업식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맡았던 이진호였다. 아무래도 같은 반이 된 모양. 진호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활짝 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다른 학급, 학년 여학생들이 우리 반을 지나가며 슬쩍슬쩍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다 현이 너 보러 온 거야.”
“나를?”
“원래도 유명했지만 졸업식 이후로 현이 네가 얼마나 유명해졌는데. 들리는 말로는 팬클럽도 생겼다고 하던데?”
어째 학교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 그때였다. 교문이 열리며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년남성이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강직한 인상의 사내가 좌중을 훑고는 칠판위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써내려갔다. 으레 그렇듯 담임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학생들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강현.”
담임 선생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으니.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르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담임 선생을 따라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교장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배불뚝이 교장 선생님이 버선발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고, 강현 학생―!”
누가 보면 오랫동안 나를 알고 지내왔던처럼 보였으니. 아무래도 임혜라 이사장의 입김이 들어간 모양. 하물며 제일중학교 졸업식장에도 왕회장이 직접 출두하지 않았던가. 배불뚝이 교장 선생님이 땀을 흘리며 이렇듯 긴장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되었다. 그때였다.
“강현 학생, 입학식 축사를 맡아 줄 수 있겠나?”
“예?”
“알다시피 우리 제일고등학교의 입학식은 개학을 하고 난 뒤에 하질 않나. 그 자리에서 강현 학생이 축사를 맡아줬으면 좋겠어. 입학생 대표 겸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말일세. 졸업식 답사를 하는 것을 보니 아주 잘할 것 같은데 말이지.”
어째 점점 축사 전문이 되어가는 것 같지 않은가.
*
“미현이 누나, 바쁘시네요.”
갤러리가 작업으로 한창이다. 새로운 그림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 통에 직원들만 고생이다. 것도 그럴 것이 한 점 한 점이 적게는 수억 원에서 많게는 십수억 원을 호가하는 현대미술이다 보니 새로 그림을 전시하는데 있어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현아, 교복이 바뀌었네? 그러고 보니 키도 좀 큰 것 같고.”
“오늘이 새 학기 첫날 이었거든요.”
“어째 현이는 날이 가면 갈수록 잘생겨지는 것 같다니까? 우리 갤러리에 처음 방문한 손님들이 한 번씩 현이 너보고 배우 지망생 아니냐고 물어봐.”
숨돌릴 시간이 되었던지 미현이 누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 봤을 적에만 해도 신입티가 팍팍나는 앳된 직원이었는데 이제는 꽤 커리어우먼 티가 나지 않는가. 내가 도와줬던 것을 잊지 않았는지 미현이 누나는 내게 유독 살갑게 굴었다.
“현아, 저 작품들 중에서 뭐가 가장 비싼 건지 알겠니?”
척 보기에는 다들 비슷해 보이는 그림이었다. 농부의 모습을 그린 것도 있었고, 강가에 투영된 도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었다. 하지만 내 고갯짓을 가리키는 것은 다름아닌 순백의 바탕에 푸른 점이 하나 찍힌 그림이었으니.
“어, 어떻게 알았어?”
훗날 저 그림이 수십억 원을 호가한다면 믿기겠는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 내가 임혜라 이사장 밑에서 일할 적에도 있었던 그림이었으니까. 그때 난 말없이 손을 흔들어보이곤 작업실로 향했다.
“모차르트, 브람스, 베토벤, 사라사테······.”
독주회에 쓰일만한 수많은 레퍼토리가 있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부족함이 없는 레퍼토리의 향연이었으니. 하지만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의 인터뷰가 마치 생선가시마냥 마음속에 걸렸다. 말 그대로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독주회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현아, 역시 여기 있었구나.”
때마침 임혜라 이사장이 작업실을 찾았다. 입가에는 미소가 만개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독주회를 열기로 결정했기 때문.
“뭘 그렇게 고민을 해?”
“첫 번째 독주회잖아요. 레퍼토리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죠.”
“아줌마는 음악에 대해서는 현이처럼 심도 있게 알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굳이 다른 사람의 곡을 쓸 필요가 있을까? 현이 네가 지금 작곡한 악보 좀 봐. 조금만 더하면 저걸로 탑을 쌓아도 될 정도야.”
지난 삼 년간 무수히도 많은 악보를 써내려갔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 악보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도 될까 싶은. 내가 보기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해 보이기만 했다.
“참, 피아노는 누가 맡으면 좋을까? 아무리 독주회라도 반주는 필요하잖아. 현이 네가 원하는 피아니스트가 있으면 아줌마가 최대한 노력해서 섭외를 해볼게.”
“괜찮아요, 이미 구했어요.”
“뭐?”
독주회까지는 아직 시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누구를 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임혜라 이사장이 입을 열려는 찰나.
“현아―!”
양반은 못되는 모양이다. 백정훈이 작업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마에스트로,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독주회를 연다고 합니다.”
주름진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서렸다.
“마에스트로께서 왜 그렇게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독주회를 기다리셨는지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전 솔직히 마에스트로의 대답으로 하이페츠의 연주를 생각했었습니다.”
애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아무리 뛰어난 실력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할지라도 아직은 신예이지 않은가. 당연히 마에스트로께선 야사 하이페츠의 연주를 다시 듣고 싶다고 하실 줄 알았다. 더욱이 야사의 사후 전에는 서로 둘도 없는 라이벌이지 않았던가.
“야사의 연주는 젊었을 적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요. 그가 독주회를 열적에는 몰래 참석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열등감이 단단히 온몸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연주회에 간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야사의 연주가 귀를 즐겁게 만들더군요. 결국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왜 꼭 보고싶은 공연으로 야사의 독주회를 고르지 않았냐고 물으셨지요?”
꽃잎이 띄워진 찻잔이 흔들렸다.
“난 이미 오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죽어서 만날 야사의 연주를 지금 다시 들어서 뭐하겠습니까. 살아있는 야사의 연주를 들어야하지 않겠어요?”
“마에스트로, 그 말인즉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야사 하이페츠에 버금가는 연주자라고 평가하시는 것입니까?”
“세월이 흐른다면 분명 그렇게 되겠지요. 그 아이라면 뛰어넘을 수도.”
애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올린계에서 야사 하이페츠가 주는 이름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 19세기를 파가니니의 시대라고 한다면 20세기는 하이페츠의 시대라고 일컫지 않는가. 그런데도 구스타프는 강현이 야사를 뛰어넘을 것이라며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애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야사에게 받은 바이올린이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친구가 연주했던 것이지요. 위대한 비르투오소가 잠들며 내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내 오래된 친구 구스타프여. 훗날 이 바이올린을 사용할 친구가 나타난다면 망설임없이 건네주게, 만약 그러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한줌의 재로 만들어 내 무덤가에 흩뿌려주게.”
그때 집사가 올드 바이올린 하나를 들고 왔다.
“이따금 선율을 잊게 하지 않기 위해 이 녀석의 현을 켜보지요. 그 때마다 녀석은 아우성칩니다. 왜 아직도 자신을 연주할 비르투오소를 찾지 못했냐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번 한국행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녀석의 주인을 말입니다.”
애덤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것도 그럴 것이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번들거리는 현에서부터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
“형, 한번만 다시 해봐도 되죠?”
내 물음에 백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연습을 했던지 하루 반나절이 꼬박 지나가고 있었다. 바이올린 독주회에서 피아노가 가지는 역할은 컸다. 서로간의 앙상블이 맞지 않으면 완전히 음정이 뒤틀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백정훈은 그 누구보다도 나와 호흡이 가장 잘 맞는 연주자였다.
“2악장부터 다시요.”
활을 멈추고 연주를 다시 시작했음에도 볼멘소리 하나 없다.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잠시 쉬어가려 연주를 멈췄을 때였다.
“현아, 이대로 가면 정말 독주회가 센세이셔널 하겠는데? 살다 살다 자작곡으로 첫 독주회를 여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보다니, 아마 앨범으로 발매되면 난리가 날거다.”
백정훈은 내 악보를 보며 계속해서 극찬을 해주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직 부족한 것 투성이었으니.
“형, 다시 처음부터 한 번 해보죠.”
내 부탁에 백정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피아노앞에 자리를 잡았다. 만월이 창가에 비쳐 흐르는 가운데 선율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현아, 또 밤샘을 한거니?”
임혜라 이사장이 작업실로 들어와서는 입을 쩌억 벌렸다. 신디 사이저위에는 악보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고 소파에는 백정훈이 새우잠을 자고 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독주회 준비 때문에 다가오는 주말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했더랬다.
“정훈 씨는 이렇게 여기서 계속 있어도 된다니?”
다시금 출근도장을 찍기 시작한 백정훈이었다. 내가 반주를 맡아줄 수 있냐고 부탁하니 흔쾌히 수락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마치 자신의 독주회를 준비하는 것 마냥 열성이니 오히려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아줌마는 현이 네가 이촌동에 있을 줄 알고 그리로 보냈는데.”
“뭘 보내셨는데요?”
임혜라 이사장이 말없이 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었으니. 난 알수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잠들어있는 백정훈을 흔들어 깨웠다. 몇 번 강하게 흔들자 백정훈이 헐레벌떡 일어나는 것이었으니. 입기에 참이 흥건한 것이 잠깐의 쪽잠임에도 꽤 깊이 잠들었던 모양.
“형, 아침밥 먹으러 가요.”
평소 같았으면 갤러리에서 아침 식사를 했을 테지만 웬걸 임혜라 이사장이 아침은 이촌동에서 들라며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니겠는가. 덩달아 백정훈까지 이촌동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현아, 아침부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면 어른들께 실례 아닐까?”
“이미 전화로 말씀드렸으니 괜찮아요. 할아버지도 손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말하셨는데요 뭘.”
아무렴, 티호노프 박사도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가. 백정훈 한명정도 더 끼어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어?”
이촌동 저택에 들어섰을 때였다. 부엌으로 다가설수록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백정훈이 내 뒤를 조심히 따라오고 있는 찰나.
“유하?”
식탁 앞에 앉아있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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