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9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99화 >
“할아버지―!”
다급한 외침과 함께 병상으로 다가갔다. 왕회장의 손가락은 미약하지만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치 글자를 쓰듯 획을 나누고 있지 않은가.
덕德……?
안광에 힘을 집중한 채 몇 번이고 손가락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분명 왕회장은 덕德이라는 한자를 힘겹게 표시하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 덕이란 무릇 도덕적, 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행동이 아닌가. 짱구를 아무리 굴려 봐도 당최 왕회장의 메시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 이게 무슨 뜻입니까? 덕이라니요?!”
대답은 들려올 리가 만무했다. 그때였다.
삐삐삐삐!
생명으로 직결되는 파라미터, 바이털사인이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요동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즈넉하던 방 안은 금세 기계들의 울음소리가 가득 들어찼으니.
바깥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왕회장의 침실로 주치의와 간호사가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잠시만 나가 계십시오!”
노의사의 축객령과 함께 침실 밖으로 쫓겨나듯 나갔다.
손에는 식은땀이 가득한 데 반해 입안은 소금기가 가득한 것처럼 바짝바짝 말랐다.
가정부 아주머니와 경호원들 또한 마찬가지였지. 다들 좌불안석이 되어 침실에서 의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삼십 분이 마치 반나절처럼 길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후우.”
노의사가 이마에서 흘러내린 진땀을 닦으며 침실에서 나왔다.
“회장님께서 갑작스럽게 기력을 많이 쓰신 탓에 바이탈사인이 불안정했습니다. 현재로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는 것밖에 해드릴 수 있는 조치가 없습니다. 최대한 타인과의 접촉은 삼가시고 자극을 주시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선생님, 내과적 치료를 통해 쾌차하실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회장님께서 동년배에 비해 정정하시기는 하시나 고령이시기에 섣불리 수술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수술을 하게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충분히 컨디션을 회복하신 뒤에 하시는 게 옳다고 판단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컨디션이 회복되고 있는 추세이니 종전 말씀드렸다시피 회장님께 자극을 주시지 않는 게 가장 우선입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마치 구국의 결사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더 이상 왕회장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당장 무사하시다는 것이었으니.
그나저나.
덕德.
평창동 저택을 나설 때까지 계속해서 왕회장의 주름진 손가락과 함께 덕이란 글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산 중턱에서 메아리를 치는 것처럼.
* * *
“교수님, 제일그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법학 교양과목의 자유토론 시간이었다. 주제는 시사와 관련된 것이었으니.
어느 학생의 질문에 정 교수의 표정이 잠깐이나마 경직됐다. 아무렴, 그가 제일그룹의 장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여기 있는 이들 중 당사자와 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모르리라.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중 하나입니다. 하나 법률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부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선진국에 비해서는 법률적 제도가 미비하며 징벌적 배상이 없는 탓에 무분별한 부작용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숙원 중 하나입니다.”
“손장원 회장이 쓰러지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흠.”
평소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다. 하물며 애초에 자유토론이 아닌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이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왕회장의 병상 소식이었다.
정 교수는 짐짓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운을 띄웠다.
“손장원 회장은 제일그룹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서 대한민국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현재 병상에 누워 있다는 것은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본 교수가 보기에 제일그룹은 강풍에 흔들릴지언정 꺾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일그룹의 경영 체제는 이미 손장원 회장의 후계인 손일선 사장이 정립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정 교수는 왕회장과 손일선 사장의 라인을 탄 듯했다. 자유토론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던 학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도 많은 질문을 해왔다. 시사와 관련된 질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답해 줄 수 있는 선에서는 선뜻 해주었으니.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과도해지는 것이었으니. 정 교수가 학생들을 향해 눈치를 주지 않았더라면 팬미팅 현장을 방불케 했으리라. 아무렴, 마치 연예인을 바라보듯 나를 쳐다보지 않는가.
“다녀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곧장 이촌동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애마를 몰고 남한산성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머릿속에 왕회장이 손가락으로 남긴 덕德이라는 글자가 맴돌았기에.
“강현 학생, 저녁은?”
“학교에서 친구랑 학식 먹고 왔어요.”
“아유, 강현 학생 주려고 갈비찜 해놨는데.”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아주머니.”
괜스레 아주머니에게 저녁상을 두 번 차리게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물며 수십 년 만에 다시 먹는 대학교 학식은 꽤나 입맛에 맞았다.
그나저나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으니.
거실로 걸어가자 할아버지가 전에 없던 진중한 표정으로 TV 브라운관을 노려보고 계셨다. 어머니와 아버지 또한 긴장한 기색으로 브라운관을 바라보고 계셨으니.
[제일전자 분식회계와 관련된 정황 증거들이 검찰에 고발되었습니다. 검찰 측에서 밝힌 정보에 의하면 익명의 제보자가 제일전자 분식회계와 관련된 중점 사항들을 제보하였고 검찰 측에서는 이를 신빙성 있다고 판단하여 당초 분식회계와 관련해 검찰 조사 중이던 제일전자 손일선 사장을 구속 조치하였습니다. 또다시 내일 증권시장에 피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검찰 현장에 나가 있는 리포터 연결해 보겠습니다.]아홉 시 뉴스의 앵커가 긴장된 얼굴로 제일전자 손일선 사장의 구속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것도 그럴 것이 설마하니 검찰이 제일전자 손일선 사장과 맞대결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하물며 분식회계와 관련된 정황 증거들이 추가 제보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손강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 *
“고기가 참 맛있죠?”
육즙이 풍부하다 못해 선홍빛의 핏기가 가득 베어 나왔다.
손강욱은 날카로운 나이프를 이용해 스테이크를 아주 맛있게 썰어 먹는 것이었으니.
고층 빌딩의 외관을 장식한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풍광까지 곁들어지자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가 않다.
“횡성에서 갓 잡아 올린 한우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가 특별히 주문했어요. 인원수가 많다 보니 지갑 지출이 컸지만 어쩌겠습니까. 다 사랑하시는 임원님들을 위한 거라서 제가 꾹 참았습니다. 사양치 마시고 많이들 드세요. 하하하.”
아무렴, 재벌 2세가 횡성 한우를 산다고 해서 지갑 지출이 컸겠느냐마는 손강욱은 진실 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기다란 식탁에는 떫은 표정의 중년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으니. 기름진 소고기를 먹으면서도 마치 떫은 감을 먹는 것처럼 안색이 하나같이 안 좋지 않은가.
“주방장, 여기 소주 좀 가져다주세요.”
손강욱의 말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주잔과 함께 초록 병들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손강욱은 손수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병을 들어 잔에 따라주었다.
“나는 아무래도 와인은 입맛에 안 맞더라고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고기에는 소주 아니에요? 자 모두, 다 함께 듭시다.”
손강욱은 소주잔을 들어 곧장 입안에 털어 넣었다.
“크, 달콤하다.”
도수가 높은 소주였지만 마치 초콜릿을 먹은 것 마냥 황홀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반면 임원들의 얼굴은 여전히 좌불안석이었다. 누가 보면 식사자리가 아니라 초대받지 않은 장례식장에 앉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여러분들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형님이 구속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아무래도 여러분들께서는 형님과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입장으로서 요 며칠 심적으로 부담감이 컸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손 전무, 도대체 우리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뭡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김 이사님.”
임원 한 명이 강단 있게 손강욱을 향해 물었다.
“저는 여기 앉아계시는 임원분들의 문제점을 전부 알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문제점이오, 나쁘게 말하면 비리겠지요.”
“손 전무, 말씀이 심하십니다!”
“김 이사님, 심한 건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형님께서 구속된 지금 제일그룹이 여태껏 쌓아 올렸던 명성은 물론이고 주가조차 흔들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같이 비리가 만연한 사람들을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전부 모가지를 쳐버리고 싶지만 어쩌겠어요. 지금 당장은 형님 하나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요.”
방금 전까지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던 손강욱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장대한 기골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는 물론이고 범虎을 닮은 깊은 안광은 마치 왕회장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으니.
임원들이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때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기, 기회요?”
“그래요. 여러분들도 사람이다 보니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고 앞으로 실수를 안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기회를 잡으시는 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지요.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손 전무, 무엇을 말입니까?”
임원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손강욱은 엷은 미소를 띠며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누가 먼저 형님을 배신하시겠습니까?”
* * *
폭풍전야를 보는 것 같았다. 손일선 사장의 구속이 확정된 이후부터 증권시장은 파도가 치는 것 마냥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하지만 여기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렴, 손강욱이 아무 생각도 없이 이토록 일을 크게 벌이겠는가.
‘손일선 사장이 구속된 동안 승부수를 띄울 생각이군.’
호랑이가 없는 굴에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손강욱은 여우가 아니라 또 다른 호랑이였다. 그것도 아주 음흉하고 노련한 호랑이였으니.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제일그룹을 차지하려고 자신의 발톱을 사정없이 드러내리라.
염병!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역사가 바뀔 것이다. 왕회장이 쓰러졌고 손일선 사장이 구속된 것만 봐도 그러했다. 내가 알고 있던 지난 삶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으니.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
“현아, 늦은 시각에 웬일이냐?”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할아버지의 서재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여태껏 머릿속을 옭아매던 비밀을 풀어헤치기 위함이었으니.
할아버지에게 평창동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덕虎이라고?”
“예, 분명 유하네 할아버지가 그렇게 손가락으로 쓰셨어요.”
“덕虎이라…….”
할아버지가 미간을 좁히며 고민에 빠지셨다. 하지만 도통 대답을 들려오지 않았으니.
아무렴, 덕이라는 한 글자만을 가지고 유추하기에는 너무 단서가 부족했다.
하지만 왕회장이 아무 이유 없이 글자를 쓰지는 않았을 터였으니. 그때였다.
“설마?”
할아버지가 좁혔던 미간을 풀어내며 말했다.
“덕수德水 선생을 말하는 것인가?”
“덕수德水 선생이요?”
“그래, 현이 너는 모를 테지만 아주 옛날에 손 회장을 가까이서 많이 도와주신 분이란다.”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지난 삶 제일그룹 장학생 시절 왕회장의 자서전을 외워가듯 읽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왕회장의 자서전에는 덕수라는 글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과거 제일그룹의 모태였던 제일상회를 세울 적에 손 회장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구나. 함경북도에서 도매업을 하던 손 회장이 서울에 내려와서 무사 무탈하게 제일상회를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덕수 선생의 도움이었지. 아마 손 회장에게 덕수 선생은 스승 혹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을 게야.”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암, 그분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하셨기에 나도 실제로 뵌 적은 없단다. 이따금 손 회장과 약주를 기울일 때마다 그분 이야기를 듣곤 했단다. 손 회장이 말하기를 자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목과 수완이 뛰어났던 분이라고 하더구나.”
믿기지가 않았다. 재계의 거두로서 왕회장을 두고 가리키는 수식어는 여러 가지였다. 투자의 제왕은 물론이고 현인, 혹은 경영의 대가라고까지 불렸으니.
그런 왕회장이 자신을 깎아내릴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대한민국에 있다니.
“아무래도 손 회장은 현이 네가 덕수 선생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 같구나.”
“할아버지,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아무렴, 왕회장이 스승으로 모신 분이지 않았던가. 살아계셨다면 김남천과 마찬가지로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노인이리라.
어찌 보면 김남천보다도 나이가 더욱 많을지도 몰랐다. 현재까지 살아 있다고는 믿기 힘든 나이였으니.
“왜 말이 안 되느냐?”
“네?”
할아버지가 단호히 말했다.
“덕수 선생은 아직도 살아계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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