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0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04화 >
런던 심포니 콘서트홀이 북적인다. 리허설이 없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단원들이 하나같이 모여 있지 않은가.
이유는 간단했다. 다름 아닌 전설의 마에스트로 여제 카라스의 지도가 있는 날이었기에.
은퇴를 하고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명성은 녹록해지기는커녕 오히려 해가 거듭될수록 드높아졌다.
기라성같은 거장들조차도 그녀의 지휘를 보며 감탄했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하물며 악기 지도 실력 또한 엄청나다고 정평이 나 있지 않던가.
마에스트로 스펜서마저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 모양인지 아침 일찍 객석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카라스의 등장에 단원들이 숨죽였다. 단순한 걸음걸이만으로도 기품이 넘쳤고 단아한 눈빛은 따뜻한 느낌과 상반되게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넘쳐흘렀으니.
“제게 지도를 받기 위해 이렇게 많은 분들이 나와주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오랫동안 은퇴를 했었고 아직까지도 부족한 점이 많은 지휘자이지만 오늘 있는 힘껏 여러분들을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원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설렘이 넘쳤다. 아무렴, 카라스의 지도를 받는 것은 음악인으로서 그 어떤 영광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일이리라.
일례로 유명 천재 피아니스트였고 칼제만이 오스트리아에서 칩거 중이던 카라스에게 지도를 받고 싶어 거액을 제시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었을 정도였으니.
각기 다른 곡을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콘서트홀의 천장에 닿았다.
각자의 개별연습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언뜻 들으면 마치 불협화음처럼 제각기 악기의 소리를 찾아내기 힘들었다.
아무렴, 이토록 많은 인원이 한 자리에서 개별연습을 가진 경우는 없었으니. 하지만.
“마이클, 오른손의 채가 흔들려요. 오랫동안 굳어버린 습관을 굳이 없애려고 하지 마세요. 그걸 승화시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요.”
마에스트로 카라스는 마치 수많은 귀를 가진 것처럼 개별 악기들의 선율을 하나도 빠짐없이 잡아내고 있었다.
“에마누엘, 현의 깊이가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풍부한 음색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에요. 한번 현을 이렇게 켜 보시겠어요?”
수석 첼리스트부터 시작해서,
“악장은 흠잡을 데 없는 연주를 보여주고 있군요.”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이 서두에서는 이렇게 연주를 해보면 어떨까요?”
악장 드미트리에 이르기까지. 카라스는 마치 귀신처럼 모든 단원들의 연주를 지도해 주고 있었다.
흥분과 설렘이 넘쳤던 단원들의 눈동자에는 믿기지 않는 기색과 긴장이 함께 흐르기 시작했으니.
하물며 단원들은 공통적으로 카라스의 지도를 받으며 생각했다. 마치.
현에게 지도를 받는 것 같다고.
* * *
삐삐삐삐.
생명으로 연결되는 파라미터, 즉 바이탈사인을 알리는 기계 소리만이 침실에 가득하다.
왕회장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병상에 누워 있었다. 백발의 꽁지머리를 한 노인이 형형한 눈빛으로 왕회장을 내려다봤다.
“이놈아 언제까지 자고 있을 게냐.”
노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왔다.
“호랑이 새끼가 드디어 제 발톱을 드러냈구나. 이를 어찌할꼬.”
“선생님, 실례지만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질문?”
“예, 선생님께서 정말 덕수 선생님이 맞으신지요?”
노인의 눈이 가자미처럼 좁아지더니 나를 이 잡듯 훑었다.
김남천과는 다른 의미로 노회한 시선이다. 마치 머릿속을 읽히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으니.
“말했잖느냐, 덕수 선생이라는 이름은 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이제는 그저 초로의 이름 없는 노인일 뿐 그 어느 것도 아니란다. 손가와 처음 만난 것도 이미 햇수로는 오십 년이 다되어가는구나. 헌데 제자 놈이 스승보다 먼저 가려고 할 줄이야.”
“손 회장님께서는 제게 덕수 선생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덕수 선생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름 없는 노인을 찾아서 무어에 쓰려고?”
“예?”
“네가 보기엔 내가 힘이나 권력이 있어 보이더냐?”
기골이 장대하고 씨름대회 장사처럼 풍채가 대단한 노인이었지만 권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니, 옷매무새와 머리 차림이 마치 산속의 도인과 같았다. 그때였다.
“그래도 제자 놈이 스승을 그리 애타게 찾아 헤맸다고 하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나. 손가는 젊었을 적부터 배움이 빨랐지. 응용하는 것도 원체 도가 튼 놈이라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았어. 그런 놈이 이렇게 자식한테 뒤통수를 맞고 몸져누울 줄이야.”
“자식한테 뒤통수를 맞다니요?”
“네가 보기엔 너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모른 척을 하는 게냐? 손가 놈 또한 이미 이렇게 되기 전에 짐작을 했으니 그런 방비를 했을 테지.”
방비라니?
무슨 말일까. 하지만 덕수 선생은 설명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덕수 선생은 애틋한 시선으로 누워 있는 왕회장을 한 차례 바라보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가자꾸나.”
“어디를 말입니까?”
“여기 있어봐야 누워 있는 제자 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기라도 하겠느냐. 시간이 없으니 하루빨리 처리해 버리는 것이 좋겠지. 그래야 제자 놈 또한 기운을 차릴 테고 말이다. 호가호위라고 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 노릇한다고 딱 그 꼴이지 않느냐. 되레 호랑이 새끼가 제 아비를 짓밟은 격이니. 스승 된 도리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단다.”
덕수 선생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호랑이 사냥을 가야겠다.”
* * *
“제기랄.”
손강욱의 얼굴은 마치 화가 난 범처럼 붉으락푸르락했다. 왕변호사가 자신에게 했던 경고 때문이었으니.
다된 밥에 재가 뿌려진 것이 아닌가. 설마하니 아버지가 제3자에게 지분을 양도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도착했습니다, 사장님.”
비서의 말에 손강욱이 고개를 들었다. 차창 밖으로는 서울구치소의 전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형님!”
손강욱이 엶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결수복을 입은 손일선이 접견실로 들어왔기 때문이었으니.
손일선의 표정에는 그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미결수복이 잘어울리는데 말입니다. 기결수복도 꽤나 잘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구치소 생활은 어떠십니까?”
“썩 나쁘지는 않구나.”
“범털 중의 범털이시니 그러시겠지요. 구치소장 또한 형님의 눈치를 보는 신세이니 말입니다. 아마 서울남부교도소로 이감된 이후에도 편한 생활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교도소장 또한 이미 형님을 꽤나 어려워하는 눈치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 제가 사식도 가득 넣어드리겠습니다. 홍원이 녀석은 형님을 한 번도 뵈러 오지 않았죠? 하하하.”
명백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손일선의 눈동자에는 변화가 없다. 마치 오랫동안 도를 닦은 고승처럼 고요하기까지 했으니. 되레 손강욱이 마른 입술을 쓸어 보이지 않는가.
널찍한 접견실에는 교도관은 물론이고 변호사 또한 없었다. 손강욱과 손일선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을 뿐이다.
“형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제일그룹은 제 손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제가 제일그룹을 어떻게 할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사분오열시키고 해외 자본에 넘기겠지. 너는 제일그룹에 대한 애정이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지.”
“제가 이래서 형님을 무서워한다니까요. 구치소에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형님께서 제일전자와 제일물산에 대한 경영권과 지분을 포기한다는 약조를 해주시면 저는 더 이상 제일그룹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버지의 거룩한 유산을 제가 더 이상 훼손시킬 수 없지 않습니까?”
“제일전자와 제일물산이면 제일그룹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네가 가지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말이다.”
손일선은 여유롭게 대꾸했다.
“형님께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으실 텐데 말입니다.”
“왜 많지 않다고 생각하지?”
“형님, 허장성세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조차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마당에 무엇이 더 남아 있겠습니까. 형님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이미 제일그룹은 제 손아귀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단념하시지요.”
그 순간 손일선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웃음소리가 큰지 접견실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일순 손일선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어찌나 서슬 퍼런지 범을 닮은 손강욱조차 침을 삼킬 정도였다.
“강욱아, 옛날부터 난 네가 좋지 않았다. 안과 밖이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라서 그렇기 때문이란다. 차라리 사고뭉치로 자란 셋째 홍원이 녀석에게 좀 더 혈육으로서 정이 갔지. 네 녀석은 아니었어.”
“그건 피차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네놈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구나. 아버지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 제일그룹을 일으켜 세운 초대회장이 네가 보기엔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더냐? 내가 구치소에서 미결수복을 입은 채 앉아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못 해서 그런 것처럼 보이더냐?”
허장성세일까, 하지만 손일선의 안광은 번들거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눈앞의 손강욱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손일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히 말했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거라.”
“예?”
“덫에 걸린 놈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허망히 앉아 있는 손강욱을 뒤로한 채 손일선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 * *
“네가 그렇게 바이올린을 잘 켠다면서?”
덕수 선생이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잘하는 편은 아닙니다.”
“예끼, 이놈아. 나도 TV를 잘 안 보지만 네 녀석 얼굴은 훤히 꿰뚫고 있단다. 외국 대회에서 상을 탔을 정도면 잘하는 편이지. 겸손은 미덕이 아니리라. 그리고 손가놈이 네 녀석 자랑을 얼마나 하던지. 하마터면 네가 손가 놈 손주라고 착각을 했을 정도야.”
“손 회장님이요?”
조수석에 앉은 덕수 선생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어찌나 눈빛이 뜨거운지 마치 한 여름날의 태양 빛 같지 않은가.
“관상학적으로 보자면 네 녀석은 사업에도 도가 튼 놈인데 말이다. 예술적으로도 꽃을 피웠으니 재능이 너무 많아도 고민이구나. 만약 사업에만 재능이 있었다면 내 마지막 남은 삶에 제자로 삼아 역작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선생님, 실례지만 광양 백고래 또한 선생님의 제자인가요?”
“백고래, 그놈은 내게 가르침을 받다가 잔꾀를 부려 퇴출당한 놈이다. 돈맛이 들려 금전에 인생을 바친 놈이지. 벌로 내 이름으로 이십 년을 살게 했으니 이 정도면 되었지. 아마 이십 년 동안 덕수 선생을 찾으러 오는 잡놈들 때문에 꽤나 골치 아팠을 게야. 그렇게 돈 좋아하던 놈이 갑자기 주식 판에서 모습을 감췄으니 오죽할까. 낄낄.”
자동차는 서초동 제일그룹 본사를 향하고 있었다. 덕수 선생이 다짜고짜 자동차를 제일그룹 본사로 몰라고 했으니. 얼떨결에 기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 제일그룹 본사로 향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지금 저희가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없을 텐데요.”
“끌끌, 제자 놈이 말하기를 바둑판에서도 국수만큼이나 앞을 내다보는 놈이라고 하더니만 영 눈치가 없구나. 이미 제자 놈은 이런 사달이 벌어질지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단다. 손강욱이 그놈이 싹이 아주 노랬거든. 또 자기 마음 숨기는 건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아무래도 범의 탈을 쓴 뱀일 게야.”
그 순간 자동차가 제일그룹 본사에 도착했다.
덕수 선생은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로비까지 들어섰다. 졸지에 덕수 선생의 뒤꽁무니를 쫓게 되었으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로비에 상주 중이던 경비원이 덕수 선생을 막아섰다. 눈빛은 형형할지 모르나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척 봐도 산속에서 도를 닦던 도인같은 차림새이지 않은가.
그때였다.
“내 회사에 내가 왔는데 이유가 있겠나.”
“예?”
“회장실이 몇 층일꼬.”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경비원이 미간을 좁히며 덕수 선생에게 다가설 때였다. 로비 너머에서 나이가 지긋한 임원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오지 않는가.
나도 일찍이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원로라고 불릴 만큼 왕회장을 보좌하는 임원진이 아닌가. 지난 삶 손일선 사장 또한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니.
그때였다. 가장 앞서 있던 임원 한 명이 덕수 선생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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