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07)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07화 >
탁!
김남천은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활을 푸는 것은 상념을 떨쳐버리기 아주 좋았기에.
바둑판 위에 백과 흑이 차례로 쌓여갈수록 마음속의 평화도 다시 도래하는 것만 같았다.
김남천의 주름진 손가락이 다시 흑돌을 집을 때였다.
“어르신, 손강욱 측에서 재차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비서의 물음에 김남천은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 전부터 계속해서 서울에서 사람이 내려오지 않았던가.
한날은 자신과 만나고 싶다고 대문 앞에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허나 김남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흡사 함흥차사와 같은 모습이었으니.
쯧.
김남천은 속으로 혀를 찼다. 명백히 수읽기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설마하니 ‘덕수 선생’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우리는 더 이상 손강욱과 손을 잡지 않는다.”
비서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물러났다.
김남천은 그 누구보다도 시국을 잘 읽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매국노라 불렸으며 군부정권 시절에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라고 불렸던 이가 아닌가.
대한민국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김남천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드물 정도였으니.
‘덕수 선생.’
대마를 잡는 신의 한 수처럼, 왕회장이 준비한 인물은 판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대단한 수였다.
한때 김남천 또한 ‘덕수 선생’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재계에서도 아주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제일그룹 왕회장에게 스승이 있다는 사실은.
하지만 신기루처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이십 년 동안 덕수 선생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만난 것은 덕수 선생의 이름을 빌려 쓰고 있는 가짜였을 뿐 진짜는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어찌나 귀신같이 자취를 감췄던지 군부정권의 힘을 빌려도 못 찾을 정도였다.
“혜아는 한국에 들어왔다지?”
“예, 어르신.”
“채비를 마치고 그 아이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거라.”
분명 덕수 선생을 찾아낸 인물은 그 아이일 것이다.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와 광양 백고래와 만나고 싶다고 할 때부터 눈치채지 않았던가.
자신이 이십 년 동안 찾아도 찾지 못했던 덕수 선생을 단박에 찾아낼 줄이야. 분명 예사 아이가 아니었다.
“지금쯤 서울에서는 피바람이 불고 있겠군.”
아무렴, 덕수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진득한 피바람의 향기가 불어올 것이다. 기세가 등등했던 손강욱이 이 난국을 타파할 수 있을까.
김남천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백돌을 집었다. 만약 지금 그 아이가 자신에게 그때와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리 답해주리라.
1할.
* * *
파도처럼 감정의 물결이 일렁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경악을 머금고 있었다.
그중 단연코 백미는 손강욱이었으니. 찢어질 듯 부릅떠진 눈가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상당히 대조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아, 아버지―!”
설마하니 왕회장이 나타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손강욱의 동아줄을 잡은 임원들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손강욱이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였다.
“제일그룹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경영과 사업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반, 저 친구가 바로 내가 말한 적임자일세. 어떤가, 손강욱 사장. 저 정도의 인재라면 마음에 들겠는가?”
손강욱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휠체어에 올라탄 왕회장의 눈동자는 명백히 엄청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한순간에 주총장을 압도한 것은 물론이고 모두를 긴장과 침묵에 빠뜨리게 하지 않았던가.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쩌겠는가. 어차피 현재 제일그룹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내가 결정한 사안이니 말이야. 설마하니 자리를 내놓는 마당에 이정도 발언도 불가하다면 내가 깽판을 놓아버릴 게야. 그리고 공과 사는 똑바로 해야겠지. 손강욱 사장.”
“공과 사?”
“자네가 앞에서는 제일그룹을 위한답시고 제일전자의 손일선 사장을 몰아낸 것은 좋았네만, 내 알아보니 자네도 그렇게 깨끗한 양반은 아니더군. 특히나 지금 제일전자를 외국계 자본에 팔아넘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 자신을 따르던 임원들은 나몰라라 한 채 말이야. 설마하니 이토록 빨리 매각 준비를 서두를 줄은 상상도 못했네. 마치 손장원 회장이 쓰러질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더군.”
손강욱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임원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손강욱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 순간 단상 위로 휠체어가 올라왔다.
“모두 그동안 잘 있었는가.”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왕회장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시선을 받은 임원들은 하나같이 겁먹은 표정이었다.
개중에는 자신과 손일선을 따르다 손강욱의 편에 붙은 임원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을 이 자리에서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제일그룹이 많은 사건에 휘말렸더군. 특히나 제일전자 손일선 사장의 부재로 인해 그룹 차원의 경영 시스템이 마비된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어. 특히나 그 빈자리를 전문 경영인도 아닌 제일물산의 손강욱 전무가 차지할 줄이야.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겨도 유분수일 텐데 그대들은 그렇게도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는 말인가?”
마치 자신을 면박주는 듯한 왕회장의 말에 손강욱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제일전자의 분식회계와 관련한 정황은 검찰에서 조사를 하고 있지만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지. 난 손일선 사장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세. 아마 검찰에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난 이 자리를 빌려 그룹에서 필요 없는 이들을 정리할 예정이야. 물론, 그들의 업무적인 능력을 평가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그룹에 해악을 끼친 존재들을 말하니 다들 이해할 것이라 믿네.”
임원들의 눈동자에 긴장이 흘렀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자신들은 어찌 보면 왕회장을 배반하고 손강욱에게 붙어먹은 박쥐같은 존재들이었으니.
기나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 있던 손강욱조차도 말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먼저.”
왕회장의 안광이 한없이 번들거렸다.
“손강욱 사장, 자네의 시시비비부터 가려보세.”
손강욱의 일주일 천하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 * *
아마 방송국과 신문사만이 노났을 것이다. 아무렴, 하루가 멀다 하고 특종이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뉴스에서는 하루가 머다 하고 왕회장의 소식을 다루고 있었다. 하물며 왕회장은 이튿날부터는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서였을까, 휠체어도 타지 않고 제일그룹으로 출근을 했다고 한다. 그나저나.
“어르신은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예끼, 이놈이 아침부터 면박을 주는 게냐?”
덕수 선생은 계속해서 이촌동 저택에 머물고 있었으니.
아침부터 갈비를 드시고 계시지 않은가. 벌써 밥공기를 몇 그릇째 비웠는지 모를 정도였다.
갈비 한 쪽을 맛있게 뜯어먹던 덕수 선생이 부연했다.
“손강욱을 완전히 잡으려면 제자 놈이라고 해도 시일이 꽤 걸릴 테지. 내가 그걸 도와주기 위해 지리산에도 가지 않고 여기 남아 있는 거잖느냐. 지금쯤이면 이제 가을 제철 나물을 채취해야 할 시기인데 말이다. 에잉, 아까워.”
“그게 아니라 이촌동이 아니라 평창동에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놈아 내 입맛은 평창동이 아니라 이촌동이 맞아. 그리고 네 할아버지도 오랜만에 말벗이 생겨서 좋아하던 눈치인데 말이다. 이제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이 노인을 쫓아내려고 하고 있다니. 서러워서 살 수 있을꼬.”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은 여전히 여유롭기 그지없다.
“네놈은 앞으로 뭘 할 생각이냐?”
“예?”
“또 앵무새처럼 묻는 게냐. 내가 사주팔자와 운명철학을 공부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현이 네놈은 사업운도 대통할 놈이라서 뭘 해도 대박이 날 팔자야. 헌데 음악적으로도 재능과 천운이 따라주니. 마음 같아서는 내가 네놈을 가르치고 싶지만 가장 중요한 건 본인 의사가 아니겠느냐.”
덕수 선생의 물음에 나는 뜸을 들였다. 것도 그럴 것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직까지 정확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
지난 삶처럼 물욕과 권력을 쫓기는 싫었다.
하지만 덕수 선생과 함께한 며칠 동안 재계의 전반적인 일을 경험하다 보니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것을 느끼지 않았던가.
덕수 선생도 그러한 내 심중을 파악한 모양.
“현이 네놈은 전형적인 승부사다. 손강욱으로 인해 흔들렸던 제일그룹의 주식을 네놈이 긁어모았다는 걸 모를 것 같으냐. 제자 놈도 그런 네놈의 내면을 알아보고 그토록 좋아하는 것일 테지. 암, 내가 제자 놈이었으면 손일선 다음으로 네놈을 후계자로 점 찍었을 게야. 어차피 제자 놈 손녀하고 현이 네놈이 결혼할 생각이 아니었더냐?”
“어르신, 유하는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예끼, 예전 같았으면 이미 시집을 가고 아들을 낳았을 나이인데 내숭을 부리고 있구나. 얼굴은 백면서생처럼 곱지만 네놈 마음속에 나만큼이나 늙은 노인이 앉아있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으냐. 한 번씩 현이 네놈이랑 대화를 하다보면 늙은 노인네랑 대화를 하는 기분이라니까.”
덕수 선생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읽히는 기분이었다.
하물며 덕수 선생은 다른 노인들과 다르게 자신의 마음을 속으로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직설적인 화법에 내 마음도 요동치는 것이리라.
“행복을 찾고 싶습니다.”
“행복?”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서요.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건 꼭 아니더라고요.”
“누가 보면 그런 인생을 이미 한 번 겪어본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그럼 가장 좋은 방법이 네 눈앞에 있지 않느냐. 더 이상 여러 일에 미련을 두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해라.”
“원하는 것 말입니까.”
“그래, 네놈은 한 번씩 볼 때마다 너무 오지랖이 넓어.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네놈이 나를 찾을 이유가 무엇이었더냐. 고작 해봐야 제자 놈과의 인연 때문이 아니었더냐.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결코 못할 일이었어. 이제는 그런 오지랖 그만 부리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만약 경영을 배우고 싶거든 나를 찾아오고 말이다.”
나로 인해 말미암아졌던 역사의 뒤틀림이 고쳐지고 있었다.
덕수 선생의 조언은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기 충분했으니.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
지잉.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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