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1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19화 >
“장군이오―!”
왕회장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기색이 역력하다. 반상 위에는 홍의 차포마상이 죽지도 않고 살아 있다.
마치, 진법을 펼치듯 청을 압박해 나가는 홍의 기세가 대단했다.
모르긴 몰라도 왕회장의 장기 실력은 바둑보다 뛰어나리라.
“손가, 자네 요즘 밥만 먹고 장기만 배웠나?”
“영감탱이, 자네한테 바둑이 안 되니 이제 장기로 승부를 볼 생각이라네. 어째 한 수 물러줄까?”
“됐네, 됐어. 한 수 물러준다고 해서 갑자기 묘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반상 위의 승자가 결정되자 왕회장이 어린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것도 그럴 것이 여태 유 회장을 상대로 바둑에서 이겨본 적이 없지 않은가.
장기까지 끌어온 것이 어찌 보면 억지 같았으나 승부욕이 심한 왕회장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유 회장 일가는 바둑귀신이 도와주는 것 같달까.
“현이가 귀국하면 장기로 코를 바짝 눌러줘야겠군. 욘석이 바둑을 둘 때면 지도 바둑을 두면서 이 할애비를 슬금슬금 도발하는데 어찌나 약이 바짝 오르던지.”
“현이를 장기로 이긴다고?”
“왜, 설마 고놈이 장기도 바둑만큼이나 잘 두는가?”
“으음, 모르긴 몰라도 못 두지는 않을 걸세. 알잖은가, 현이가 머리 쓰는 거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잘하니 말이야.”
왕회장의 얼굴에 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아무렴, 강현의 바둑 실력은 이미 아마추어를 뛰어넘고 있었다. 장기 또한 제대로 배운다면 순식간에 왕회장 본인을 따라잡으리라.
그때였다.
“그건 그렇고 요즘 회사 일은 어떻게 되어가나, 강욱이 놈은 어떻게 되었어?”
“고놈은 내가 봐주지 않아도 이미 일선이가 손을 봐주고 있네. 조만간 검찰에서 손강욱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질 게야. 일선이가 강욱이 놈을 아예 이번 기회에 회생불능으로 만들 생각이더군.”
“범의 아가리에 얼굴을 들이민 꼴이구만.”
왕회장은 물론이고 손일선 또한 회사 경영에 있어서는 혈육의 정을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손강욱은 그야말로 난을 일으킨 인물이 아닌가. 회사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쉽사리 끝나지는 않으리라.
“참, 유하가 미국에서 사라졌다더군.”
“손가, 그게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일세. 휴일을 틈타 몰래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 경호원들이 몰래 함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나저나 영국행 티켓을 용돈으로 준비할 정도라. 우리 손녀 참 대단하지 않은가?”
왕회장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부연했다.
“아니면 우리 손녀 사위가 대단한 겐가?”
* * *
“유하?”
강현은 저도 모르게 유하의 이름을 불렀다. 꿈을 꾸는 것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유하가 부름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왈칵 강현을 껴안았다.
이제는 유하의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키가 커진 강현이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강현이 선물했던 푸른 색 큐빅이 박힌 머리핀이 보였다.
“유하야, 갑자기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어?”
“오빠는 나 보기 싫었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오빠, 보고 싶어서 몰래 왔어.”
손유하는 말괄량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강현은 반가운 한편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렇지 몰래 비행기를 타고 올 줄이야. 하지만 왕회장의 성격이라면 분명 유하가 보지 못하는 어딘가에 경호원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이 발칙한 아가씨를 혼내주기보다는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아무렴, 자신이 보고 싶어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 안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오빠, 학교생활은 재밌어?”
“응. 한국에서 다녔던 대학 생활도 재밌지만 왕립음악학교도 마음에 들어. 일단 음악에 있어서는 뛰어난 분들이 많으니까.”
“그럼 교수님들이 직접 레슨도 해주는 거야?”
손유하의 물음에 강현은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뜸을 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강현은 개인 레슨을 받으면서 교수들이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에.
“오빠, 나 학교 구경시켜 줄 수 있어?”
강현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일이었기에 일반인의 출입도 허가된 왕립음악학교였다.
고향으로 내려간 학생들이 있는 반면 가족들이 왕립음악학교가 자리한 사우스켄싱턴까지 가족들이 올라온 경우도 있었다.
정원에는 이미 학부생들의 가족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뛰노는 중이었다. 강현은 손유하의 손을 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강현을 알아본 학부생들의 시선이 이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오롯이 유하를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기에.
왕립음악학교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면서 유하의 표정이 밝아지자 강현은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지난 삶과 이번 삶을 통틀어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유하가 유일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는 일전 사브리나가 홀로 연주했던 정원 너머 숲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기에 그녀를 위한 콘서트홀이 마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손유하는 나뭇등걸에 걸터앉고는 한 명의 청중이 되어 강현의 연주를 감상했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반주를 해주었고 나뭇잎이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아련히 간지럽히는 가운데 은은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짧은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지만 어느새 바깥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던 대화와 시선을 교환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렀다. 강현이 유하를 호텔로 보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오빠, 나 잘 곳이 없는데…….”
“호텔은?”
“예약 안 했어. 그냥 여권하고 티켓만 챙겨서 몸만 훌쩍 온 거야.”
이런 대책 없는 아가씨를 보았나. 하지만 강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왕립음악학교 주변의 호텔을 예약해 줄 수 있기에.
하물며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는 분명 유하의 경호원들이 자리하고 있으리라. 그때였다.
“나 오늘 오빠랑 같이 있으면 안 돼?”
* * *
“현은 요즘 어떤가요?”
새뮤얼 총장의 물음에 비앙카 교수는 짐짓 뜸을 들였다.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단체 강의에서 두각을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수들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업이 끝나고 학부생들의 질문에도 자리에 남아 대답을 해주더군요. 그 탓에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학부생들 또한 현에게 지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질투와 시기를 가졌던 학생들 또한 일전 음악회에서 현의 모습으로 인해 전부 사그라들었고요.”
“교수님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게 좀 문제입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비앙카 교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현은 개인 레슨 한 교수들은 전부 자신들이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가르칠 게 없다니요? 명색이 왕립음악학교의 교수님들이 아닙니까. 현의 커리어가 대단하기는 하나 연륜과 경험은 교수님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습니다. 그들이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현을 너무 띄워주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가르칠 게 없다는 표현보다는 가르치면 안 된다는 표현이 옳은 것 같았습니다.”
“가르치면 안 된다?”
비앙카의 말이 이어질수록 새뮤얼 총장의 두 눈에는 흥미진진한 기색이 서렸다.
“저 또한 현과의 개인 레슨을 하고 나서야 다른 교수들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바이올린 레슨을 넘어서 음악적 가치관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 아이의 음악적 가치관은 이미 오롯하게 틀이 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가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틀이 말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면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섣불리 저희의 편견과 경험에 의한 지식을 불어넣었다가는 앞으로 오염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오히려 단체 강의를 제외한 시간은 자율 시간을 보내며 사브리나와 같은 또래의 천재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천재들끼리의 교류가 일반 교수가 가르침을 주는 것보다 현에게는 값진 경험과 지식이 될 테니까요.”
새뮤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앙카 교수는 자신의 절친한 친우인 스펜서만큼이나 음악에 있어서는 냉정한 인물이었다.
하물며 바이올린 전공의 학부생들에게는 다소 무섭다는 인식이 있을 만큼 까탈스럽지 않았던가.
“그래도 현에게만 개인 레슨을 없애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총장님께서는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비앙카 교수는 담담한 눈빛으로 새뮤얼 총장을 바라봤다.
“바이올린 전공의 교수들은 현과의 개인 레슨 시간을 보내며 분명 깨달았을 겁니다. 그렇기에 때문에 현과의 개인 레슨을 꺼려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앞으로 바이올린 계를 이끌어갈 거장의 가치관에 티끌만큼의 누도 끼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 * *
토미는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다 못해 기쁨의 비명을 내지를 정도였다.
영국 전역의 음악 신동들이 모인다는 왕립음악학교에 입학한 이래 이토록 행복했던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알버트 교수님에게 잔소리를 들어도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이상한 경험도 했다.
“토미!”
은빛 머리카락이 햇볕에 반사되며 출렁였다.
토미는 식당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브리나의 모습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근깨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덩실거리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토미, 이렇게 나를 기다리게 할 거야?”
“미, 미안. 원래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평소 같았으면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을 때면 머리도 감지 않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갔으리라.
하지만 사브리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깨끗하게 세안을 한 것은 물론이고 런던 시내 잡화점에서 샀던 향수까지 뿌렸다.
옷매무새 또한 구김이 있을까 다리미로 펴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가한 것이다.
“장난이야, 나도 얼마 안 기다렸어. 그런데 현은 아침은 안 먹을 건가 봐?”
그러고 보니 현이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세 사람 중에 가장 부지런한 것은 강현이었다.
잠이 없는 것마냥 매번 아침 일찍 일어나 악상을 되뇌며 악보를 그려 나가는 모습은 토미로서는 경이롭기까지 했었다.
사브리나와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간단히 산책을 한 토미는 곧장 강현이 머물고 있는 기숙사로 향했다.
휴일을 맞이해서 그런지 사감 선생님이 없을뿐더러 기숙사에서 기거하는 학생들 또한 적었다. 대부분이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간 것이리라.
터벅.
강현의 방 앞에선 토미는 노크를 했다.
어?
노크를 몇 번이고 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지 않은가. 평소 같았으면 노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어줬을 강현이었다.
아침 일찍 어디를 간 것인가도 싶은 찰나 문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강현의 모습이 보였다. 이불을 목 밑까지 덮고 자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어젯밤 늦게까지 악보를 써 내려간 것일 터. 토미가 강현을 깨우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갔을 때였다.
오 마이……갓!
토미의 광대가 무척이나 떨리며 눈이 부릅떠졌다. 이불을 슬쩍 들춰보니 강현의 가슴팍에 한 여자애가 죽은 듯 곤히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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